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법률

가인 김병로

박찬운 교수 2018. 2. 5. 12:14

가인 김병로는 누구인가

-한인섭 <가인 김병로>를 읽고-

 



며칠 짬을 내 책 한 권을 읽었다. 아주 샅샅히 읽었다. 한인섭 교수가 쓴 <가인 김병로>. 900여 쪽에 가까운 대작이다. 저자가 오랜 기간 천착해 온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의 사법사(인권변호) 연구의 결정판이다. 방대한 내용을 주로 1차 자료에 의존하면서 독자적인 해석론으로 서술했다. 식민 시대의 항일운동, 그 중에서 가인 김병로를 포함한 애국지사의 활동에 대해서, 일반적 역사학적 관점에서 연구한 책은 적지 않지만, 그 운동과 인물을 오로지 이란 앵글을 통해 분석한 법사학적 저술은 만나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가인 김병로>191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를 다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사법사다.


3-4일 시간을 내 아주 철저히 읽었다. 마치 고시 공부하듯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간 하면, 이 책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책이다. 적지 않은 세월을 법조인으로 살아온 나로선, 법조 대선배가 잠시라도 내 곁에 환생해서, 한 세기 전의 선배의 지난한 삶을 조용한 음성으로 들려준 기분이다. 그의 삶은 결코 저 피안의 삶이 아니다. 나 같은 후배 법조인도 예외 없이 만났던 그 삶을 살아오면서, 고뇌하고, 좌절했으며 그런 중에도 무언가를 조금씩 이루어온 삶이었다. <가인 김병로>를 보면서 내 주변의 법조인들을 끊임없이 떠 올렸다. 거기엔 그를 빼닮은 이도 있었고, 반쯤 닮은 이도 있었으며, 어림 반 푼 없는 이도 있었다. 나는 과연 어디에 해당할까?


가인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가인 김병로>에서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읽었던 부분을 중심으로 잠시 정리해 보자.


대법원 중앙홀에 있는 가인 김병로 흉상


대한민국 사법의 창조주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1887-1963)를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훨씬 넘은 현재 시점에서 그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저자는 그에 대해 책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을 세심하게 읽은 독자라면 그의 이런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가인 김병로 선생은 파란만장한 우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법의 거인이었다. 일제하에서는 항일과 독립에 앞장선 인권변호사고, 해방 후엔 초대 대법원장으로 사법권 독립의 초석을 놓았고, 청렴강직한 법관윤리상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미군정기에는 사법부장으로 사법행정의 기틀을 다졌고, 정부수립 이후엔 법전편찬위원장으로서 대한민국의 기본법률의 초안을 자신의 붓끝으로 써내려간 입법자였다. 반민특위의 재판부장으로 민족정기를 수호하려 진력했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화에 대하여는 쓴 소리를 마다않는 헌법 민주 수호자였다. 생애 말기에는 반군정 야권통합을 이룩하려는 재야민주인사의 구심점이었다. 이렇듯 그의 생애는 일제에 맞선 민족주의자,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자임과 동시에, 사법 법제의 기틀을 만든 법률건국자로서의 면모가 선명하다."(858)


지난 한 세기 대한민국 사법사에서 가인만한 인물은 없었다. 그만한 인권 변호사가 없었고, 그만한 대법원장이 없었으며, 그만한 입법 전문가가 없었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그는 명실 공히 대한민국 사법의 창조주’, ‘사법의 대통령이었다.

 

가인 김병로(1887-1963)


실력과 열정을 겸비한 법률가

가인은 전 생애를 법률가로서 열정적으로 살았다. 어린 시절엔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성장해선 신학문을 받아들여, 당시로선 과감하게 일본으로 유학을 감행해, 법률을 공부했다. 나이 30에 그는 법률 전반을 매우 체계적으로 공부해, 완벽하게 소화함으로써, 당대 최고 수준의 법률전문가로 성장했다. 귀국하여 경성법률전수학교의 교수를 지냈고 1920년대부턴 오랜 기간 보성전문의 강사로서 후학을 길러냈다. 당시 그는 민법을 비롯해 형법, 상법 등의 실체법과 소송법 전반을 강의했다. 그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그의 강의는 막힘이 없었으며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이런 실력이 결국 해방 이후 신생 국가 대한민국 법전 편찬의 주역으로 연결된다.


