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민변

제1화 존재감 없는 사법연수원 시절, 그 쓸쓸했던 기억

박찬운 교수 2016. 2. 4. 20:46

나와 민변(1)


1화 존재감 없는 사법연수원 시절, 그 쓸쓸했던 기억

아침에 일어나 묵상을 하다가 이런 결심을 했다. 몇 회에 걸쳐 나와 민변이란 글을 써보자고. 법률가가 된지 꽤 오래 되었다. 아직 할 일은 적지 않게 남아 있지만 한번 정리를 해볼 때다. 몇 몇 동료들도 이미 그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기억이란 시간이 가면 잊혀 진다. 더 잊기 전에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나도 역사의 일부분이다. 내 역사는 내가 제일 잘 알 수밖에 없으니 그 기록은 내 몫이기도 하다.

나와 민변은 법률가로서의 내 삶에서 뗄 수 없는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집필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객관적 자료를 뒤적이며 쓸 생각은 없다. 주로 새벽녘 조용한 시간에 기억을 더듬는 방법으로 써나갈 것이다. 다만 내가 지난 30년 간 써온 일기와 사진 앨범들은 이 글을 쓸 때 매우 유용하게 참조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물론 객관적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다른 자료도 찾아 내 기억을 점검할 것이다.


내 글을 읽어 줄 페친들과의 공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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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4년 제2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학 4학년 때였다. 300명 동기생 중 재학생 때 합격한 이들은 나 외에도 40여 명 더 있었지만 이름하여 소년등과했던 셈이다. 당시 최 연장자는 나보다 20세 연상의 변00씨였다. 300명 중 서울대 출신이 200 여명이었는데 법대출신이 160-170여 명, 비법대 출신 30-40여 명이었다. 나머지 100 여 명 합격자는 그 대부분을 고대, 한양대, 연대, 성대 등 서울의 사립대가 차지했고 가물에 콩 나듯 기타 몇몇 대학에서 1-2명 씩 합격자를 낸 시절이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고향 충남 청양을 방문했을 때의 내 모습, 1984년 겨울

 

한양대 법대는 사법시험에서 1975년 처음으로 합격자를 배출한 이후 70년 대 말부터 합격생 수가 매년 10명을 초과하여 서울대를 제외한 대학으론 고대, 연대와 함께 빅3를 형성하고 있었다. 내가 합격한 해엔 16명이 합격해 경쟁대학인 연대를 능가하기도 했다. 특히 한양대 법대에서 내가 들어온 81학번과 한 해 선배인 80학번은 유난히도 시험에 많이 합격해 한양대 역사에서 전설의 학번이라 불린다. 80학번 졸업생 40여 명 중에서 30여 명이 합격했고, 81학번은 80여 명 졸업생 중 50 여 명이 시험에 합격했으니 합격률은 서울대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졸업하면서 전교 최우수 이사장상을 받았다. 당시 생존했던 대학 설립자인 김연준 선생이 상장을 수여하고 있다. 1985년 2월.

 

이런 이유로 내 의식 속엔 우리 대학을 이류대학으로 치부하는 일이 없다. 이명박 정부 시절 내 대학선배였던 정00 변호사(당시 민정수석)가 감사원장으로 지명되었다가 청문회도 가기 전에, 변호사 시절 과다 수임료 문제로 낙마했는데, 당시 정수석이 억울했든지, 기자들에게 자신은 검사 시절부터 마이너리티로 어렵게 살아 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신문에서 보고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설사 마이너리티로 살아 왔다고 해도 대검차장에,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사람이 언론에 자신을 마이너리티라고 읍소하는 게 말이 되는가. 이 말은 그에겐 이류대학을 나와서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과정을 거쳐 온지 아느냐고 항변하는 것이었지만 나로선 그의 정체성이 영 맘에 안 들었다.

아마도 내가 선배들과 조금 다른 멘탈을 가진 데에는 입시제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80년도까지는 선배들 중 상당수가 1차 대학인 서울대를 떨어지고 2차 대학인 우리 법대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선배들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에도 오래동안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선배들과는 달리 우리 대학을 1차로 선택했기 때문에 선배들처럼 2차대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거기에다 나는 모교에서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도 안았던 사람이기에 내가 세상에서 콤플렉스를 안고 산다면 그것은 모교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이 내 의식을 지배했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짐작하겠지만 내 자존심의 배경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 있게 이야기하건데 나는 우리 대학 출신 중에서 매우 다른 멘탈을 가진 사람이다. 아니 그렇게 되려고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다. 그게 나를 존재케 했고, 나를 싸우게 하는 동력이었다. 사람이란 자존심이 없으면 살기 어렵다. 정신으로 싸우는 곳에선 더욱 그렇다.

 

연수원 시절 설악산으로의 졸업여행 , 1986년 겨울. 동기생 중엔 대법관, 헌재재판관,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경찰청장이 배출되었다.

