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안데스에 서다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18)-브라질에 대한 짧은 생각, 리우 데 자네이루-

박찬운 교수 2024. 2. 2. 04:36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18)

-브라질에 대한 짧은 생각, 리우 데 자네이루-

 
 

리우데자네이루 시내 전경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리우데자네이루(약칭 리우 혹은 히우)의 코바카바나 해변의 호텔에서 아침을 맞이하였다. 서울을 떠난 지 한 달이 되었다. 이제 여행을 마무리하고 긴 귀국 길에 들어서야 한다.

그래도 서울로 떠나는 비행기가 저녁 시간이라니 잠시 리우의 명소 몇 곳은 둘러볼 시간이 있다. 겨울철이라고 하지만 이곳 날씨는 30도가 넘는다. 일행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버스에 탑승했다.
 

우리 일행이 돌아본 리우 시내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리우에서 브라질의 참맛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때문에 이날 보고 들은 것을 기초로 여행기를 쓰기도 어렵다. 다만 짧은 시간이라도 평소 브라질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있었으니 이 기회에 그것을 말하고 리우에서 본 것을 정리하면 그런대로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리우 시내와 구아나바라만
가운데 돌출된 산이 팡지아수카르

 
우선 다 아는 사실부터 확인하자. 브라질의 사이즈와 무한한 잠재력이다. 브라질의 영토는 850만 평방킬로미터로 전 세계 국가 중 5번째로 큰 나라다. 남미 대륙의 절반을 차지한다. 칠레와 에쿠아도르를 뺀 모든 남미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인구도 2이 넘는다.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한마디로 브라질은 대국 중 대국이고, 앞으로 발전할 여지가 무궁무진한 나라다. 이것은 세계화 시대에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도 브라질과의 협력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브라질은 식민지 시기부터 다른 남미 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 두 가지가 있었다. 이것이 현재 브라질을 이해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식민지 통치 방식이 스페인이 지배한 다른 남미 국가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스페인은 식민 초기부터 정교한 관료제와 통치기법을 가지고 원주민을 상대했다. 16세기 초부터 시행된 엔코미엔다(통치권 위임제도)나 18세기 이후의 아시엔다(대토지 소유제도)와 같은 제도도 모두 식민 모국의 강력한 통제와 조세제도 등을 전제로 했다. 이러한 통치기법은 안데스 지역이 식민지 이전부터 강력한 원주민 사회조직(예컨대 아즈텍이나 잉카제국)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응하는 방법이었다.
 

팡지아수카르에서 본 리우 시내

 
반면 브라질에는 스페인 식민지와 달리 조직화된 원주민들이 거의 없었으므로 정교한 통치제도 자체가 필요 없었다. 그렇다 보니 포루투갈은 매우 느슨한 방법으로 식민지를 경영했다.

왕이 광대한 토지를 귀족 등에게 나누어주고 간섭을 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국내 조세 제도도 정비가 안 돼 항구에서 나가는 수출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차이로 말미암아 스페인 식민지의 경우 식민 모국과 식민지 신민 사이가 갈등이 많아 결국 독립 전쟁으로 발전했지만, 포루투갈 식민지인 브라질의 경우는 그런 갈등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도 비폭력절차에 의해 가능했다. 이것은 독립 이후에도 포루투갈 왕가가 19세기 후반까지 브라질의 새로운 왕조로 존속하는 결과를 낳았다(브라질은 1889년에서야 공화국으로 새롭게 출발한다). 
 

삼바 축제 기간 중 삼바 경연이 열리는 경기장

 
또 하나는 브라질의 인종 분포가 다른 남미 국가와 달리 매우 특징적이란 사실이다. 브라질은 다른 남미 국가에 비해 흑인 비율과 혼혈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현재 상황을 보면 백인과 흑인을 포함한 혼혈의 비율이 거의 반반 정도이다. 옆 나라 아르헨티나의 경우 백인 비율이 90%에 비교하면 극단적인 차이가 있고, 페루나 볼리비아처럼 원주민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나라와도 크게 비교가 된다.

이렇게 혼혈비율이 높아진 이유는 식민지 시기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는 과정에서 일손 부족을 흑인 노예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독립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흑인과 혼혈인들이 브라질 사회의 한 축을 맡고 이어서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백인 비율은 더욱 떨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 때문에 브라질의 인종적 다양성은 남미 어떤 국가보다 중요하고 역동적이다.
 

카파코바나 해변

 
리우의 거리에서 만나는 브라질 사람들은 대부분 갈색의 피부를 가졌다. 현지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백인들조차 흰 피부 보다는 구릿빛 피부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피부 색깔로 인한 인종차별이 크지 않다는 말이다.

코바카바나 해변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잠시 해변가에 나갔더니 구릿빛 피부를 가진 브라질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거나 수영을 하고 있었다. 원시적인 분위기 속에서 삼바 춤을 추는 브라질인들의 꿈틀거리는 본능이 어딜 가도 보였다.
 

카파코바나 해수욕장

 
이런 특징을 가진 브라질을 염두에 두고 리우데자네이루(리우)를 좀 더 알아보자.

