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법률

블루 드레스

박찬운 교수 2015. 9. 26. 18:03

[관대한 복수! 남아공의 한 재판관... 그리고 대한민국의 재판관]


세상엔 수많은 책이 있지만 우린 그것을 다 읽지 못한다. 그 책들 중에서 꼭 읽어야 할 책을 읽는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것이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침, 아무도 깨지 않을 시간에, 나는 조용히 일어나 독서를 한다. 얼마 전 사놓은 책 <블루 드레스>. 이 책은 나의 페친인 채형복 교수(경북대 로스쿨 국제법)가 얼마 전 포스팅한 것이었다. (나는 믿을만한 친구가 좋은 책을 소개하면 메모했다가 책을 사는 버릇이 있다.)


이 책은 남아공 출신으로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이 기승을 부릴 때 반인종차별주의의 투사로 살았고, 넬슨 만델라가 집권하자 초대 헌법재판관이 된 알비 삭스라는 재판관이 들려주는 남아공, 그 중에서도 헌법재판에 관한 이야기다. 헌법재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이 책은 결코 법률가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민주주의, 양심, 진실에 관해 관심이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다.


저자 자신은 아파르트헤이트 기간 중 남아공 보안요원이 차에 설치한 폭탄 폭발로 팔 하나와 눈을 잃었다. 그랬으니, 분노가 치밀만하다. 몸을 그렇게 만든 모든 자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칼을 갈만 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상을 만들 것을 맹서했다. 그는 재판관이 되어서도 법률가의 정도를 걸으면서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싶은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했다. 그것은 그가 복수할 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관대한 복수’였다.


“우리가 남아공에 민주주의를 가져왔다면 그 민주주의는 그들이 아닌 우리의 피 위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미와 백합은 내 잘녀나간 한쪽 팔뚝 위에서 그리고 동지들의 피와 눈물을 먹고 피어나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관대한 복수였다.”(55쪽)


그가 전하는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 이야기가 내게 잔잔한 충격을 준다. 과거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보다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장면이 있을까.


만델라가 들어서서 과거사를 해결하는 일이 시작된다. 과거의 아파르트헤이트를 통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고문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고서는 남아공은 한발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바로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진실을 알고 가해자가 진실하게 사과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만일 그것만 이룰 수 있다면 가해자들 모두를 사면할 용의가 있었다.


위원회의 활동 중 한 사례가 남아공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아프리카민족회의 무장 보안조직원이었던 토니 엔게니와 그를 고문했던 경찰관 벤지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토니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벤지엔에게 고문한 사실을 물으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를 질식시키려 했는지 위원회 앞에서 보여주세요. 우리가 익사할 때까지 당신이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는 기절하거나 죽어나갔습니다.”(54쪽)


『벤지엔 경사는 울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만큼 힘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또 누군가를 공포에 떨게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울고 있었다. 눈은 부어올랐고 두 뺨은 붉어졌으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는 한때 국가테러리스트로서 자신의 손으로 국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이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누가 그의 몸에 고통을 줬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와 같이 할 수 있지요?“ 이 간단한 질문 하나 때문에 국가테러리스트는 울었다.”』(54쪽)


나는 이 장면에서 한국전쟁, 유신정권, 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일어났던 수많은 인권유린행위를 기억하였다. 뿐 만인가. 지금도 광화문 광장에서 천막을 치며 진실을 밝힐 것을 호소하는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도 생각했다. 이 많은 일들에서 우리는 그 진실도, 가해자, 책임자들의 진정어린 사과도 받지 못했다. 그것이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다.


우린 과연 언제 저런 진실어린 눈물을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도 저들을 용서하자. 다시는 우리 그런 세상 만들지 말자’고 손에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남아공은 우리가 연구할 대상이다. 헌법재판 하나만 보아도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나라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보다 역사가 짧은 재판소지만 거기엔 대한민국이 참고해야 할 많은 판례가 있다. 나도 얼마 전부터 내 논문에서 남아공 헌재 판례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헌재를 이끄는 재판관들의 이력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알비 삭스가 전하는 재판관들은 이렇다.


“헌법재판소의 동료 재판관들 중 적어도 절반은 한때 테러리스트로 불렸던 사람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 테러리스트를 보호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극도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났고, 단지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온갖 굴욕과 창피를 당하고 어쩔 수 없는 모욕감에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었다.”(56쪽)


“우리는 모두 헌법을 수호하는 일에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며, 우리의 헌법이 표방하고 있는 반인종주의와 반성차별주의를 마음으로부터 지지하는 영혼들이었다.”(57쪽)


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가? 아파르트헤이트 기간 중 철저하게 고통 받았던 사람들, 그 엄혹한 시기에도 그들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이 되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만의 영웅이 아니다. 그는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한 복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민주주의의 영웅이다.


우리의 헌재는 어땠는가? 1987년 헌법 개정 이후 이제 30여년이 되었지만 그곳의 법대를 차지했던 재판관들은 어땠는가? 거기에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몸을 던진 법률가가 몇 명이 들어갔던가? 거기에 진정 대한민국 역사의 아픔을 이해하고, 이 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할 것인지를 고민했던 법률가는 과연 몇 명이었던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법률가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본다. 신영철이란 사람이, 박상옥이란 사람이 그 어려운 관문(?)을 뚫고 대법관이 되었다. 그들은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어떻게 그 자리를 차지했는가.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 자리를 그토록 원했는가.


그들은 알비 삭스의 다음 말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만약 우리 판사란 사람들이 국가가 실험대에 올랐을 때 판결을 통해 나라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면 판사로서의 소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