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법률

대한민국 법률가 역사에 정의는 있었는가 -김두식의 <법률가들>을 읽고-

박찬운 교수 2018. 11. 30. 15:35

대한민국 법률가 역사에 정의는 있었는가

-김두식의 <법률가들>을 읽고-

 



 

김두식, 또 하나의 문제작을 낳다

와우! 이런 책이 나오다니.... 신간 소개기사를 보자마자 주문을 넣었더니 저녁 늦게 책이 도착했다.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이 책의 진가를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만시지탄! 어찌하여 이런 책이 오늘에야 나왔던가. 이 나라의 법률가들의 뿌리를 이해하는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라면 두 말 할 것 없이 시간을 투자할만한 책이다. 2018년 겨울 문턱에 들어서면서 나온 문제작, 김두식 교수의 <법률가들>(창비)이다.

 

김두식은 이제 이 시대가 낳은 빼어난 문장가 중 하나라고 부를만하다. 그는 <헌법의 풍경>을 비롯해 몇 권의 책을 통해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법률가 작가다. 특히 전작 <불멸의 신성가족>은 특권의식으로 가득 찬 대한민국 법률가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독서다. 법률가들의 특유한 만연 건조체와는 결을 달리하는 글을 쓰면서, 내는 책마다 독자의 주목을 끌고 있으니, 동학으로서 자랑스럽고 한편으론 부럽기(?) 짝이 없다. ㅎㅎ

 

<법률가들>불멸의 신성가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뿌리를 탐구한 시도다. 처음부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는다면, 대한민국 법조에 품고 있는 많은 의문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이 나라의 법조인들이 어떤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탄생했는지, 그들은 이 나라가 어떤 세상이 되길 바랐는지, 그들은 어떤 삶의 목표를 갖고 법조인이 되었고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 의문이 풀린다면,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 매일 같이 회자되는 문제의 법률가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 지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얻으리라. 어제가 없는 오늘은 없지 않은가.

 

, 그럼, 이런 의문을 품어보고 아래 글을, 아니 이 책에 도전해 보자. 과연 그 시대, 그 혼란스런 해방정국에 훌륭한 판검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바로 김두식이 이 책을 쓰면서 끊임없이 자문한 의문이었고 글을 쓴 동기이기도 했다.

 

출신으로 말하는 대한민국 법률가들

로스쿨 시대가 되니 사람들 사이에선 사시출신과 로스쿨 출신을 가르면서 법조인을 품평한다.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의 직업적 출신을 법률가들만큼 중시하는 집단은 찾기 힘들 것이다. 내가 법률가가 된 1980년대는 전국의 변호사 수가 지금의 10분의 1도 안 되는 2천 명이 채 안 된 시절이었다. 그렇다 보니 선배 변호사 중 출신에 밝은 어떤 변호사는, 어느 변호사 이름만 대면, 자동적으로 그 사람이 나온 대학과 고교 그리고 시험 기수를 정확히 말하곤 했다. 모든 변호사는 이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시절이었다.

 

변호사 초년 시절 70-80대 원로 변호사들을 만나는 일이 많았다. 그 분들 중 일부는 해방 전부터 판검사나 변호사를 해 온 분들이었고, 또 많은 분들이 해방 직후 법조자격을 딴 분들이었다. 이 분들로부터 해방 전후의 법조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내가 법률가 자격을 취득한 해로부터 불과 40 여 년 전의 일이다. 이렇게 귀동냥으로 알게 된 지식도 적잖은 것이지만, 부정확한 부분이 많아, 어디 나가 자신 있게 말하거나 글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김두식의 책은 이런 내게 명료한 자료로 정확한 족보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내가 법률가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데에 문외한이었다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이름으로 인해 몇 장을 읽지 못하고 책장을 닫고 말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 나의 선배의 이야기, 곧 나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였기에 첫 장을 읽는 순간 마지막장까지 읽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해방 후 법조를 구성한 4개의 법률가 그룹

김두식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 주된 주제는 해방 이후 우리 법조(법원, 검찰 및 변호사)를 형성한 법률가들의 뿌리와 그것에서 비롯한 법률가들의 행태다. 어느 날 벼락같이 찾아온 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식민지 법조는 순식간에 와해되고, 새로운 구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이고 법률가들이 없어서는 질서가 유지되지 않기에, 해방정국에서 새 법조의 틀을 만드는 것은 어떤 과제보다 시급한 일이었다. 과연 이 순간에 어떤 법률가들이 대한민국의 법질서를 담당하는 새로운 주체로 떠올랐을까.

