여행과 인생/안데스에 서다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13)-불타는 고구마 피츠로이-

박찬운 교수 2024. 1. 28. 05:39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13)

-불타는 고구마 피츠로이-

 
 

피츠로이가 불타고 있다. 붉은 고구마 중 최상급의 고구마다!

 
 
여행 19일째. 2023년 마지막 날이다. 일행은 푸에르토 나탈레스 버스 터미널에서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행 버스를 탔다. 오늘의 목적지는 엘 찰텐. 이제 일행 모두가 꿈꾸어 오던 피츠로이 트레킹에 참가할 때이다. 엘 찰텐은 이 트레킹의 전초기지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서 엘 찰텐까지 직선거리는 가깝다. 그러나 우리는 먼 거리를 돌아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엘 찰텐으로 가는 길, 아르헨티나에 들어서자 몇 시간을 가도 이런 모습이었다. 파타고니아도 아르헨티나로 가면 이런 사막에 가까운 곳이 많다.

 
지도를 펼쳐서 엘 칼라파테나 엘 찰텐을 찾으면  토레스 델 파이네를 동쪽으로 넘기만 하면 바로 나타는 곳이다. 등산을 해서 가더라도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다. 하지만 여행자들이 이곳을 가기 위해선 먼 거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조금만 가면 아르헨티나 국경 검문소가 나타나는데, 거기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아르헨티나로 들어선 뒤, 국경 도시 리오 투비로를 거쳐 40번 도로를 타고 주야장창 북쪽으로 올라가면, 6-7시간 뒤 엘 칼라파테에 도착한다. 거기서 버스를 바꿔 타고 다시 40번 도로로 북상하다가, 비에드마 호수를 끼고 23번 도로로 들어서 두어 시간을 가면, 목적지 엘 찰텐이다.

이렇게 오니 장장 10시간. 새벽에 출발했는데도 오후 늦게서야 엘 찰텐에 도착했다.
 

드디어 엘 찰텐에 들어섰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들 중 오른쪽이 피츠로이, 왼쪽이 세로토레이다.

 

두 개의 거봉을 보자 우리 모두는 탄성을 지르고 버스를 세웠다. 마침 도로는 차가 다니지 않아 이런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산이었던가!

 
엘 찰텐에 도착하기 직전 도로상에서 피츠로이세로토레를 보았다. 오른쪽에 3405미터의 화강암 수직 직벽의 피츠로이 봉우리가 도도하게 서 있다. 그 왼쪽에 2685미터역시 수직 직벽의 봉우리인 세로토레가 서 있는데, 그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인다. 우리는 저 둘 중에서 피츠로이 트레킹을 내일 아침 시도할 예정이다.

두 봉우리 모두 세계 등반사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프로 알피니스트 중 극히 일부에게만 정상을 허락하였고 그것도 1950년대 이후에서야 가능했다. 세계적 산으로서는 높지는 않지만 머리카락 한 올 들어갈 틈이 없는 수직 직벽은 등정의 난이도에서 비교할 산이 없을 정도다.

피츠로이1952년(리오넬 테라이와 귀도 마농), 세로토레는 등반사에서 많은 에피소드(세자레 매스트리토니 에거1959 초등에 성공했다고 주장했으나 많은 의혹이 있어 인정받지 못함)를 남기고 1974년(다니엘 치아파 등 이태리팀)에서야 초등을 허용했다.
 

엘 찰텐의 거리. 이 마을은 피츠로이와 세로토레 트레킹의 전초기지로 아주 작은 마을이다. 이 도로를 타고 가면 길 양쪽으로 식당과 호텔이 있다.

 
피츠로이는 그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찰스 다윈이 남미 탐사 때 타고 온 비글호의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피츠로이는 영국 해군 군인으로서 개척적인 기상학자이자 뛰어난 측량학자였다. 그의 이름이 피츠로이 봉에 붙은 것은 그가 이 지역의 지도를 그려 세상에 알렸고, 그것이 아르헨티나가 이 지역을 영유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피츠로이는 과학자였지만 다윈의 진화론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진화론 대신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견지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우울증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끝내 자결하는 것으로 생을 끝냈다. 로버트 피츠로이가 이런 사람이었으니  우리 앞에 나타난 피츠로이도 그런 성격의 봉우리가 아닐까?

도도하고 타협없는 피츠로이... 그것이 우리 앞에 있는 피츠로이 봉우리다.
 

일출 전의 피츠로이. 이 광경만 보아도 본전은 뽑았다고 생각했다.

 
피츠로이는 미봉으로서도 유명하다. 사람들은 이 산을 세계 5대 미봉 중 하나라고 부른다. 피츠로이를 제외한 4개의 봉우리는 마터호른(알프스), 마차푸차레(네팔), 아마다블람(네팔), 알파마요(페루)인데, 모두 해가 뜨거나 질 때 햇빛에 반사되는 광경이 압도적인 경치를 보여준다. 다섯 개의 봉우리 모두 그 정상 부분은 수직의 직벽에 가깝다.

