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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고전강독 5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 사는 삶

박찬운 교수 2016. 5. 1. 08:58

인권고전강독 5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 사는 삶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의 불복종>

 

 





나는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

 

몇 년 전 이명박 정부 시절 국방부에서 시중 서점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책들을 금서로 정한 다음 군인들에게 읽지 못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뜻 있는 군법무관들이 그런 것은 헌법상의 사상·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헌법재판소는 이를 기각했다. 결국 국방부의 그런 조치가 대한민국 땅에서 허용된다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에 동의하는가. 만일 동의한다면 더 이상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글은 독자 여러분을 위한 것이다.

 

나는 위 사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국민으로 살 것인가, 인간으로 살 것인가.’ 만일 당신이 어떤 책을 보고 싶은데 국가가 그 책을 불온도서로 규정했다 치자. 이 때 그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철저한 국민이다. 이런 사람은 국가가 읽지 말라는 책을 왜 읽느냐고 오히려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이런 사람도 있다. 내가 책을 읽는데 국가의 승인을 왜 받아야 하냐고. 도대체 국가가 무엇이건대 책 읽는 일까지 참견하느냐고. 이런 사람은 책을 읽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일이지 국가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사람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시민의 불복종>이 나오기까지

 

이와 같은 문제에 좋은 성찰을 제공하는 한 권의 책을 소개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시민의 불복종>(강승영 옮김)이다. 소로가 이 책을 쓴 시점은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을 하던 때(1846~1848)이다. 이 당시 미국은 텍사스의 병합문제로 멕시코와 전쟁을 했고 그 결과 단 1,500만 달러로 텍사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를 양도받았다. 소로는 이 전쟁을 악한 전쟁으로 보았고 강력히 비판했다.

 

한편으로, 소로는 노예제를 반대했다. 그는 이와 관련된 글, <자유의 호소(Herald of Freedom)>를 콩코드 학파의 기관지 격인 다이얼에 기고했을 뿐만 아니라 노예제를 반대하는 강연을 하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소로는 <월든>의 배경이 된 호숫가 통나무집에서 사는 동안 콩코드 시내에 나왔다가 친구인 세금징수원으로부터 세금 독촉을 받는다. 그러나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의 반대를 몸으로 실천하는 그는 세금 납부를 거부한다. 이러한 배경을 지닌 시민불복종이 처음 미학(Aesthetic Papers)에 게재되었을 때는 그 제목이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Resistance to Civil Government)이었으나 그 후에 <시민의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라고 고쳐졌다.

 

개인은 국가에서 어떤 존재인가

 

소로는 이 책을 통해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성찰한다. 그에게 있어 국가는 불가피한 존재라 할지라도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책은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바로 이 말은 소로의 국가와 정부에 대한 기본입장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는 정부가 그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할 때는 곧 피통치자들이 간섭을 가장 적게 받은 때라고 설명한다.

 

혹자는 이 말만 듣고서 요즘 유행하는 신자유주의와 연계시킬지도 모르겠다. 소로가 자유주의 경제철학을 이야기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오버다. 소로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자유를 누리는 데 국가의 불필요한 간섭을 거부한 것이지 불평등을 조장하는 자유주의 경제철학을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 소로에게 있어 국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개인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그는 웅변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13)

 

이 말은 국가의 법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일 국가의 법이 정의롭지 못하면 그것에 따를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국가의 도구도 수단도 될 수 없는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셰익스피어(존왕 32)의 다음과 같은 말을 소개한다.