 

<법률가들>의 핵심 장은 (나로서는) 역시 초반 새 개의 장(1-3)이다. 이곳에서 김두식은 해방 후 우리 법조를 장악한 4개 그룹을 정리한다. 해방 후 3년간 남쪽을 통치한 미군의 생각은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식민지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질서를 유지하면서, 자신들 구미에 맞는 정권을 탄생시키는 것만이 그들에겐 관심사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해방 정국의 법조는 식민지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은, 그 나물에 그 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법조인 개개인의 미래는 달랐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법률가로서 출발했는지에 따라, 즉 출신이 무엇이었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민복기(1913-2007), 1937년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 박정희 시절 법무부장관, 대법원장 역임


1법률가군-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

김두식이 주목한 첫 번째 그룹(1법률가군)은 제목대로 해방 이후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다. 식민지 시절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를 합격하고, 사법관 시보를 거쳐, 판검사를 경험한 최고 엘리트 법조인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경성 제국대학이나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 혹은 명문 사립대학 본과를 졸업하고, 일본인들과 경쟁하여, 바늘구멍 같은 합격의 문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합격상황을 보면, 1925년 해방 후 3대 대법원장이 된 조진만이 첫 테이프를 끊은 후, 1930년대부터 조선인들이 본격적으로 도전해, 한 해 5-6명의 합격생을 내다가 30년 대 후반부터 수가 증가해, 40년대에 들어서면 합격자 수가 기십 명을 넘는다.

 

김두식이 주목한 기수는 1937. 그 해엔 이례적으로 17명의 조선인이 합격했다. 합격 후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특히 해방 이후 그들의 행로는 어땠을까? 이들은 처음부터 식민지 정부의 판검사가 되는 게 인생목표였던 사람들이다. 조선의 독립이란 것은 꿈에도 꾸어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조선은 이제 영구적으로 일본의 일부가 되었으니, 그 체제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공직에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1937년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이 보여주는 해방 이전의 삶은 큰 차이가 없다. 부모의 직업은 면장, 변호사, 부농, 손꼽히는 친일파 등으로서 대부분 여유 있는 집안 출신들이다. 일본에 가서 고학하며 고생한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도 역시 돌볼 가족이 없어야 가능한 선택이었다. 학벌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당대 최고였다. 어느 학교 출신이냐가 진학 여부, 시험 응시 가능성, 취업, 월급까지 좌우하던 시절이었다. 학교서열은 막연한 심리적 차별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차등을 가져왔다.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자들은 그 정점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다.”(102-103)

 

1937년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자 중에서 우리의 귀에 제일 익은 법률가는 아무래도 민복기다. 박정희 정권에서 법무부장관과 대법원장을 지낸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인물은 일제시대 최고의 부호 민병석 남작의 아들이다. 민병석은 대한제국 궁내부대신을 지내고 경술국치의 국적으로 손꼽히는 친일파다. 나라가 망한 후 여러 회사의 대표를 역임하며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윤치호는 민병석을 가르켜 이 비열한 매국노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63)

 

고등고시 사법과 출신의 해방 이후의 삶은 다양하게 갈렸다. 대부분은 최고의 대우를 받는 법조인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김두식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거칠게 평가하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돌이킨 사람들은 예상한 것 이상의 불행을 맛보았고, 끝까지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한 사람들은 기대한 것 이상의 영광을 누렸다.”(38)

 

참으로 우울한 역사다. 이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Top of Tops를 찾기가 그리도 어려운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이 남쪽 한반도에서 실재했던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었다.


 

김홍섭(1915-1965),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해방 후 검사로서 조선정판사 사건 수사, 법관으로 전직 후 서울고등법원장 역임, 사형수의 아버지, 김병로와 최대교와 함께 법조3성이라 불림


이병린(1911-1986),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1960년대 서울변호사회 회장 및 대한변협 회장 역임, 인권변호사로서 박정희 정권 하에서 유신헌법을 반대하다가 두 번이나 구속됨, 2000년대 초 서울변호사회는 대한민국 법조사에서 가장 존경할만한 변호사로 이병린 변호사를 뽑아 흉상을 만들어 변호사회관에 설치



