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남부독일 여행기

2018 남부 독일을 기록하다(5) 기억의 도시 뉘른베르크를 찾아

박찬운 교수 2018. 7. 13. 17:35

 2018 남부 독일을 기록하다(5) 


기억의 도시 뉘른베르크를 찾아


 

히틀러가 의사당으로 건축하다가 미완으로 그친 건물, 지금 이 건물은 나치 역사자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사진 위키피디아)



내가 뉘른베르크를 간 이유

 

독일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이에른은 과거 독일 제후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다. 1871년 통독은 프로이센이 했지만 바이에른의 영화가 끝난 것은 아니다. 바이에른은 그 뒤에도 여전히 강했고 독일의 운명을 결정 짓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거기엔 자원과 돈 그리고 인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이에른의 장구한 역사와 전통이다. 바이에른은 독일 중의 독일이다.

 

바이에른의 여러 도시 중 뉘른베르크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독일의 정 중앙에 위치해 자연스럽게 전 독일의 지정학적 중심이고, 과거 신성로마제국 시절엔 여기에서 제국의회가 자주 열려 ,제국의 사실상 수도 역할을 했다(신성로마제국은 황제가 순행을 하면서 정무를 보았기 때문에 항구적인 수도는 없었음). 그러나 내가 이 도시를 가고 싶었던 것은 역사도시로서의 뉘른베르크를 보기 위함은 아니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열린 뉘른베르크 사법청사 오른 쪽 욍(위), 사법청사 전경(아래)



사실 역사도시로서의 뉘른베르크는 사실상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은 이 도시를 완전히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할 목적으로 맹폭을 가했다. 그 결과 이 도시는 완전 폐허가 되고 말았다. 지금 뉘른베르크 구도심 한 가운데서 유서 깊은 건물(성당이나 시청사)을 본다고 해도, 그것은 대전 이후 복구한 새 건물일 뿐, 오리지널한 것은 아니다.


2차대전으로 폐허가 된 뉘른베르크(사진 위키피디아)

 

내가 이곳에 간 제1의 목적은 이 도시가 폐허가 되었던 그 원인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전쟁의 폐허를 피할 수 없었던 인간의 만행과 그것을 단죄했던 기억의 장소를 보기 위함이었다. 이곳은 나치의 심장부로서, 나치의 온갖 만행이 이루어진 장소이자(유대인과 비아리안의 시민권을 박탈한 뉘른베르크법을 생각하라!), 전쟁이 끝난 뒤 그 나치를 심판한 장소였기로, 독일인, 아니 세계인의 기억 속에 각인 되어 있다.

 

전범 재판이 열린 600호 법정에서


어릴 때부터 들어온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열린 곳은 어디일까. 나는 7월 8일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거기부터 찾아 나섰다. 그곳은 구도심(Alte Stadt)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한 정의궁(Palace of Justice)이라 불리는 뉘른베르크 사법청사다. 이곳은 고등법원 및 지방법원 그리고 검찰청까지 포함한 사법분야 통합청사로서 20세기 초 문을 열었다. 2차 대전 중에도 용케 큰 피해를 입지 않아 전범재판을 바로 할 수가 있었다. 나치의 심장부에서 나치를 심판하는 장소로 이곳보다 좋은 곳은 없었을 것이다.

 

역사적인 뉴른베르크 전범 재판소는 사법청사의 오른쪽 윙에 위치한 600호 법정이다. 이 법정은 현재도 중요사건 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는 곳이나 평상시엔 관광객의 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이 법정을 관람하고 윗 층에 마련된 전시관을 들러 전범재판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수 있다.

 

역사 자료관에서 관계자의 설명을 듣는 학생들



뉘른베르크 원칙과 국제형사재판소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치에 대한 단죄는 두 가지 절차를 통해 진행되었다. 하나는 국제사회(연합국)가 국제군사재판소(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를 만들어 국제법에 의해 직접 나치 최고 책임자를 재판하는 국제전범재판, 또 하나는 연합국 관리위원회 명령(Control Council No.10)에 따라 만들어진 뉴른베르크 군사재판소(Nuremberg Military Tribunal)가 나치 최고 책임자 외의 전범을 재판하는 군사재판. 이 두 가지 재판이 모두 뉴른베르크 사법청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재판받는 나치 전범들


