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안데스에 서다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14)-침묵할 수밖에 없는 절경, 페리토 모레노 빙하-

박찬운 교수 2024. 1. 28. 19:41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14)

-침묵할 수밖에 없는 절경, 페리토 모레노 빙하-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은 빙하, 페리토 모레노

 
 
새해 첫날 피츠로이 새벽 트레킹을 마치고 오후에 엘 찰텐을 떠나 두 시간 거리인 엘 칼라파테로 이동했다. 이틀간 그곳에서 머물며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볼 예정이다. 과연 이곳은 우리에게 어떤 감동을 줄 것인가.
 

엘 찰텐에서 엘 칼라파테까지는 차로 두 시간 정도 거리다. 이 지역에 두 개의 큰 호수가 있다. 하나는 아르헨티노 또 하나는 비에드마. 두 호수 근처에 몇 개의 대형 빙하가 있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엘 칼라파테에서 가까우며, 아르헨티노 호수로 이어진다. 아르헨티노 호수는 그 규모가 상당한데, 유역 면적(17,000평방 킬로미터)이 우리나라 경상북도와 거의 같은 크기다.

 
반복적인 학습은 우리의 뇌신경을 무디게 만든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도 매일 보면 감동은 처음 볼 때의 몇 분의 일로 줄어든다. 파타고니아에서 일주일 정도 있어 보니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토레스 델 파이네를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피츠로이의 신묘한 붉은 고구마를 보고 나니 앞으로 어떤 절경을 보아도 감탄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이제부터 보는 절경은 그저 덤이지 꼭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빙하 트레킹을 하기 위해 빙하에 다가갔다. 푸른 하늘 아래 푸른 빙하가 나타났다.

 
그런데 분명 예외도 있다. 피츠로이 트레킹에서 본 불타는 붉은 고구마의 감동의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연이어 본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무뎌진 뇌신경을 다시 깨우는 고강도의 절경이었다. 일행 중 누구는 이 빙하의 풍광은 또 다른 차원(another level)의 절경이라고  단언했다.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헨티노 호수까지 내려온 빙하. 빙하의 높이는 물 표면에서 약 70미터, 물속 빙하 바닥부터는 170여 미터가 된다고 한다.

 
페리토 모레노는 아르헨티나의 빙하 국립공원에 속하는 빙하로 파타고니아 빙하를 대표한다. 수많은 파타고니아 투어 프로그램이 이 빙하를 파타고니아의 빙하 넘버 원으로 소개한다.

이 빙하의 하단은 아르헨티노 호수에 닿아 있는데, 물밖으로 나온 빙하의 높이가 70미터(물 아래까지 계산하면 170 여 미터) 이고, 폭이 5킬로미터, 길이는 30킬로미터가 넘는다. 파타고니아에는 상당한 크기의 빙하가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합쳐 약 50여 개가 있고, 페리토 모레노 근처에만도 규모가 큰 빙하가 몇 개 더 있지만(웁살라, 비에드마 빙하 등) 유독 이 빙하가 유명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빙하에 다가가서 경이로운 풍광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선 접근하기가 편하다. 대부분의 빙하는 계곡을 거슬러 높은 산 ㅅ속에 있어 접근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페리토 모레노는 호수(아르헨티노)까지 내려와 있어 배를 타면 바로 접근이 가능하다. 더욱 이 빙하 전망대는 차로 갈 수 있어 누구나 이 빙하 전모를 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지구 온난화에도 불구하고 페리토 모레노의 크기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빙하는 매년 녹는 만큼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어 그 규모와 모습이 유지되고 있다. 기상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이유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지만, 현지 가이드들은  비록 지구온난화로 온도가 많이 올라갔어도 계곡 위에서 아래로 부는 바람이 워낙 세차다 보니 기온 상승을 만회해 얼음이 쉽게 녹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아르헨티노 호수까지 나온 빙하는 마치 자연댐처럼 보인다. 오른쪽 끝에 보이는 육지가 마젤란 반도인데, 이 빙하댐은 거기까지 닿는다. 5킬로미터나 되는 장벽이라 카메라 파인더에 들어오지 않아 파노라마 모드로 찍었다.