2법률가군-이류가 일류가 된 사람들-

김두식이 주목한 두 번째 그룹(2법률가군), 식민지 시절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 개업을 했던 인물들이다. 일제시대엔 고등시험 사법과 출신에 밀려 이류에 불과했지만 해방 이후 일류에 편입 된 사람들이다. 조선변호사시험은 1922년부터 해방이 되는 해까지 조선 총독부 주관으로 실시된 변호사 자격시험으로, 합격 후 16개월의 변호사 시보를 한 뒤, 변호사 개업을 할 수 있었다.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는 동경에 가서 치러야 하는 시험이라, 기본적으로 집안에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도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변호사시험은 조선에서 공부깨나 하는 사람들, 개중에는 독학자들이라도 오로지 공부에 몰입하면, 합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 시험으로 조선 땅엔 매년 10여 명 안팎의 변호사가 탄생했다. 이들은 식민지 시절 고등고시 사법과 출신에 비하면 친일 경력에선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이 출신 변호사들 중 상당수는 엄혹한 시절에도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일을 했으니 해방정국에선 좀 더 떳떳하게 할 일을 찾을 수 있었다. 사도법관으로 많은 이로부터 존경을 받는 김홍섭이나 후일 60-70년대 인권변호사 원조 격인 이병린 변호사가 바로 이 그룹에 속하는 법조인이다.


 

오제도(1917-2001), 일제시대 법원 서기 역임, 1946년 판검사특별임용시험 합격, 해방 직후 검사로 임명되어 각종 사상범 사건의 수사검사로 이름을 알림



3법률가군-벼락같은 행운이 쏟아진 사람들-

김두식이 주목한 세 번째 그룹(3법률가군)은 식민지 시절 법원서기(당시는 검찰이 법원 소속이었으므로 현재의 검찰서기 포함)를 했던 인물들로 해방 이후 특별한 자격시험(필기시험) 없이 판검사로 임용된 사람들이다. 해방 직후 법원 서기로 7년 이상 근무했던 사람들이 판검사로 대거 임용되는 벼락같은 행운을 잡았다. 서기 경력이 모자란 사람들(경력 5년 이상)도 행운을 잡았는데 그 사람들은 판검사특별임용시험(19469)에 응시하여 단 하루 만에 모든 절차를 끝내고 판검사에 임용되었다.

 

이 그룹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가 사상검사 오제도다. 반공이 국시인 시절 꼬마들도 알았던 위대한 인물이다. 수많은 좌익들이 이 사람의 펜대에 휘둘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한마디로 좌익의 저승사자였다. 김두식은 이 오제도를 매우 콤플렉스가 강했던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가 그토록 열광적으로 빨갱이를 잡아넣은 원동력은 바로 이 콤플렉스였다. 무슨 콤플렉스였을까? 자격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감이었다.

 

법조사회란 어려운 정규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 긍지의 원천이다. 그런데 오제도는 과거 일제시기 법원서기 경력으로 얼렁뚱땅 검사가 된 사람이다. 서기출신들은 해방 이후 해가 가면 갈수록 정규출신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정규출신은 가만히 있어도 연차에 따라 승진이 보장되는 데 미자격자 출신들은 그렇지 못했다. 무언가 권력층에 보여주어야만 발탁이란 과정을 통해 출세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강박관념,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오제도는 남들 바라는 검사장이나 검찰의 정점에 진입하지 못하고 옷을 벗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미자격자의 한계이었다.


 

유태흥(1919-2005), 1945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이법회)하고 1948년 조선변호사시험 2회 최종합격, 전두환 정권에서 대법원장, 2005년 우울증으로 자살



홍남순(1912-2006), 유태흥과 같은 경로로 1948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광주의 대표적 인권변호사,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내란죄로 무기징역, 민주정권 수립 이후 무궁화장 훈장 서훈



4법률가군과 이법회의 존재

김두식이 주목한 네 번째 그룹은 해방 이후 실시된 3차례의 조선변호사 시험 합격자들이다. 47년부터 49년까지 매년 실시되었고 이것은 50년부터 고등고시 사법과로 대체되었다. 다만 이들 합격자 중엔 위에서 필기시험을 합격하지 않고, 바로 구술시험만으로 합격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법회의 존재다.