그의 법률지식은 해방 후 법전편찬 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최고의 법지식이 요구되는 기본법률의 제정과정에서 그는 위원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는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조문 초안의 대부분을 직접 써내려갔다. 전시 하의 악조건 하에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불식지공의 정성을 쏟아 대한민국의 기본법률의 편찬을 진두지휘했던 것이다.


책 전편에서 가인의 이런 실력과 열정을 보면서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어떤 실력과 열정을 가진 법조인인가? 요즘 한국의 법조인과 법학자들은 전공에 빠져 있다. 법학을 전반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편적인 부분에 천착한다. 법률의 깊고 오묘한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세밀함을 추구하니, 그 적용과 해석에서 공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법률가로서의 가인의 실력을 표상으로 좀 더 노력해야겠다. 법률가의 실력이야말로 시대 불문 훌륭한 법률가의 기본 조건이다.

 

이승만과 김병로


민변 변호사의 원형

나는 가인의 항일 변호를 읽으면서 현재의 인권변호사 그룹 민변이 떠올랐다. 가인은 1920년 대 초부터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사상범을 변호한다. 당시 사상범은 대부분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독립투사들이다. 나라를 잃은 시절 식민모국에서 법률을 배우고, 그 법에 따라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된 법률가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힌 동포를 어떻게 변호할까.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솔직히 말해 이런 의문 때문에 나는 오랜 기간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큰 존경심을 갖지 못했다. 모름지기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은 상해나 저 연해주에서 총칼로 대항하는 독립지사들의 몫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 70년대 유신시절의 우리 선배 변호사들의 고민이기도 했다. 독재에 정면으로 대항해 싸우는 민주투사들을 위해 변호사들이 어떻게 변호를 할 수 있었을까? 체제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면 그 변호는 민주투사들의 소위 범법행위와 다를 바가 없을텐데... 변호가 그 정도에 이를 수가 있을까. 그래서 그 선배들도 고민이 컸다. 그럼에도 선배들은 그 엄중한 시절에 그들을 위해 인권변호를 했다.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면서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가인과 특별히 다를 바 없는 고민이었을텐데...


이 질문에 대해 답을 주는 부분을 발견했다. 가인이 생전에 항일 변호를 돌아보면서 말했던 대목이다.


"원래 내가 변호사 자격을 얻기에 유의하였다는 것은 생활 직업에 치중한 것도 아니요, 재산을 축적한다는 생각은 추오도 없었으며, 다만 일정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려 함에 있었다. 변호사라는 직무가 그다지 큰 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의 현실에 있어서 첫째, 가장 우리에게 잔혹하던 경찰도 변호사라면 용이하게 폭행이나 구금을 하기 어려웠다는 것, 둘째로 그 수입으로써 사회운동의 자금에 충당할 수 있는 것, 셋째로 공개법정을 통하여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것 등이 약자인 우리에게는 큰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생각하기를 변호사라는 직무가 자기의 생활 직업으로만 하지 아니한다면 인권옹호와 사회정의에 실로 위대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곧 동지를 규합하여 집단 활동을 추진한 바도 있고, 비밀계획을 시도한 바도 있어 미력이나마 해방 직전까지 30년이란 기간을 끊임없이 시련한 바 있었다."(275-276, 가인의 1959<수상단편>)


나는 여기에 답이 있다고 본다. 어떤 국가라도 언필칭 문명국가라면 변호사는 총칼로 무시할 수 없는 직업이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도 유신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변호사는 그 잇점을 살려 누군가를 변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 역시 일부를 증언할 수 있다. 80년 대 이후 내 자신이 법률가로서 살아오면서, 무도한 전두환 군사정권을 경험하였지만, 변호사가 잡혀간 일은 거의 없었다. 변호사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살았고 그것은 일제 강점기 하의 변호사도 유사한 것이었다.


여기에다 가인은 일찍이 인권변호사들의 조직을 도모한다. 항일변론을 조직화하고 장기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고 물적 기반을 만든 것이다. 그게 바로 1923년 경 만든 형사공동연구회라는 조직이다. 사상범 변호를 목적으로 가인이 중심이 되어 허헌, 김태영, 이승우, 김용무 등이 참여했고, 후일 이인 등이 가세한 조직이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민변의 원형이라고 생각한다. 1920년 대 이 땅엔 독립투사를 변호하는 일단의 변호사들이 조직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60년 후(1988) 독재정부 밑에서 후배 변호사들에 의해 새로운 조직으로 재탄생한다. 바로 그것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곧 민변이다.