 
여행자들은 이 빙하에 와서 두 가지 중 하나를 경험한다. 하나는 빙하 건너 편에 있는 마젤란 반도 전망대에서 빙하의 전경을 보든가, 또 하나는 배를 타고 빙하에 직접 접근해 빙하 트레킹을 하는 것이다. 트레킹도 반나절 정도 걷는 빅 아이스와 두어 시간 걷는 미니 트레킹이 있는데 빅 아이스는 57세 이하만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나이 제한 이야기를 듣고 가이드에게 그것은 나이 차별이 아니냐고 농반진반 항의를 했다.

이날 우리 일행은 오전에 미니 트레킹에 참여하고 오후엔 마젤란 반도 전망대에 가서 빙하 전경을 보았다. 하루 일정으론 이 정도면 충분할지 모르지만  빙하 한 가운데를 몇 시간 걸을 것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조금 아쉬웠다.
 

빙하 트레킹은 이런 곳을 두어 시간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다.

 
짧은 시간 빙하 위를 걸어 보았지만 그 기억은 강렬하다. 빙하 곳곳의 크레바스는 트레커들에겐 위험했지만, 그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으로 빙하는 곳곳이 푸른 물감을 뿌린 듯 했다. 이런 자연의 조화는 얼음 속에서 파장이 긴 붉은 빛은  흡수되고 파장이 짧은 푸른 색은 산란되기 때문이다.  

빙하 곳곳에서는 얼음 녹은 물이 흐르고 있는데, 가이드는 그냥 마셔도 좋다고 한다. 나는 가지고 간 펫트병에 물을 담아 가지고 다니며 마셔 보았다. 냉장고에서  나온 물과는 비교가 안 되는 차가운 냉수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의 싸늘한 느낌이 매우 자극적이었다.
 

빙하는 수천 년 눈이 쌓여 얼음이 된 것이다. 흰색이지만 햇빛이 얼음 사이로 들어가면 푸른 색으로 변한다. 이렇게 변하는 이유는 얼음 속에서 파장이 긴 붉은 빛은 흡수되고 파장이 짧은 푸른 색은 산란되기 때문이다.

 
트레킹이 끝나는 가이드들이 빙하를 깬 얼음으로 위스키 칵테일을 만들어 주었다. 빙하 한 가운데에서 빙하 얼음으로 만든 칵테일을 마신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낭만적이다. 나도 한잔을 시원하게 마셨다. 갑자기 속이 후끈하면서 그동안의 여독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빙하 트레킹이 끝나자 가이드들이 얼음을 깨 위스키 칵테일을 만들어 주었다. 모두 한 잔씩 하면서 천하제일경을 예찬하고 새해를 축하했다.

 
페리토 모레노 전망대에서 빙하 전경을 볼 때의 느낌은 잠시 전 빙하 속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경치 묘사 대신 당시의 사진을 여러 장 이곳에 올리지만 이 경치를 묘사할 방법이 없다.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 그 위대한 모습을 이렇게 저렇게 그리려 하니 머리만 아프다.

어떤 묘사도 허용하지 않는 압도적 풍광! 이럴 때는 그저 침묵하는 수밖에 없다.  말(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비트겐슈타인이 환생해도 그리 했을 것이다. 그것이 이 경이적인 풍광에 대한 예의다. 
 

압도적인 풍광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경이적인 풍광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시시각각 빙하의 모서리가 무너져 호수 위로 떨어질 때는 굉음이 들렸다. 페리토 모레노는 겨울이 되면 빙하 장벽의 끝이 마젤란 반도까지 이어져 빙하댐을 만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댐은 수압에 의해 균열이 생기고 구멍이 뚫리고 마침내 무너진다. 우리가 전망대에 갔을 때는 이미 댐은 무너진 뒤였지만 다량의 유빙이 그 붕괴를 증언하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이 빙하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페리토 모레노가 살아 있는 한 지구의 생명도 계속될 것이다. 이 빙하가 우리의 눈에서 사라질 때 지구에 절대적인 위기가 찾아 올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지구의 생명력이 지속되길 원한다면 바로 이 빙하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 14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