 

김두식이 이 책에서 특별히 한 장을 할애해 밝힌 이법회(以法會)는 해방의 난맥상이 만들어낸 우픈 역사의 산물이다. 1945814일부터 4일 동안 조선변호사시험이 실시될 예정이었다. 첫날 시험은 무사히 치러졌다. 그런데 15일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시험장에 시험 감독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일본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하는 상황에서 총독부의 관원들에게 이 시험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이 시험에 응시한 조선 젊은이들에겐 해방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변호사 시험 합격이었다. 이 시험에 응시한 수험생 중 1백 여 명은 그룹을 만들어 대표자를 뽑아 시험위원회에 항의를 하고 합격증을 요구했다. 자신들은 잘못이 없으니 합격처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위원회에선 이런 요구에 굴복하고 이들에게 합격증을 교부했다. 그런 뒤 이들은 그 합격증을 가지고 판검사에 임용된다. 일부는 해방 직후 판검사로 임용되고, 상당수는 46년 사법양성소입소시험, 47년과 48년 조선변호사 시험에서 필기시험 면제를 받고, 구술시험만으로 판검사에 임용된다.

 

이 책을 읽는 일반 독자들은 이법회라는 그룹에 속한 법률가들을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 역사의 격변기에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그들에겐 과연 나라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험에 합격하는 게 그리도 좋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김두식은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제시대부터 해방을 거쳐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격변기에도 시험합격을 통해 법률가가 되려는 개인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목표로 하는 시험의 이름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법회원들의 수험생이 이를 잘 보여준다. 수험생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해방 전후의 시대구분과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고시에 합격한 그날이었다. 고시합격의 기쁨은 해방의 감격보다도 컸다.... ‘출세의 개인성은 고시와 연결된 한국 법조계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608)

 

매우 혹독하지만 정확한 묘사다. 우리들의 많은 식민지 시대 법률가들이 그런 인생을 살았다. 그들에겐 바늘구멍 같은 시험에 합격해, 식민모국의 지배자처럼 살아보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 그들에겐 해방이 중요하지 않았다. 고시에 합격만 할 수 있다면 해방은 영영 오지 않아도 좋았다. 그렇지만 항상 예외는 있는 법, 비록 출발은 부끄러웠지만 그 이후의 삶은 모든 사람이 같진 않았다.

 

유태흥과 홍남순의 다른 삶

김두식은 이법회 출신 중에서 2명에 특히 주목한다. 한 사람은 전두환 정권에서 대법원장을 지낸 유태흥, 또 한 사람은 광주의 인권변호사 홍남순. 이 둘은 해방 정국의 혼란한 틈바구니에서 벼락같은 행운으로 법조인이 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생행로는 판이하게 달랐다. 한 사람(유태흥)은 권력의 주구가 되어 한 시대를 살다가, 결국 한강 다리에서 투신하는 것으로 삶은 마감했고, 또 한 사람은 법률가 생활 내내 정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으며 살았지만, 결국 90이 넘도록 장수하면서 인권변호사란 이름을 얻고 명예롭게 생을 마감했다.

 

유태흥이 1980년 대 초 동아일보와 인터뷰한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열패감이란 말이 나온다. 유태흥이 만든 말로, 지금 용어론 콤플렉스 정도의 의미일 것 같다. 그는 평생 이 열패감 속에서 살았다. 늦게 판사가 되었지만 승승장구해 대법원장이 된 사람이 무슨 콤플렉스가 있었다는 말인가. 이법회의 일원으로 떳떳하지 못하게 법조자격을 딴 것이 그에겐 항상 고민거리였다


그는 법조 초년 시절 다른 기라성 같은 정규출신(고등시험 사법과나 조선변호사 시험 합격자들)에 비해 차별을 당했다. 한국 전쟁 이후, 나이 30 중반이 넘어 군법무관에서 판사로 전직한 이력이 그것을 말해준다. 아마 그는 평생 선후배 동료들이 자신의 출신이 정규출신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숙덕거리지 않는가 하는 걱정으로, 날을 샜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출신은 법조선배들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김선(1920-2004), 해남 출신으로 어린 시절 도일, 간사이 대학을 중퇴하고 한국에 돌아와 1945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하고(이법회), 1947년 제1회 조선변호사시험 최종 합격, 검사로서 올곧게 살다가 박정희와 불편한 관계 속에서 퇴임, 1995년 대한변협 회장에 당선



꼿꼿한 선비, 김선 변호사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내가 알던 한 분의 과거를 정확히 알게 된 것이 소득이다. 대한변협회장(1996-1998)을 지낸 김선 변호사. 내가 직접 변협회장으로 모신 분이다. 그는 199677세의 나이에 변협회장에 도전해 당선되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선 후엔 변협기획실장이란 직책을 받았는데 이런 직책은 변협 역사상 처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분은 검사출신의 꼬장꼬장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법무부차관 시절 박정희에게 밉보인 죄로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시대 소학교부터 대학(간사이 법률전문학교, 현재 간사이대학)까지 일본에서 나온 이유로, 국내엔 학연이 전혀 없었다