그러나 그 직벽의 각도에 있어서는 피츠로이를 따라올 봉우리는 없다. 피츠로이 트레킹은 해가 뜨기 전에 피츠로이에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가서 해가 뜰 때 봉우리에 반사되는 광경을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때의 피츠로이를 가르켜 불타는 고구마라 한다.

내일 과연 불타는 고구마를 볼 것인가, 식은 고구마를 볼 것인가, 아니면 구름에 가려 식은 고구마마저 보지 못하고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올 것인가.

하늘의 도움으로 붉은 고구마 피츠로이가 우리들 눈 앞에 나타났다.
붉은 고구마가 나타나는 순간 만세를 불렀다.
마치 아웃도어 모델이 된 느낌이다. 인생샷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몇 시간만 있으면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는다. 여행 중이라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어도 남은 몇 시간만은 뜻깊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일행 중 몇 분과 함께 식당을 찾았다.

엘 찰텐은 워낙 작은 마을이라 식당이란 식당은 이미 도착한 여행객들에 의해 모두 점령된 것 같았다. 그래도 운 좋게 음식점 한 곳을 찾아내 아르헨티나의 명물 쇠고기 스테이크파타고니아 맥주를 주문했다. 배가 고팠는지 순식간에 두툼한 스테이크는 사라졌다. 파타고니아 맥주의 알싸한 맛이 기분을 들뜨게 했다(여담이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파타고니아 맥주의 맛을 알았다. 내가 이제껏 마셔본 맥주에 순위를 매긴다면 단연 넘버원이다).

집을 떠나 거의 20여 일을 여행하다가 안데스의 맨 끝자락에서 한 해의 마지막 밤을 맞이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여행을 떠나면서 나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하자고 했는데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여행도 그저 앞만 보고 왔는지, 이곳에서도 무슨 성공신화를 쓰겠다고 나를 적잖게 학대하지는 않았는지... 반성을 했다.

앞으로도 열흘이 남았으니 이 기간만큼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고 작은 결심을 했다.
 

하산하면서 산중 호수 카프리에서 피츠로이를 바라다 보았다.

 
잠간 눈을 부치고 새벽 3시도 되기 전에 일어나 호텔 로비로 나갔다. 일행 모두가 이미 나와 있었다. 부지런도 하지!

이제 피츠로이 트레킹이 시작된다. 이렇게 빨리 서두르는 것은 불타는 고구마를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길을 2시간 이상 쉬지 않고 걸어야 한다고 하니 일행의 모습이 자못 비장하다. 어두운 시간에 사고 없이 잘 도착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보통 일이 아니다.
 

카프리에서 본 피츠로이

 
엘 찰텐 마을에서 피츠로이 트레킹 입구에 들어서자 아직 밤이고 숲속인지라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일행은 일렬종대로 산행을 시작했다.

후래시 불빛에 의지해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움직이니 30분도 안 돼 이마에서는 땀이 줄줄 흐른다.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다시 앞으로 진격에 진격을 거듭했다.

새벽 5시가 넘으니 조금씩 어둠이 물러가 산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두 시간 가까이 걷다보니 산중 호수 카프리에 도달했다. 거기서 다시 힘을 내 위로 올라가니 인솔자가 이쯤이면 피츠로이 일출을 보는데 적당한 장소라고 알려준다.
 

산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피츠로이를 보고 싶어 한참 호숫가에서 산을 바라다 보았다.

 
해가 뜨기 직전 아직 어둠이 남아 있지만 앞에서 떡 버티고 있는 피츠로이를 보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수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누르는 사진마다 작품이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점점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며 피츠로이 봉우리에 빛이 반사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피츠로이 봉우리가 발광한다. 진짜 빛을 뿜어내는 붉은 고구마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아, 행운이구나. 나에게 이런 짜릿한 순간을 허락하다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엘 찰텐 주변에서 자라는 야생화. 이런 꽃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

 
2024년 새해를 이렇게 맞이했다. 인솔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빛나는 붉은 고구마는 흔치 않습니다. 이곳에 여러 번 왔지만 오늘 같이 이 산이 불타오른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올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행운이 오길! 붉은 고구마 사진을 선물로 여기에 올린다.

여담 하나, 인터넷에 ‘피츠로이 트레킹’이라는 검색어를 넣어보시라. 대한민국 사람들이 요즘 남미여행을 많이 가고 이곳은 필수 코스 중의 하나니, 수백장의 사진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만한 붉은 고구마를 발견하긴 힘들 것이다. 이런 순간은 아무 때나 오지 않는 법이다. 붉은 고구마 중 최상급의 고구마다!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 1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