김병로 대법원장 퇴임식(1957. 12)



오만도 비굴도 없는 대법원장

사법부의 독립은 예나 지금이나 과제다. 사법부가 외부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해선 대법원장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가 어떤 외풍이라도 스스로 막겠다고 결심하고 행동하면 일반 법관의 독립은 지켜진다. 이승만은 김병로 사법부가 여러 가지로 자신의 권력 행사에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해 불편한 심기를 수시로 피력했다. 이에 대해 가인의 태도는 언제나 일관되었다. 1956년 이승만은 국회 개회식 메시지를 보내면서 사법부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이 메시지에서 매우 요상한 말을 함으로써 가인을 폭발시킨다. 이승만은 판사들이 세계에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고 야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다행히 대법원장이 그 폐단을 심히 양해해서 무슨 중대한 문제가 생길 적에는 행정부와 협의해서 정부의 위신과 법률을 공평히 참고해서 판결하는 까닭으로 큰 위험은 없는 것이다."(678)


이에 대해 가인은 사법부가 행정부와 협의해서 법을 운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단호하게 일축한다. 나아가 그는 나는 단언하노니 오늘날까지 재판에 있어나 기타 사법운영에 있어서 나의 소신과 양심에 어그러진 판단을 한 일은 한 번도 없고 장래도 없을 것을 확신한다.” “독립된 사법권 운영에 대하여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없다.”고 말한다.(681-683)


이 말은 요즘 사법부 블랙리스트 사건 조사과정에서 발견된 원세훈 사건 보고서를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만일 대법원이 청와대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것을 가인 선생이 지하에서 들었다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


가인이 국부라 불리던 이승만에 대해 사법부를 대표해 결코 굴복하지 않았던 것은 평소 그의 성품과 기개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 당시 김병로 대법원에서 대법원 판사직에 있었던 김제형의 회고담은 가인의 풍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도 한국의 사법부는 세계에 없는 권한을 행사한다는 불만과 함께 가인의 고집이 심하다는 투정섞인 불평은 하였으나, 감히 사법부에 간섭하지는 못하는데, 국무위원이나 정부기관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는 가인 선생이 온몸으로 당당히 사법부를 지킨 데 연유하는 것이었다.... 내가 모시고 있는 동안, 정초에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실 때 대법관들과 함께 선생을 모시고 몇 차례 따라간 일이 있었는데, 대통령을 대하는 자세가 3권의 1부인 사법부의 장으로서 과함이나 부족이 없는 늠름한 자세였다. 오만도 비굴도 없는 오직 의연하고 당당한 자세였던 것이다."(684-685)

 

법관윤리의 토대를 만든 가인 김병로

참다운 법관이 되기 위해서는 법지식의 구비뿐만 아니라 법관으로서 숭앙받을 인격을 구비해야 한다는 것이 가인이 늘 법관들에게 말한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항상 양심에 의거하여 책임 있고 자유롭고 임하는 것이다.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대법원장 훈시로 법관들에게 말한 것은 지금도 조금도 고칠 것이 필요 없는 법관윤리의 표상이다. 요즘 사법부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사법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는데, 전임 대법원장 양승태를 비롯해 관련자들이 가인이 말한 이 말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였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심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법관은 세상 사람으로부터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된다.

법관 한 사람의 명예실추는 법관 전체의 명예실추가 된다.

판단을 하기 전에 법정 내외를 막론하고 (의견을) 표시해서는 안 된다.

법관은 냉철하고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공허한 심정을 가지고 임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531)


이태영 여사(1914-1998)


가인의 한계, 이태영의 분루

이렇게 숭앙받는 가인이지만 오늘의 눈으로 보면 성평등에 있어서는 시대를 뛰어넘진 못했다. 가인은 법전편찬에서 가족법(친족상속법)의 성안에도 깊이 관여한다. 그 과정에서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녀평등을 법제도화 하고자 하는 여성운동이 일어난다. 그 주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법조인 이태영 여사다.


