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남부독일 여행기

2018년 남부 독일을 기록하다(3) 만일 독일에서 한 곳만 간다면

박찬운 교수 2018. 7. 9. 05:30

2018년 남부 독일을 기록하다(3)


만일 독일에서 한 곳만 간다면

-황태자의 첫 사랑 하이델베르크를 찾아-


 

철학자의 길에서 바라 본 하이델베르크 전경



만일 독일에서 한 곳만 간다면

 

독일을 처음 온 게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적어도 5번 이상 독일을 왔다. 그렇지만 그 독일 방문은 대개 공무로 왔기 때문에 베를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몇 년 전 스웨덴 룬드에 있을 때도 독일을 두 번이나 왔지만 그 때도 베를린과 함부르크였다. 남부는 4년 전 바덴바덴, 2년 전 튀빙엔 대학을 왔을 때가 전부다. 그러니 이번 기회가 남부 독일을 제대로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다


오기 전 독일을 잘 아는 지인들에게 물었다. "독일에 가서 딱 한 군데를 간다면 어디를 가는게 좋겠소?" 답은 그곳이었다. 이번 학술대회에 함께 참가한 우리 학교 송호영 교수도 내가 일주일 간 여행을 한다고 하니까 한 군데를 추천해 준다. 역시 그곳이었다. 이런 것을 이구동성이라고 한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곳, 하이델베르크다!

 


1954년 선을 보인 뮤지컬 '황태자의 첫 사랑' 포스터



황태자의 첫 사랑이란 소설이 희곡으로, 급기야 영화로 만들어진 게 반세기가 넘었다. 가물가물하지만 어느 황태자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와서 평민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결국 신분을 뛰어 넘어 사랑의 열매를 맺진 못하지만 황태자와 젊은 여인의 순수한 사랑에 사람들은 감동한다. 네카르 강변의 고성과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색창연한 대학가에서 일어나는 낭만적 이야기... 나도 언젠가 꿈 속에서 이곳을 가보고 싶었다. 양들이 뛰어 노는 산이란 뜻의 하이델베르크에!

 

하이델베르크는 콘스탄츠와 마찬가지로 바덴 뷔르템부르크 주에 속한다. 다만 콘스탄츠는 주의 최남단, 하이델베르크는 주의 북단에 있다. 가는 길은 복잡하다. 한 번에 가는 기차가 없어 최소 한 번 혹은 두 번 내지 세 번을 갈아타야만 한다. 독일어를 모르는 사람이 이런 여행을 하는 것은 꽤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하이델베르크의 상징 칼 테오도르 다리(일명 알테 브뤼케), 다리 위쪽 산을 보면 하이델베르크성이 보인다.



하지만 이제 그 불편함을 스마트폰이 거의 대부분 해결해 준다. 똑똑한 앱만 깔면 역에 갈 필요 없이, 몇 번 클릭하는 것만으로 표를 살 수가 있고, 티켓 정보에 따라 플랫폼으로 가 정해진 열차를 타면 된다. 승무원이 돌아다니며 티켓 검사를 할 때도 한국에서와 같이 스마트 폰으로 다운 받은 티켓 바코드만 보여주는 것으로 만사 오케이다.

 

하이델베르그 행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바로 검은 숲, 슈바르츠발트를 통과해야 한다. 알프스의 고지에서 저지 독일로 이어지는 도중에 현재의 독불 국경 근처에 거대한 숲이 만들어져 있다. 열차는 이 숲을 통과하면서 북으로 북으로 올라간다. 가는 중 거치는 역 중 하나가 바덴 바덴. 88 서울 올림픽이 결정될 때 IOC 위원장 안토니오 사마란치가 이곳에서 세울이라고 외쳤다



하이델베르크를 가로 지르는 라인강의 지류 네카르 강, 이 강을 따라 올라가면 같은 바덴 뷔템부르크 주의 대학도시 튜빙겐을 만난다.



이곳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온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도 이곳엔 세계 각처에서 따뜻한 온천물로 목욕을 하거나 수영을 하기 위해 이곳에 몰려든다. 한국 사람들은 한 가지 알아둘 것! 독일의 목욕탕이나 사우나는 대개 남녀가 올 누드로 함께 사용한다. 혼욕 문화에 익숙지 않은 한국 사람들이 이런 곳에 가면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들어가서 10분만 조용히 있어 보라, 금방 적응 될 것이다. 평화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하아델베르크의 상징인 팔츠 선제후가 살았던 하이델베르크 성,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 건축물 중 최고로 평가되고 있다.(위키피디아)



열차는 칼스루에를 거쳐 4시간에 걸친 운행 끝에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에 도착했다. 오기 전 여행용 앱으로 예약한 호텔을 구글 지도로 찾아갔다. 옛날 같으면 이것도 꽤나 신경 쓰이는 일이나 인터넷이 되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가니 누구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다. 호텔은 역에서 구 도시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짐을 풀자마자 가지고 간 컵라면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하이델베르크 구도시를 향해 걸었다. 이미 중천에 뜬 태양은 사정없이 네카르 강물을 반사시키면서 온도를 높이고 있었다. 이미 그으러진 구릿빛 피부 거기에 까만 선글라스를 낀 내 모습은 영락없는 방랑객이다. 백 프로 자유를 만끽하면서 미지의 세계를 걷는다는 것에서 행복함을 느낀다.