내가 그분을 도와 준 계기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분을 속속히 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내가 그분의 법조출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조선변호사시험 1회 합격이라는 것뿐이었다. 이번에 그분 또한 이법회 출신이란 것을 알았다. 1947년 제1회 조선변호사시험에서 필기시험을 면제받고 시험에 최종 합격했던 것이다. 나로서는 자못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허헌(1885-1951),1907년 대한제국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변호사가 됨, 일제시대 김병로, 이인과 함께 독립운동 변호의 3인방 중 하나. 좌파로서 해방 이후 여운형, 박헌영과 함께 건준에 참여, 1948년 월북,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 대학 총장 역임



좌익 법률가들의 몰락

김두식이 이 책을 통해 분명히 밝힌 것은 해방 이후 좌파 법조인들의 몰락이다. 해방정국에서 상당수의 좌파 법조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일제시대부터 독립을 위해 싸웠고, 일부 친일의 흔적이 있더라도 해방 정국에선 상대적으로 도덕적 우위에 서있던 법률가들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변호사 허헌, 고등시험 사법과 출신의 조평제(조순 교수의 숙부, 해방 직후 좌익인 법맹의 대표를 지내다가 법조프락치 사건으로 구속, 후일 좌익에서 우익으로 전향, 서울제일변호사회 회장 역임), 김영재(서울지방검찰청 차장검사로 1949년 법조프락치 사건으로 구속, 후일 전쟁 중 월북), 이홍규(이회창 전 국무총리의 아버지로 해방 직후 검사로 임명, 좌익으로 구속까지 되었으나 운 좋게 살아남아 변호사로서 천수를 누림, 200298세로 사망), 염세열(광주 출신으로 고등시험 사법과 합격, 함흥지법 판사 역임, 해방 후 남로당이나 법맹에 가입 추정, 한국 전쟁 중 보도연맹원 학살 시 광주에서 살해 당함).... 등등.

 

이런 법률가들은 해방 정국에서 하나 둘 몰락의 길을 걷다가 죽거나 월북을 선택했다. 우익 진영의 표적이 되어 징계를 당하거나 구속되어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속화시킨 것은 몇 건의 대형 사건이었다. 공산당을 소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의심되는 조선정판사 사건에서, 이들은 피고인을 변호했으나, 그 결과는 혹독했다. 법조인의 명을 끊어버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 후 법조프락치 사건으로 연결되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져, 사회주의 세력으로서의 법조인은 남쪽에서 씨가 말렸다.

 

거기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이제 과거의 좌익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악랄한 반공 검사나 반공 판사 혹은 반공에 앞장서는 변호사가 되어 관제 빨갱이를 만드는 주역이 된다. 김두식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감할 수 있는 평가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비극적으로 사라진 결과 우리 법조계는 중도세력을 상실했다. 그나마 목숨을 부지한 자유주의자들은 애초의 이념적 위치보다 훨씬 오른쪽으로 이동해 나중에는 박정희와 손을 잡았다."(611)

 

이 책의 역사적 의미...헌사 그리고 과제

이 책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자못 크다. 그동안 우리 법조역사에서 잊혀진 존재가 있었다.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소위 좌파 법조인들이다. 김두식은 해방 정국에서 대한민국 법조의 한 축을 형성했던, 그들 좌파 법률가들의 실체를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대한민국 법조사를 완성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역사가 그랬듯이, 해방 이후 좌파는 남쪽에서 실패했고, 역사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법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그들마저 복원될 때, 온전한 역사가 된다. 민주화 이후 해방 공간에서 사라진 좌파의 복원을 여러 영역에서 시도했지만, 상대적으로 법조계에서의 노력은 부족했다. 이번에 김두식이 그것을 해냈다.


책에선 언급한 바가 없지만 이 책이 갖는 더 큰 의미는 오늘을 사는 우리 법조인들에게 주는 무언의 메시지다. 오늘의 기성 법조인들은 해방공간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법조의 주역이 된 법률가들의 후예다. 나를 포함한 오늘의 법률가들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일제시대 바늘구멍 같은 시험을 통과해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거나 운 좋게 법조인이 되어 좌익을 청산한다는 명분으로 새 세상에서 광분한 법률가들로부터 법률이론과 실무를 배웠다.