이태영 여사는 1953년 여성계를 대표하여 법전편잔 중인 친족상속법안 초안의 수정을 요구했다. 여성계가 주장하는 것은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 불혼폐지 및 초안의 부부 불평등 조항의 수정이었다. 이 때 이태영 여사는 법전편찬위원장인 김병로 대법원장을 여성계 대표들과 함께 면담한다. 그로선 가인이야말로 말이 통할 수 있는 법조원로라 생각하고 큰 희망을 갖고 대좌한 것이다. 그런데 가인의 말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김 대법원장은 굳은 얼굴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 법의 일자 일획도 못고칩니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법조계의 초년생이면서 건방지게 법을 고치라고 나서다니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고 호통을 쳤다. 내가 놀라 떨고 있는 동안에도 선생님의 꾸중은 계속 떨어졌다. ”조그만 것이 법률 줄이나 배웠다고 벌써 꼬리를 휘젓고 다니느냐, 15백만 여성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다 좋다고 살고 있는데 어째서 평지 풍파를 일으키느냐?“고 했다. 얼마나 놀라고 무섭고 슬펐는지 나는 눈에서 눈물이 아닌 핏물이 쏟아지는 듯했고 목이 꽉 막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제대로 걸음을 걸을 수조차 없어 나는 동행했던 황신덕 선생과 장화순, 표정조 선생의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그 방을 물러나왔다."(644)


가인의 이 말, 시대의 한계이었을까, 아니면 개인의 한계이었을까.


또 한 번의 한계, 정치적 판단

가인은 195712월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난다. 그의 나이 만 70. 당시 나이로선 모든 것을 은퇴할 때이지만 가인은 단순한 법률가가 아닌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승만 독재가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이니만큼 그의 역할이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이승만의 비판자로 정치 지도자로 거듭난다. 이승만의 헌정유린을 강하게 비판하고 드디어 4.19 전후의 정치 격랑에 뛰어든다. 4.19를 맞아 이승만의 하야를 촉구하고 정권이 물러나자 직접 정치 일선에 나선다. 자유법조단이란 새 정치조직을 만들어 19607월 총선에 참여한 것이다. 그 자신이 고향인 순창에서 출마하였다. 그 때 사용한 말이 고목봉출(古木蜂出). 고목나무에도 봄이 오면 꽃이 핀다는 말이다. 과연 그랬을까?


가인은 이 선거에서 민주당의 홍영기에게 석패한다. 고목나무에서 꽃이 피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참으로 애석하다. 국가 제1급의 원로급 인사로선 스타일을 구긴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정치 참여를 강권했더라도 국회의원 출마라는 방법보단 다른 방법을 찾았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가인은 이 이후 1963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뜰 때까지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정치발전을 위해 원로로서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5.16 쿠데타 이후 야권 분열을 막고 야권 단일화를 통해 민선 정부를 만들기 위해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를 쏟는다. 비록 그것은 군사정권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거인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이었을 것이다.


수유리에서 가인을 만나자

이제 이 정도로 가인을 알았으니 수유리 우이동 산 길 옆에 있는 가인 선생의 묘를 찾아갈 때다. 거기에서 대한민국 사법의 창조주 가인 김병로를 만나자.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묘비문을 읽으면서 한 거인을 기억하자. 


"무릇 시대의 탁류 앞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는 거기에 굴종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피하며 숨어사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그 탁류와 더불어 마주 싸우며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는 만인 가운데서 하나를 만나기도 어려운 것인데, 그같이 쉽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으로 모든 겨레의 흠앙 속에서 살다가 애도 속에 가신 이 한 분 계셨으니 가인 김병로 선생이 그 이시다."(856-857)

 

. 흠을 발견하다

한인섭 교수의 이 책은 그의 명저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학자로서 이만한 책을 쓴다는 건 부럽기 그지 없다. 동학으로서 존경의 염을 표한다. 다만 이 책이 후대에 길이 남을 명저가 되기 위해서 당장 고쳤으면 하는 게 있다.


일본 인명 표기 방법이다. 책은 전반적으로 일본 인명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고 있다. 예컨대 布施辰治 변호사를 일본음 후세 다츠지라고 표기하지 않고, 우리 음인 포시진치라고 표기한다. 佐佐木 판사의 경우엔 사사키라고 하지 않고, ’좌좌목이라고 표기한다. 어떤 경우엔 우리 한국인 변호사와 일본인 변호사를 함께 표기하면서, ’김병로, 이승우, 이인, 김태영, 고옥 등 18인의 변호사....‘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고옥은 일본 변호사 고야(古屋) 변호사인데, 마치 한국인 변호사로 보인다. 더욱 문제는 이런 일본음 표기가 통일도 되어 있지 않다. 어떤 경우는 제등실(齊滕実)이고 또 어떤 때는 사이토(마코토). 전부 일본어 음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지명도 표기 방법을 통일했으면 좋겠다.


소소한 오류와 입장에 따라선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적지 않지만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좋은 책을 정성스럽게 읽었다면 독자가 해야 할 일이다. 명저는 독자에게도 일정한 몫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