 

누구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누구의 제2인자가 되기에는,

또 세계의 어느 왕국의 쓸 만한

하인이나 도구가 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고귀하게 태어났다.“ (16)

 

 

국가가 미쳐 돌아갈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로에게 있어 당시 미국은 미쳐가는 시기였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당시 다수는 멕시코 전쟁을 지지하고 노예제도를 지지했다. 미국은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으며, 사람들은 그 꿈이 실현된다고 믿고 있었다. 미국은 서부로 계속 뻗어나갔으며 드디어 태평양 연안국이 되었다


1849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골드러시를 이루며 서부로 달려가는 시대였으니, 참으로 미국은 국운이 날로 성장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소로에게 보이는 미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미국은 국민의 6분의 1이 노예이고 멕시코를 침략한 불의의 나라였다. 이러한 정부에 대해 소로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노예의 정부이기도 한 이 정치적 조직을 나의 정부로 단 한 순간이라도 인정할 수 없다.”(16)

 

그러니 소로에게 있어 이런 정부에 대해 대항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방치해서는 안 되며 정의롭지 못한 행위의 공범이 되지 않으려면 타협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그는 정부에 대해 반대를 표시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불가피한 방식은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강고하고 폭압적인 정부를 상대로 어떻게 그 정부를 부정할 수 있을까.

 

그는 정의롭지 못한 정부와의 관계 단절을 주장한다. 정부에 대한 충성의 거부와 저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비록 그 거절의 과정이 다수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비록 소수일지라도 행동하라고 요구한다. 그리하면 언젠가는 그가 목표하는 그 양심적 결과가 일어나리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확신어린 어투로 이야기한다.

 

나는 이것만은 알고 있다. , 이 매사추세츠 주 안에서 천 사람이, 아니 백 사람이, 아니 내가 이름을 댈 수 있는 열 사람이라도 노예 소유하기를 그만두고 실제로 노예제도의 방조자의 입장에서 물러나며 그 때문에 형무소에 갇힌다면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리라는 것을 말이다.”(31)

 

그러한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나를 감옥으로 보낸다면 어떻게 할까. 소로는 명예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한다.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역시 감옥이다.”(32)

 

노예의 나라에서 자유인이 명예롭게 기거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이 감옥인 것이다.”(33)

 

물론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감옥이라도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역사 이래로 소수이다. 사회적 소수가 다수를 상대로 싸울 때 사람들은 그들이 납득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혼란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로는 이에 대해 반대한다. 소로에게 있어 사회 혼란을 막을 책무는 국가나 정부에게 있지 소수에게 있는 게 아니다. 소수는 정부에 대해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코 다수의 힘에 무력해져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의로운 사람들을 모두 감옥에 잡아 가두든가, 아니면 전쟁과 노예제도를 포기하든가의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주 정부는 어떤 길을 택할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33)

 

소수가 전력을 다해 정부에 대해 그게 아니다라고 하면 정부도 결국 돌아선다는 믿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소수자 전부를 감옥에 보낼 그런 정부는 도저히 민주정부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정부는 더 큰 시민의 저항권에 직면하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이 바로 그게 아닌가. 프랑스 인권선언 제2조를 기억하자.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보존하는 데 있다. 그 권리는……압제에 대한 저항권이다.”

 

국가의 기능을 다시 생각한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나라의 방향은 복지국가라고 했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주장과 오늘 말하는 <시민의 불복종>에서의 인간으로서의 삶은 이율배반적 주장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복지국가는 국가의 기능이 강조되는 사회기이 때문이다. 복지국가는 작은 정부보다는 큰 정부를 지향하니 분명 소로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자유주의자들은 그것 때문에 복지국가를 싫어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런 예상되는 지적에 나는 이런 이야기를 말하고 싶다. 소로가 말하는 것은 쓸데없이 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를 강조하지 말자는 것이라고. 국가가 경제적 평등을 위해 복지정책을 추구하면서도 얼마든지 국민들에게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 어떻게? 국가가 개인적인 사적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된다. 국가가 개인의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 것은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국가가 시민 생활에 간섭하는 것을 자제하면 되는 것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국가가 개인의 영역을 최대한 보장해 주고 그러면서도 개인과 개인의 연대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복지정책을 추진하지 못할 리가 없다. 북구의 복지국가,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에, 핀란드 등을 보라. 복지수준도 세계 최고수준이고, 개인의 자유도 세계 최고수준이 아닌가. 우리라고 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게 불가능할까?

 

(2016.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