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판장의 역사
-30년 경험에서 얻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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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주 오래 전 일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28년 전 이맘때이다. 그 때 나는 몇 몇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소위 연판장이라는 것을 돌렸다. 그 일은 우연한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고용 변호사의 길에 들어서 하루하루 허겁지겁 살고 있는 어느 날, 연수원 동기생인 윤모 변호사의 소개로 한참 선배인 조영황 변호사(국민권익위원장과 국가인권위원장 역임)와 저녁 자리를 같이 했다. 거기서 나온 말. “박 변호사, 변협회장 박승서 변호사가 강민창을 변호한 것 알아?” 금새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라고요. 변협회장이 박종철군 사건 은폐주모자인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변호했다고요?” 이 대화가 다음 날부터 재야 법조를 뒤 흔드는 사건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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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변호사님을 필두로 나와 몇 몇 젊은 변호사들이 앞장 서 박승서 변협회장의 퇴진 운동을 주도한 것이다. 내가 직접 퇴진 성명문을 썼고, 일일이 전화를 돌려 변호사들을 규합했다. 모두 108명(당시 서울 변호사 총수가 천 명 남짓이었음)이 동참했다. 우리들 성명 참여자들의 생각은 단순했다. 인권단체로서의 변협의 위상에 비추어 그 수장이란 사람이 전두환 정권 하에서 최대의 인권유린사건이라 불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주모자를 변호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었다.(다른 변호사라면 달리 말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라도 변호 받지 못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바로 그런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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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명운동의 여파는 컸다. 이 연판장 사건으로 박승서 변호사가 변협 회장에서 물러나진 않았지만 그 몇 달 후 치러진 변협회장 선거에서 파란을 낳는 사건으로 발전한 것이다. 당시 변호사계에선 거의 무명에 가까운 김홍수 변호사가 변협회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서명 운동이후 차기 회장은 대가 센 선배 변호사가 변협을 맡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재야 법조를 지배했는데, 젊은 변호사들은 김변호사님을 그런 분으로 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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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8년 9월 나는 전국의 법학교수에게 전대미문의 사법농단 사태에 대해 법학교수들이 강력한 의사를 표명하자는 성명문을 썼다. 그리고 이 성명 작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동료교수와 함께 전국 법학교수에게 메일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동참자는 136명. 수신자 수를 고려하면 10%도 되지 않는 수치지만 무려 60개 대학에서 근무하는 교수들로부터의 답신이니 체면치레는 한 것이다. 나는 그 결과를 정리해 법조 출입 기자들에게 전했다. 다행스럽게도 한 시간이 안 되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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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속단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법학교수들은 이제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까진 이 말도 안 되는 사태에 대해 대부분 법학교수들이 속으로 부글부글 끓였을 뿐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제안자가 없었고 그 방법이 녹녹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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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젠 사정이 다르다. 우리는 언제든지 의사를 밝힐 수 있고 그 방법을 찾아냈다. 이번에 우리는 무려 1600개의 메일링 리스트를 확보했다! 나와 내 동업자는 몇 개의 교수 명부를 토대로 전국 법학교수 메일 주소록을 수작업으로 완성했다. 국정원이라면 몰라도 ㅎㅎ 개인으로선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못한 정보일 것이다. 이제 클릭 몇 번이면 전국적 성명서를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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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지난 30여 년 가까이 수 없이 많은 성명에 동참해 왔다. 이 세월 동안 연판장 서명은 그 규모와 방법에서 크게 바뀌었다. 하루 온 종일 전화를 돌리던 것에서, 이젠 메일을 보내거나 설문 전용 프로그램을 이용함으로써, 삽시간에 수백 수 천 명에게로 성명문을 뿌릴 수 있다. 문명의 이기만 잘 활용할 줄 알면 매우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의사를 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구든지 이 일은 간단한 기술만 습득하면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아무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30년 전이나 오늘이나 이런 연판장을 돌려 일정한 효과를 내기 위해선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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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제안자에 대한 신뢰다. 전화를 받든 메일을 받든 그 제안자가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성명을 내자고 하면 누가 그것에 동참하겠는가. 이번 성명에서 몇 몇 학교가 빠진 것은 나로선 뼈아픈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들 학교의 교수들 사이에선 내 존재감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변명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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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제안자의 헌신성이다. 연판장을 돌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그것을 결심해야 하고 일단 결행하면 뒷수습을 감당해야 한다. 그 일련의 시간은 심적으로 적지 않게 고통스럽다. 그것을 극복하고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위해선 끊임없이 자기최면을 거는 수밖에 없다. “이 일은 해야 하고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
(2018.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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