나는 22년 전 미국에서 국제인권법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국제형사법을 공부하였다. 국제형사법은 뉘른베르크에서 확인된 법원칙이 발전되어 온 국제법의 한 분야다. 당시 국제사회는 유럽(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인 보스니아 헬체고비나에서 벌어진 미증유의 인종청소)과 아프리카(루안다에서 일어난 종족전쟁)에서 일어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국제재판소를 만들어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헤이그에 ICTY(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가 만들어졌고, 탄자니아 아루샤에 ICTR(루안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설치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2000년 국제형사재판소로 발전했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1998년) 헤이그 ICTY에서 반 년 간 인턴십을 했다. 그곳 검사실에 배치되어 동경재판을 검토해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 때부터 국제형사재판의 원조인 뉘른베르크 재판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이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을 내 발로 꼭 가보고 싶은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난 20년 동안 뉘른베르크를 방문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이번에 온 것이다. 나로서는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뉘른베르크 600호 법정에서 한 참 동안 나오지 못하고 당시 재판을 떠올렸다. 국제사회가 직접 국제법을 근거법으로 개인을 재판한 첫 사례다. 그것은 그 후 유사한 사례에서 국제사회가 직접 재판해 형사처벌할 수 있는 명확한 원칙을 정립했다. 이른 바 뉘른베르크 원칙(Nuremberg Principles)이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뉘른베르크 재판 기념관에도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뉘른베르크 원칙



<뉘른베르크 원칙>

 

원칙1

국제법 위반을 구성하는 행위를 범한 어떤 사람도 거기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고 처벌받아야 한다.

 

원칙 2

국내법이 국제법 위반 행위에 대해 처벌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국제법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의 행위를 경감하지 않는다.

 

원칙 3

국제법 위반 행위를 저지른 사람이 국가수반이나 책임 있는 정부의 관리라고 하는 사실은 국제법 책임에서 경감 사유가 되지 않는다.

 

원칙 4

정부나 상관의 명령에 따라 어떤 사람이 행동했다는 사실은 국제법 책임으로부터 그를 경감시키지 않는다.(나는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은 받아들일 수 있는 변명이 아니다)

 

원칙 5

국제법 위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한을 가진다.

 

원칙 6

국제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에는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범죄 등이 있다.

 

원칙 7

위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한 범죄를 범하는 과정에서 공범은 국제법 상에서의 범죄행위다.

 

이 원칙에 따라 국제사회는 국내 사법절차가 감당하지 못하는 국제범죄를 단죄하기 위해 로마규정이라는 국제형사재판소 설치 관련 협약을 제정했다. 이 협약은 2002년 상설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설치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새로운 정의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우리나라도 이 협약의 당사국이며 ICC 재판관 배출국이기도 하다. 모두가 뉘른베르크가 뿌린 씨의 결실이다.

 

뉘른베르크 교외에 히틀러가 만든 의사당 건물에 역사자료관이 만들어져 있다.



또 하나의 기억의 장소 나치 자료관


뉘른베르크에서 나치의 기억을 생생하게 불러일으키는 곳은 나치 시대 히틀러가 대규모 나치 전당대회와 퍼레이드를 연 곳에 만들어진 나치 자료관(Doku-Zentrum)이다. 뉘른베르크 중앙역에서 트램을 타고 30분 정도 외곽으로 나가면 이곳 Reichsparteitagsgelände에 닿는다.

 

히틀러는 의사당을 콜롯세움과 유사하게 만들었다. 공사가 끝나기 전에 전쟁이 끝남으로써 의사당은 완성되지 못하고 이런 모습으로 서 있다.


히틀러는 뉘른베르크를 나치의 심장부로 생각하고 이곳에서 대형 대중집회를 열었다. 수 백 만 인파를 모아 놓고 선동적인 연설을 했고 거기서 군인들의 열광적 열병을 받았다. 이것은 당시 필름으로 제작되어 독일 전역에 방송되었고, 독일 사람들을 나치 독일의 노예로 만드는 데 사용했다.

 



당시 그는 이곳에 대규모의 의사당을 포함해 상설적인 전당대회 시설을 만들려고 계획했다. 전쟁에서 히틀러가 이겼다면 40년 대 중반 쯤 이런 시설은 완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패망과 더불어 이들 건축물은 더 이상 만들어질 수 없었다. 미완의 상태로 공사가 중지된 것이다. 전후 바이에른은 흉물스런 콜로세움 모양의 의사당에 영혼을 불러 일으키는 작업을 했다. 건물을 허물지 않고 기억의 장소로 만든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가는 순간, 나치의 출발부터 패망까지 시간 순으로, 어떤 광기의 역사가 독일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나치 역사자료관에 온 고등학교 학생들, 교사가 사전에 이 역사자료관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그곳을 찾은 것은 아침 9시가 조금 넘어서다. 10시 개관 전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린 학생들이다. 이들은 인솔 교사와 함께 와서 자료관 한 곳 한 곳을 매우 자세하게 돌고 있었다. 노트에 필요한 것을 써가면서... 철저한 역사공부다. 이 어린 학생들은 부모님의 부모님 아니 그 부모님들이 겪었을 비극을, 읽고 쓰고 들으며, 배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


뉘르베르크 재판의 결정문 모음집

 

기억의 공간을 만드는 의미는 자못 크다. 우리에게도 저런 역사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전쟁, 독재시기 등등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비극을 맛보았다. 그들은 살해되고 고문당했다. 그 사람들은 지금 어느 구천에서 떠 돌고 있는 것인가. 이런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선 우리도 기억하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내가 뉘른베르크에서 보고 듣고 깨달은 바다.(6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