먼저 리우데자네이루라는 이름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리우를 일반적으로 리우데자네이루라고 발음하지만, 브라질 포루투갈어(브라질식 포루투갈어)로는 히우지자네이루라고 발음한다. 그 뜻은 ‘1월의 강’. 포루투칼이 리우를 발견한 해가 1502년인데 당시 포루투갈인들은 현재의 구아나바라만을 강으로 오인하고 리우데자네이루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긴 오해가 결국 역사가 된 것이다.
 

팡지아수카르에 본 리우 시내 맞은 산이 예수 그리스도 상이 있는 코르코바드 산

 
리우는 한 때 포루투갈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오랜 기간 브라질의 수도였다. 1808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포루투갈이 나라를 뺏기게 되자 당시 포루투갈 왕 마리아 1는 리우로 피난을 옴으로써 리우는 포루투갈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 뒤 브라질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한 뒤에도 1960년 브라질이 수도를 브라질리아로 옮길 때까지 리우는 수도 지위를 유지했다. 한마디로 리우는 브라질의 역사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일행은 짧은 시간이지만 리우를 찾아오는 여행자들 누구나 가는 명소 몇 군데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귀국해서 인터넷 검색으로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를 찾아보니 우리가 돌아본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알차게 본 것이다.
 

리우의 상징이 된 예수 그리스도 상

 
처음으로 간 곳이 예수 그리스도상(Cristo Redentor, 크리스투 헤덴토르).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리우의 상징이다. 리우 시내를 한눈에 바라다 볼 수 있는 코르코바드산 정상에 있다. 높이 38미터의 이 예수상은 1931년 완공되었다고 하니 아직 100년이 안 되었지만 리우를 세계적 도시로 선전하는 데 일등공신이다. 파리의 에펠탑,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견줄만한 명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좀 서글픈 것은 리우 시내 방향의 예수상 아래 동네는 알아주는 부촌인데, 그 뒷 사면의 동네는 브라질를 대표하는 파벨라(슬럼가)이다. 예수님이 사랑의 축도가 부자만을 위해 하시는 것은 아닐 텐데, 이 빈부의 차이를 해소하는 게 브라질의 큰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팡지아수카르(위키피디아)

 
두 번째로 간 곳은 팡지아수카르(Pão de Açúcar). 이곳은 구아나바라만에 돌출된 산이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선 빵산이라고 불린다.

팡지아수카르는 설탕산이란 뜻인데 이 산의 모습이 옛날 설탕 무역을 할 때 배에 실었던 빵 모양의 설탕(sugarloaf)을 닯았다는 것이다. 그 정상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명물인데 20세기 초부터 운영되어 왔다고 한다.

정상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면 저 멀리 예수 그리스도 상이 보이고, 대서양과 코파카바나 해변, 리우 시내 와 구아나바라만이 손에 잡힐 듯 하다.
 

리우 대성당(위키피디아)
리우 대성당의 내부 모습, 그 규모와 스테인드 글라스가 파격적이다.

 
세 번째로 간 곳은 리우 대성당(Catedral de São Sebastião do Rio de Janeiro), 성 세바스찬 성당이라고 불리는 이 성당은 리우의 가톨릭 주교좌 성당이다.

이 성당을 보는 순간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그런 외관을 세계 어디에서도 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서양의 성당 양식이 아니고 마치 피라미드를 보는 느낌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하여 바로 찾아보니 아닌 것도 아니라 마야문명의 피라미드(유카탄 반도의 팔렌케 유적의 피라미드)에서 가져온 양식이라고 한다.

내부 공간은 2만 명 이상이 들어갈 정도로 웅장하고 4면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파격적이다. 브라질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가장 보수적인 가톨릭에까지 영향을 준 것이다.
 

셀라론 계단

 
마지막으로 본 것은 셀라론 계단(Escadaria Selarón). 이곳은 원래 리우의 평범한 빈민촌인데, 1990년대 초부터 이곳 계단에 화려한 타일이 붙기 시작해 지금과 같은 화려한 계단으로 변모했다.

그 시작은 칠레 출신 화가 호르게 셀라론이 계단에 타일을 붙이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는 오랜 세월 세상을 떠돌다가 리우에서 정착했는데 계단 타일 붙이기는 그가 브라질에게 준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인산인해의 셀라론 계단
셀라론 계단이 놀이터가 되었다.

 
그는 돈이 떨어지면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그 돈으로 타일과 세라믹 또는 거울을 사서 계단을 장식했다. 215계단에 2000 이상의 타일을 붙였고 그의 활동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자 60개국 이상의 국가에서 여행자들이 자국의 타일을 가지고 와서 붙였다고 한다.

지난 2016년 리우 올릭픽 당시 언론에서 이 계단이 다루어지자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리우를 찾는 외국인들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었다. 우리도 그 때문에 가긴 했지만 한마디로 인산인해였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곳 계단에서 증명사진을 찍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나도 인물사진 한 장을 찍으려고 했지만 어쩐지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단념하고 말았다.
 

셀라론 계단에 가기 전 골목길

 
이렇게 해서 나의 남미여행은 모두 끝났다. 우리는 2024년 1월 10일 저녁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을 떠나 상파울로로, 상파울로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인천으로 약 26시간의 비행 끝에 한국에 도착했다. 시계는 2024년 1월 12일 오후 2를 가리키고 있었다.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 18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