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 123

지식인의 글쓰기-독자 중심의 명료한 글을 쓰자-

지식인의 글쓰기-독자 중심의 명료한 글을 쓰자- 평소 독서를 좋아하는 지인이 내게 한마디 한다.“교수님, 저는 인문학 책 읽기를 좋아해요. 요즘 현대 철학 책을 읽는데, 너무 어려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왜 글이 그렇게 꼬였는지 풀을 수가 없어요.”이 말을 듣고 한참 생각했다. 왜 글이 어려울까? 페북 공간을 하루에도 셀 수없이 들어오면서 남의 글을 본다. 어떤 글은 알기 쉽지만, 또 어떤 글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어디서 그런 차이가 오는 것일까?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말한다. 나는 이 위기의 근본적 원인 중 하나를 글쓰기에서 찾는다. 지식인, 그중에서도 인문학자나 인문서 번역가들은 알기 쉬운 글을 쓰고, 알기 쉽게 번역해야 한다. 그래야만 글을 읽는 저변이 ..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런 글을 올릴 줄이야! 마치 자아비판을 하는듯하고, 종북논쟁에서 자기변호를 하는듯하여 영 마음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한번은 치러야 할 통과의례라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해 이 글을 쓴다. 내 페친 수가 4천 명이 넘었다. 증가속도로 보아 올 여름을 넘기면 한계수치에 접근할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요즘 친구요청에 부쩍 보수적인 대응을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5명이 친구요청을 해 왔는데, 전원 거절했다. 플필 사진이 없는 요청은 우선 거절했고, 사진이 있더라도 감이 이상한 경우도 모두 거절했다. 한 사람은 긴가민가해 우선 수락했다가 타임라인을 확인하니 역시 이상해서 즉시 페절하고 말았다. 내가 과거와 달리 페친요청에 보수적인 대응을 하는 게 오로지 페친 수 ..

지금, 민변 없는 대한민국을 생각할 수 있는가

지금, 민변 없는 대한민국을 생각할 수 있는가 어제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집단탈북 사건‘과 관련해 지금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선 우리 인권사에서 길이 남을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글을 올렸다. 짧은 글이었지만 반향은 컸다. 수많은 페친들이 관심을 보여주었고, 글을 외부로 퍼트려주었다. 급기야는 몇 개 언론매체에도 소개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어느 분이 메일을 보내왔다. 요지인즉, 위정자도 생각하고, 남북관계도 고려해, 자중하라는 글이었다. 2년 전부터 SNS에 활발히 글을 올리다보니 가끔 이런 메일이나 우편물을 받는다. 언뜻 보아도 특정 세력이 보낸 경고장 같아, 마음이 편친 않으나, 나는 이런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다. 그 내용이 직접적으로 나를 협박하지 않는 한, 그저 나와 뜻을 달리 하는 사람..

일요일의 단상, 다시 허리띠를 조입니다

일요일의 단상, 다시 허리띠를 조입니다 지난 2년 이상 이곳에 많은 글을 써 왔습니다. 세상에 대한 제 생각을 토해 냈습니다. 제 관심사에 대해 말하고 관련 사진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페친이 생겼습니다. 그 수가 어느새 4천 명이 넘었습니다. 요즘 글이 써지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한 숨만 나올 뿐입니다. 이곳에 들어오면 세상만사가 어지럽습니다. 혼란한 정치, 부정의한 경제, 죽고 죽이는 사건, 비난과 원망의 말과 글... 타임라인을 잠시 훑어보다가 이내 지쳐버리곤 합니다. 이 시대에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학교에 몸담고 있으니 그저 조용히 연구하고 강의나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할까.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해 봅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지난 몇 년간 글을 써..

기! 끼! 깡!

기! 끼! 깡! 어제 종강을 했습니다. 처음 설강한 교양과목이었기에, 나름,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큽니다. 좀 더 좋은 강의를 했을 걸, 좀 더 사랑해 줄 걸, 좀 더 많은 것을 줄 걸.... 아쉬운 마음에 이런 이야기로 강의를 맺었습니다.----------친구들아, 자유롭게 살자. 친구들아, 세상에 나가 거침없이 살자.그리 살기 위해선, 우리 몸과 마음을 기운차게 만들자. 기! 그리 살기 위해선, 우리 자신을 좀 다르게 바라보자.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살 필요가 없다. 나만의 길을 가자. 끼! 그리 살기 위해선, 때때로 인생에 승부를 걸면서 살자. 위험한 것 같아도 마음속에서 무언가 강한 울림이 있을 때 그것에 응답하자. 깡! 우리 외치자...

