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법률

원님재판, 그것이 조선시대 재판의 실상이었을까?

박찬운 교수 2020. 10. 22. 05:48

 

 

 

며칠 동안 퇴근하면 만사 제치고 책을 읽었다. 숭실대 민사소송법 교수 임상혁이 쓴 <나는 선비로서이다>와 <나는 노비로소이다>. 법학자가 조선 중기 노비소송을 분석하면서 당시 법과 사회를 연구한 책이다.

아마 기존 사학자들이 이 책을 본다면 상당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사학자들도 역사를 연구하면서 매우 사회적 파장이 큰 소송의 존재를 알았다면 어떻게든 그 의미를 역사로서 기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준은 사실관계와 그 파장 정도를 알리는 것에 국한되지 않을까. 그 소송의 내용을 현대의 법학으로 재해석하고 의미를 파악한다면 그 사건의 이해는 한층 깊어질 것이지만 그것은 법학 전문가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현대법학으로 무장하고 역사를 추적해 사료를 발견해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역사적 기술의 적격자인데... 그 사람이 누구일까? 과문한 탓에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그런 인물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나는 선비로소이다

법학도이면서 역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해 온 임상혁 교수. 그가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판결문 하나를 멋지게 해석했다. 그는 그 사건의 내용과 전개과정을 오늘 날 소송방식으로 재구성하고, 관련 증거에 의해 사실관계를 확인했으며, 거기에 당시 사용된 법률(경국대전 등)을 적용했다.

이 과정을 통해 그 판결의 문제점을 당시의 시점에서 비판한 결과 그 판결은 희대의 오판임을 밝혀냈다. 오랜 기간 갈등해 온 두 집안 간 싸움에 정치가 사법이라는 이름으로 개입해 씻기 어려운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임교수는 그것을 매우 실감나게 밝혀냈다.

조선 중기 문장가 구봉 송익필, 한 때 이이와 성혼의 절친이었고, 높은 학식으로 말미암아, 관직에 나아가진 않았지만 많은 양반 사대부의 존경을 받은 이다. 그의 아버지는 어엿한 당상관을 지냈고 형제들도 모두 총명했다. 그런 집안의 명망가가 한 소송으로 인해 그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가 노비로 전락했다. 그것도 100년이 넘는 일을 들추어 내 소송을 제기한 사건에서 패소함으로써 말이다.


익필의 아버지 송사린은 중조 조 일어난 기묘사화 직후 자신과 친척 집안으로 교류가 잦은 안당의 집안에서 진행되는 역모를 발견하고 관에 고변한다. 이로 말미암아 안씨 집안은 가히 멸문지화에 이른다. 그런 일이 있고 60년이 넘은 뒤인 1586년 살아남은 안당의 손자 안로의 아내가 송씨 집안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송씨 집안은 자신 집안의 노비의 자손이니 지금도 자신 집안의 노비라고. 지금 생각하면 일응 말이 안 되는 소송이다. 현대의 법률가 입장에선, 조선시대의 소송제도에 대해 잘 몰라도, 한 나라의 소송(근대 이후의 소송)이라면 시대불문 일정한 보편적 원칙이 있다고 믿고 있으니, 그것에 기초해 몇 가지 의문을 품게 마련이다.


이런 소송을 하려면 피고인 송씨 집안이 진짜 노비인지 여부인지를 따지기 전(본안소송)에 소송을 할 수 있는 최소요건(소송요건)을 갖춰야 할 텐 데, 이런 요건은 갖춘 것일까? 당시 송씨 집안은 거의 100여 년 간 양인으로 살아가면서 몇 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한 집안이므로 이런 집안을 상대로 소송하는 자체가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소송이 아닐까? 즉 소제기에 지금 우리 법 곳곳에 있는 제척기간(혹은 소멸시효)과 같은 제도가 있지나 않았을까?(손해배상 소송을 생각하라, 우리 현행법은 불법행위가 일어난 것을 안 날로부터 3년 혹은 불법행위 일어난 지 10년이 지나면 시효에 걸려 소송을 하지 못한다.)


이런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100여 년 전의 일을 어떻게 입증해야 할까? 현재의 법적 지식으로 말하면 오랜 기간 양인으로 살아온 피고를 노비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을 주장하는 원고에게 입증책임이 있을 텐데 이 사건에선 어떻게 되었을까? 원고는 피고가 양인으로 행세하지만 과거 자신 집안의 노비였고 속량된 바가 없다는 것을 주장할 터이니 그것을 입증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소송원칙은 조선시대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 소송에선 그런 소송원칙이 어떻게 지켜졌다는 것일까?


임 교수가 당시 판결문과 이 소송에 적용된 관련 법률을 검토한 바 이 재판은 오류투성이다. 당시 경국대전과 후속 법률이 규정한 소송의 시효(과한법, 5년, 30년, 60년)을 모두 위반했고, 입증과정에서도 장예원(노비소송을 담당한 관)의 송관(재판장)은 입증원칙의 기본을 무시하면서 소송을 진행했다. 심지어 피고 집안의 제일 윗대 노비라는 감정(안씨 집안의 안돈후의 비첩의 딸)이 속량되었다는 공문서가 발견되었음에도 재판장은 이를 석연치 않은 이유로 차버렸다.


이 소송은 미시적으로 보면 송씨 집안의 밀고로 멸문지화에 이른 안씨 집안이 오랜 세월 보복의 칼날을 갈며 권토중래한 결과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당시 동서분당의 결과다. 이 재판을 맡은 판관은 당쟁 속에서 구봉 송익픽을 죽이기 위해 한 편(동인)에 줄을 대고 눈을 감은채 재판을 진행했고 그 결과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한 것이다.

 

 

 

나는 노비로소이다

잘 알지 못한 조선시대 소송, 그것의 현대적 해석, 그리고 이에 따른 조선의 당쟁에 대한 새로운 분석....모두가 내겐 충격적이고 이것을 맛깔스러운 말로 성공시킨 임상혁 교수의 높은 연구력에 박수를 보낸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일차자료(번역본)를 어떻게 찾아냈고 그것의 한글 번역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한 것인지, 일반 사학자들이 이 사건에서 그동안 취한 입장과 자신의 그것이 어떤 면에서 다른지를 후기 등에서 설명했더라면, 좀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저자 혼자의 성과라면 조선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은 더 이상 공부할 의욕을 잃을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런 아쉬움은 이 책을 읽고 연이어 읽고 있는 <나는 노비로소이다>를 보면 어느 정도 해소가 될 것이다. <나는 노비로소이다>는 임교수가 이미 10여 년 전에 임란 전에 발견된 5개의 판결문에 기초해 조선시대의 법과 사회를 분석한 책이다(최근 재수정본이 발간됨).

이것 또한 읽어보니 누구 말대로 ‘교양서를 빙자한 지독한 전문서’이다. 이 책을 보면서 임교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연구를 했는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나는 노비로소이다>가 다섯 개 판결문을 각각 설명하면서 조선시대 소송제도를 독자에게 전반적으로 설명하는 게 목적이라면, <나는 선비로서이다>는 한 판결을 법학자의 눈으로 심층적으로 관찰하면서 당시의 법과 사회를 재해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총론이고 또 하나는 각론인 셈이다. 이 두 권을 모두 읽는다면 조선의 소송을 두고 ‘원님재판’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시절에도 나름대로 동양사회가 가지고 있는 소송관 속에서 꽤 정치한 법이론과 법제도 하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선을 500년이 넘게 유지시킨 원 동력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