구 도심을 들어가는 순간 수 백 명의 시위대가를 나를 맞는다. 살펴보니 인종차별을 중지하라는 외침이다. 요즘 독일의 난민문제가 심각하다. 역시 자유의 도시 학생들 답다.

 

하이델베르크 구 도시의 중심인 성령교회와 마그리크 광장



유럽 제1의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는 유럽 제1의 대학도시다. 유럽엔 대학만을 위한 도시가 여럿 있다. 영국엔 옥스퍼드와 케임브릿지가 그렇고 독일엔 영국에 비해 그 수가 훨씬 많다. 하이델베르크, 게팅겐, 튀빙겐 등등... 이런 대학도시 중에서도 하이델베르크는 단연 최고다. 시 전체 인구 15만 중 절반이 학생이거나 교직원 혹은 그 가족이라고 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도서관(위키피디아)



더욱 이 대학이 독일에서 특별한 것은 그 역사성 때문이다. 1386년 독일에서 최초로 세워진 대학이다. 이미 타 지역에선 대학이 들어선 지-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케임브릿지- 2백 여 년이 되는 동안 독일엔 대학이 없었다. 그 만큼 중세 기간 독일은 유럽의 선진국이 아니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유럽의 지성사는 그 때까지만 해도 볼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19세기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였던 화학자 로베르트 분젠 동상



유럽의 지성사는 대학으로 시작되었다. 대학이 있기에 유럽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리더가 되었다. 대학이 있었기에 학문과 과학을 발달시켰다. 도대체 대학이 무엇일까. 지금 우리는 대학을 단지 고등교육기관으로만 알고 있으나, 서양인들이 거의 천 년 전부터 세우기 시작한 대학은 단순히 고급지식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대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종교와 권력으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 대학은 교황으로부터도 황제로부터도 자유스러워야 했다.(아쉽게도 동양의 고등교육 기관엔 역사적으로 이런 자유와 자치가 없었다. 당나라 시대의 국자감, 조선시대의 성균관은 고동교육기관이긴 하였지만 관리를 키우기 위한 관학이었다. 거기에서 유럽식 자유와 자치는 발견하기 힘들었다. 나는 서양이 동양을 앞 서게 된 데에는 이 대학의 역할이 크다고 본다.) 


그게 바로 학문의 자유이자 대학의 자치였다. 학문과 과학은 이런 자유와 자치 속에서 발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교황이나 황제가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의 대학을 좋아만 할 수 없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의 선생과 학생들은 언제나 좋은 신하이기 보다는 삐딱하고 때론 반역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학생감옥, 대학의 자치를 여실히 알 수 있는 증거다. 19세기까지 대학 내엔 학생들을 처벌한 다음 가둘 수 있는 감옥을 운영했다. 학교 밖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학생들은 학교 당국으로 인도되어 대학 내에서 처벌되었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수감생활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최장 4주까지 구금되었다고 하는데 그 기간 중 학생들은 이곳에벽면에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오늘 날까지 그 흔적이 이렇게 남아 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독일 지성사를 이끈 장본인이다. 시내를 돌아보면 이 도시는 사실상 이 대학의 캠퍼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 도시(Alt Stadt)에서 제법 큰 건물은 거의 모두가 대학 건물이다. 네카르 강을 건너 가파른 경사 길을 오르면 평탄한 도로가 나타난다. 바로 그게 철학자의 길이다. 거기에서 정면을 보면 대공이 거주하는 궁전이 있고 그 아래에 대학이 있다


구 시가에서 칼 테오도로 다리를 건넌 다음 작은 소로(위)를 따라 구 시가 맞은 편 산을 오르면 철학자 길(아래)을 만난다.



학자들은 이곳을 매일 같이 걸으면서 권력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을 걸어갈 것을 결심한다. 그 결과 학문적 성과는 빼어났고 독일 전역에서 인재가 모여 들었다. 20세기 들어와 노벨상이 만들어진 이후 이 대학의 교수들과 이 대학을 거쳐 간 학자들이 그 상을 받았다. 그 수가 무려 50명이 넘는다. 과거엔 인문학의 거점이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선 화학, 물리학, 의학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하이델베르크에 들어 와 있는 4개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하이델베르크 구 도시 학생감옥이 있는 학교 역사 박물관을 들어가다 보니 이 대학과 자매결연한 몇 개 외국대학을 볼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일본 교토대학. 순간 일본 사람들의 특별한 독일 사랑이 생각났다. 메이지 기에 일본은 유수한 젊은이들을 서양으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가장 각광 받은 곳은 역시 독일이었다.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해 유럽의 정치지형을 바꾼데다가, 황제가 직접 통치하는 게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해 새로운 정치를 해야 하는 일본에겐, 하나의 롤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법률 분야에서도 원래 프랑스법을 따라 가기로 했다가 독일을 따라가는 것으로 궤도 수정을 했다. 프랑스 민법 대신 독일 민법을 들여 왔으며 독일 헌법에 따라 국가 기본 체제를 만들었다. 


재미 있는 것은 일본 사람들은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까지 들여 왔다. 교토의 교토대학 근처 은각사에서 남선사까지의 길을 '철학의 길' (哲学の道)이라고 하는데 이게 어디서 온 것일까?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자의 길에서 따온 게 분명하다. 일본인들은 서양의 생각마저도 따라가려고 했던 것이다. (제4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