 

1985년 연수원에 들어와 나름 열심히 생활했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다. 내 성격상 나는 학연, 지연 등을 강조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지금이나 그 때나 출신지역 떠들고, 동문간의 유대를 최고의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나일뿐이다. 나는 그때도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고 싶었다. 연의 세계에서 떠나 훨훨 날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이런 생각이 대한민국에선 참으로 살기 어려운 멘탈이란 것을 여러 번 깨달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항상 운명이라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연수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 서울대 출신들은 몇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 같다. 가장 강력한 그룹은 70년대 말 80년 대 초 학생운동을 했던 동기생들이었다. 이들은 연수원 내에서도 틈나는 대로 대한민국 사회를 비판하면서 미래의 법조에선 선배 법조인들과는 뭔가 다른 역할을 해 우리 법조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거의 교류를 못했다. 일부 서울대 출신 중에서 친하게 지낸 동기생들이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도 학창 시절 학생운동 등엔 거의 관심이 없던 샌님들이었다.

나는 연수원에서 결코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기생들이 나라는 사람을 조금 특별하다고 생각게 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당시 연수원은 50여 명 단위로 반을 만들어 분반 수업을 했는데, 몇 과목은 전체 300명이 강당에 모여 수업을 받았다. 법조윤리가 대표적인 과목인데, 이 과목은 연수원에 도입된 지 몇 년이 안 된 신생과목이었다. 이 과목이 활성화되는 데에는 가재환 판사라는 분의 역할이 컸다.

가판사는 서울대 출신으로 미국 하버드 로스쿨에 장기연수를 다녀온, 매우 출중한 분이었는데, 미국 유학시절 법조윤리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귀국 후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식 법조윤리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했고, 마침내 사법연수원에 이 과목을 신설케 했으며, 직접 강의까지 맡았다. 1985년 내가 연수원에 입소했을 때 가판사는 고등부장판사로 대법원장 비서실장을 맡고 있었음에도 이 과목 강의를 나오고 있었다.

그런 중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 하에서의 대법원(유태흥 대법원장)은 사법권의 독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는 비판의 한 복판에 있었다. 한 판사가 법률신문에 잘못된 법관인사와 관련해 비판적인 칼럼을 하나 썼는데 그게 문제가 되어 서울로 인사발령이 난 지 며칠 만에 울산으로 좌천인사를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직후 법조윤리 시간에 나는 손을 들었다. 연수생 300명이 일제히 나를 보고 있었다.

부장님, 며칠 전 ... 이런 인사가 났다는 소리를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대법원이 이렇게 인사를 하면 어떻게 법관의 독립이 가능하겠습니까? 대법원장 비서실장으로서 이 사정을 잘 아실 테니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당돌한 질문이었다. 요즘 이런 배짱있는 인물을 보고 싶다! 그 날 가판사는 내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하고 당황했고 300명 연수생들은 고소하다는 듯이 그것을 지켜 보았다.

아마 가판사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 저런 놈이 다 있어. 그것을 나보고 답하라는 것이야. 저 친구 운동권 아냐?” 사실 나는 가판사, 그를 존경하는 법조 선배로 모신다. 뒤에 그에 대해 또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그는 10여년 후 사법연수원장을 역임한다. 그 때 나는 연수원을 찾아가 당돌한 제안을 한 바 있다. 그는 과거의 그 일을 다 잊은 듯 온화한 눈빛으로 나를 대하며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 주었다.

여하튼 이 일로 인해 동기들은 나를 조금 다른 친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저 친구는 동기도, 동문도 다 필요 없는 사람? 제 마음대로 사는 인간? 뭐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평가가 내가 한참 변호사 생활을 할 때는 좋기도 했다. 나는 사건을 맡을 때 상대방 변호사, 담당법관이나 검사가 누구냐에 따라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변호사라면 인간관계 때문에 도저히 사건을 맡을 수 없다는 것도 나는 맡았다. 오히려 동기생 중엔 그런 문제 때문에 자신은 맡기 곤란하다며 은밀히 내게 전화해 대신 사건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연수원 시절 나는 제대로 동기생도 모르고 2년을 보냈다. 나름 고시공부만 해온 범생의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운 변화를 꾀하려고 했지만 누구도 내게 큰 도움을 주진 못했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인간관계의 총체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찍이 충청도에서 서울로 와 지연도 없고, 고등학교도 본고사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78년 입학) 명문고 출신의 배경을 가진 것도 아니고, 대학생활도 오로지 고시공부만 하는 분위기 속에서 보냈기 때문에 비판적 지식인들의 세계도 몰랐다. 그 흔했던 이념서적 한 권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으니 연수원에서 내일의 대한민국을 움직일 동기생들이 나를 존재감 있는 친구로 인정할 리가 없었다.

내가 대한민국의 진보적 법률가를 서서히 알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연수원이 아닌 군대였다. 나는 거기서 새롭게 세상을 배웠고 서서히 나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2016. 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