그 때 그 사람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때 그 사람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맡은 첫 사건-- 30대 초반의 나. 당돌하고 자신만만한 시절이었다. 꿈은 크고 푸르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비록 빛은 바랬지만 푸르른 꿈만은 마음 속에 계속 간직하고 있다.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난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일이다. 그는 무명의 변호사인 내가 맡은 첫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어느 날 중년의 여인이 내 사무실을 들어왔다. 행색이 초라했다. 그 여인은 이 사무실 저 사무실을 전전하다 내 사무실을 들어 온 모양이었다. 그 여인은 아들 일로 변호사를 구하고 있었다. 아들은 형사사건에 연루되어--사건 내용은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아무래도 자세히 말하면 변호사의 비밀유지의무에 반하는 것 같으니--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고 구금되어..

어딜 가든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아라

어딜 가든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아라ㅡ한국을 떠나는 조카에게ㅡ 이런 글을 여기에 올려도 되는지 많이 망설였다. 사적인 이야기는 SNS에서 좀처럼 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쓰기로 했다. 내 조카도, 그 부모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기에. 내 조카 태균은 여동생 아들이다. 올 해 26세. 필리핀에서 고교와 대학을 나왔고, 한국에 돌아와 현역으로 병역을 마친 다음, 서울의 모 대학 경영학과로 편입해 올 2월 졸업했다. 매우 우수한 청년으로 졸업할 때 총장상을 받았다. 조카는 아직 새파란 젊은이지만 그 나이 또래에 비해 어른스럽다. 일찍이 아빠(내 매제)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어린 시절 큰 어려움을 겪었다. 어린 아들과 딸을 기르느라 고생한 여동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켠이 ..

고 김창국 변호사님을 추모하며

고 김창국 변호사님을 추모하며비판하고, 저항하고, 자유를 그리며 살다 박찬운(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 고 김창국 변호사님 캠퍼스에 하얀 벚꽃이 만발했습니다. 계절의 여왕을 완상하던 중 바람이 한 차례 부니 꽃잎이 눈송이처럼 떨어집니다. 그때 한통의 문자. ‘김창국 변호사 별세’. 그 분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날카로운 눈매의 깡마른 노신사. 제가 26년 전 새내기 변호사로 그 분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50초로의 중년에게서 느껴지는 일반적인 인상이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포스가 넘쳤고, 자신감이 충만한 분이었습니다. 법조인들 사이에서 고인은 젊은 시절 수재로 통했습니다. 약관 21세에 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일면에 불과합니다. 만일..

승우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

승우가 그린 승우가 그린 나는 그 아이를 본 적이 없다. 그저 그 친구의 엄마, 아빠로부터 몇 마디 들은 게 전부다. 그 아이 이름은 승우. 서울의 어느 특수학교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다. 부모님 이야기로는 자폐아라고 한다. 나는 그 아이를 본 적이 없지만 사실 매일같이 만난다. 오늘도 방금 전 점심을 먹고 그 아이를 만나고 왔다. 그의 엄마가 만들어준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말이다. 나는 점심 때면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 산책 겸 내 연구실에서 2킬로미터 쯤 떨어진 뚝섬역 근처로 걸어간다. 내가 발견한 몇 곳의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요즘은 어느 가정식 백반 집엘 자주 간다. 단돈 오천 원에 집에서 보다 더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집!) 늘 상 가는 카페에 들어간다. 승우의 과 내 책 바로 승우 부..

거인과의 만남, 거인의 이별

거인과의 만남, 거인의 이별 사진 설명: 겐셔 외상 왼쪽으로 최영애(인권위 상임위원), 서보혁(인권위 북한인권 담당자), 오른쪽으로 김만흠(인권위 비상임위원), 내 옆의 인물은 기억나지 않으나 당시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 담당자였음.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 전 독일 외상 한스 디트리히 겐셔. 89세. 그는 독일 자유민주당(FDF) 사람이지만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정부에서 각료로 출발해 슈미트 수상과 헬무트 콜 수상 정부에서 외상(부총리 겸직)으로 일했다. 그 기간이 자그만치 18년. 독일 현대 정치사에서 아마도 최장수 외상이었을 것이다. 독일의 동방정책은 브란트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현실적으로 집행한 이는 겐셔였다. 그는 헬무트 콜과 함께 통독의 주역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