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기타

'라스트 세션' 우리 생애 최고의 지적 연극

박찬운 교수 2022. 2. 2. 05:49


오랜만에 대학로에 가 연극 한 편을 보았다. 라스트 세션. 미국 극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아맨드 M. 니콜라이의 저서 ‘루이스 vs 프로이트’에서 영감을 얻어 쓴 연극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영문학자 C.S. 루이스가 신의 존재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는 상상에 기초한 2인극.

두 지성이 영국이 참전을 선언하는 1939년 9월 3일 런던의 프로이트 서재에서 만난다. 83세의 프로이트, 이제 갓 40의 루이스 40년 이상의 나이 차가 나지만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가 벌어진다.

2년 전 초연에는 신구, 남명렬이 프로이트 역을 이석준, 이상윤이 루이스 역을 맡았지만, 이번에는 신구, 오영수가 프로이트 역을, 전박찬, 이상윤이 루이스 역을 맡았다. 나는 최근 ‘오징어 게임‘으로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된 오영수에 꽂혀 그와 전박찬(원래 이상윤이 나오기로 되어 있었으나 코로나 사태로 당분간 전박찬이 루이스 역을 모두 하고 있음)의 무대를 예약했다.

오로지 두 사람이 서재에서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니 지루할 것이라 생각되지만 연극이 시작되자 마자 그런 걱정은 기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지적 거인의 대사를 쫓아가면 졸 틈이 없다. 우리 생애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지적 연극이라고 찬사를 보내면 연극 제대로 못 본 사람 티내는 말이라 할까?

그러나 생각해 보라. 20세기는 정신혁명은 비엔나의 프로이트에서 시작했다고 과언이 아니다. 그가 남긴 인간정신의 과학적 해명은 옳든 그르든 모든 정신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루이스는 젊은 시절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적 영적 세계를 구축하다가 마치 예수를 쫓는 이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여 예수를 받아들이고 기독교의 역사를 바울이 된 것처럼 20세기를 대표하는 유신론자가 된 학자다. 그런 둘이 어느 날 만나 한치의 양보도 없이 논쟁을 벌인다? 상상만 해도 흥미 있는 주제가 아닌가.

배우 오영수의 올해 나이 78세. 신구는 무려 86세.
그런 노배우들이 90분 동안 무대 위에서 실수 없이 연기를 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 정도 시간이면 대사량이 얼마나 될까. 몰라도 A4지 10 장 이상의 분량이 될 것이다. 그 나이에 그런 부담 있는 연기를 한다는 것은 평생을 연극배우로 살아온 관록이 있기에 가능할 것이지만, 실제로 보면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연기도 넘사벽이란 경지가 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경지.... 경외스런 배우들이다. 코로나 시기 모든 연극이 전멸을 했는데도 350석 객석 전부를 가득 채웠다는 것도 기적적인 일이다. 물론 오영수가 작년 골든 글로브 조연상을 받은 것도 흥행 성공의 큰 이유가 될 것이다.

2017년 1월 런던 프로이트 뮤지엄에서 내가 찍은 사진. 프로이트의 생전 서재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2017년 1월 말 나는 6개월간의 런던대학 연구 학기를 끝내고 서울로 오기 직전 아내와 함께 런던 프로이트 뮤지엄을 가본 적이 있다. 과거 프로이트가 나치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을 한 뒤 살았던 그 집을 뮤지엄으로 만든 곳이었다. 오늘 연극은 바로 이 집의 프로이트 서재를 무대로 만들었다.

당시 나는 프로이트의 서재를 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서재 곳곳을 채운 그리스, 로마, 이집트 골동품들이 프로이트의 진 면목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는 죽은 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 그가 앉은 가죽 의자는 비록 낡았지만 프로이트의 흔적을 내게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 그 자리에 배우 오영수가 앉아 프로이트의 사상을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편견인지 모르지만 루이스의 유신론은 프로이트의 논리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연극으로만 본다면 오늘 승자는 단연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는 평소 그리스 로마 이집트 골동품을 모았다. 주로 소품인데 그의 서재 곳곳을 이런 골동품이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이해를 이제 반박하는 시대에 살지만 아직도 분명한 것은 프로이트는 2천 년 서구역사에서 신을 정신과학으로 이해한 지성의 거인이었다. 20세기 정신세계가 그의 머릿속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오늘 새삼스러웠다. 좋은 연극, 좋은 배우를 만난 하루였다. (2022.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