그러니 우리들의 법조 DNA에 이들 선배들의 흔적이 상당부분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하다. 법률가들의 이기주의와 특권의식 그리고 몰역사인식적 태도... 등등.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물려준 반갑지 않은 유산이다. 우리가 이런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법조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난 70년 이상 만들어진 법조의 정체성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법조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 한계를 직시하면서 그것을 뛰어넘도록 자성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김두식이 이 책을 통해 우리 법조인들에게 간곡히 전하고 싶은 말이라고 믿는다. 


김두식은 이 책을 쓰기 위해 3년간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부실하고 충돌하는 과거 자료로부터 신빙성 있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해방 이후 60년대에 이르기까지, 판검사와 변호사 약 3천 여 명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독자적으로 구축했다. 그의 학구열과 끈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로 말미암아 20세기를 살아온 대한민국 법률가들의 뿌리가 상당부분 밝혀졌다. 작년 출판된 한인섭 교수의 <가인 김병로>, <법률가들>들보다 앞 선 시대를 주로 그렸으니, 이 두 책으로 대한민국 법조 100년 사의 전반 50년은 대체로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 이후가 문제다. 김두식이 분류한 4개의 법률가군의 탄생 이후, 대한민국엔 본격적으로 새로운 법률가군이 탄생하면서, 사법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한다. 바로 1950년부터 실시된 고등고시 사법과와 1963년부터 시작된 사법시험이다. 사법시험은 2017년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두 개의 시험 세대를 정리하는 것은, 전반기 50년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작업이다. 전반 50년이 대한민국 사법사의 태동기와 격동기였다면, 후반 50년은 본격 진입기이자 발전기로서, 법률가의 수는 전반기와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고, 활동도 다양해졌다. 나 또한 이 시기 주체 중의 한 사람이다. 과연 누가 이 방대한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머릿속을 채우는 부담감이다.

 

사족, 좀 더 완벽한 책을 위해

단순한 일반 독자를 넘어 저자와 같은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몇 부분 사소한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서울지방변호사의 역사에 대해

저자는 서울지방변호사의 역사와 관련, 1960년 정통 고시파가 서울제일변호사회를 창립하였고, 이 변호사회는 “1980년 서울통합변호사회로 결성할 때까지 20년 동안 서울지역의 변호사회는 둘로 나뉘어 존재했다고 기술한다.(257) 그러나 이것은 부정확하다. 이 기간 서울엔 서울변호사회와 제일변호사회 외에 서울 제2변호사회(서울변호사회 인천분회가 모체가 되어 1962년 서울 제2변호사회 창립)와 수도변호사회(서울변호사회에서 군법무관 출신이 갈라져 나가 1969년 창립)가 존재했다. 두 변호사회는 법정 회원 수 부족으로 1974년 해산되었고, 서울변호사회와 서울 제일 변호사회는 1980년 서울통합변호사회로 단일화되었고, 1983년 서울지방변호사회로 개칭되었다. 

 

1971년 사법파동 관련 판사들의 재임용 탈락에 대해

저자는 이법회 출신의 유태흥 대법원장을 이야기하면서, 1971년 사법파동을 이야기한다. 당시 사법파동을 일으킨 젊은 법관(김인중, 최영도, 금병훈, 목요상)들이 1973년 재임용에서 탈락했다는 것이다.(583) 크게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고증할 필요가 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고 최영도 변호사(20186월 작고)님에 의하면, 자신은 재임용 탈락 전 법원장이 (재임용 탈락을 사전 고지하며) 사직 종용함에 따라 사표를 냈다고 했다.(다만 최변호사님 본인도 생전에 자주 재임용 탈락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맞다면 팩트 자체는, 1971년 사법파동 주동자들이 1973년 법원을 나온 것은, 형식적으론 재임용 탈락이 아니고 재임용 탈락을 통보 받은 상태에서, 사표를 쓰고 나온 것(의원면직)이 아닌가 생각한다.

 

서울지방검찰청장? 광주지방검찰청장?

저자는 책 이곳저곳에서 법조계(법률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관직명을 사용한다. 예컨대, 서울지방검찰청장, 광주지방검찰청장과 같은 직명이다. 검찰에선 이런 직명을 사용하지 않고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광주지방검찰청 검사장이란 직명을 사용한다(나는 이런 직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함). 검사 출신인 저자가 이것을 모를 리 없는데, 특별히 이런 직명을 사용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해방 정국에서 그런 용어를 사용했을 수는 있지만, 책의 흐름상 그 이후에도 그런 직명을 계속 쓰는 것으로 보아, 약간은 의도적이란 생각이 든다. 과연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