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남부 독일을 기록하다(4)
영웅의 전당, 발할라
-독일 민족주의의 현장을 가다-
독일 민족 명예의 전당, 발할라
어렵게 찾아간 발할라
버스를 내려 혹시나 방향이 맞는 지 동네 아저씨에게 손짓발짓으로 물어보았다. 방향은 맞단다. 동네를 지나 야산으로 오르는 길로 접어들었을 때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이토록 사람이 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적어도 그곳을 찾는 이들이 버스를 채웠을 터인데... 그들 뒤만 따라가면 목적지가 나올 줄 알았는데... 단 한명도 그곳으로 가는 이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나는 산으로 올라가는 작은 길로 들어서며 뭔가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그 명소에 오르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한심스러웠다. 돌아가야 하는가? 그렇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발길을 돌이킬 수는 없다. 정상까지 가서 그것을 확인하고 가자.
발할라로 가는 길, 오직 나만이 이 길을 걸어 발할라로 갔다
차에서 내려 1킬로미터 정도 산길을 오르자 정상 부근에서 쉬고 있는 한 가족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그들에게 그곳 이름을 외쳤다. 젊은 가장이 웃으면서 다섯 손가락을 편다. 5분만 더 가라는 것인가? 그래 거의 다 왔다는 신호일 거다. 나는 마지막 구슬땀을 흘리며 숲속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걸었다.
숲이 끝나고... 아, 내 앞에 펼쳐진 한 거대한 건물. 마치 파르테논 신전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장대한 신전이 도나우 강을 바라보며 산 정상에 우뚝 서 있다. 저것이 바로 오늘 내가 뉘른베르크에서 레겐스부르크까지 기차를 타고(ICE로 한 시간) 와서, 버스를 바꿔 타고(40분), 아무도 오르지 않는 산을 오른 이유다. 유레카! 발할라(Walhalla)!
몇 시간의 대장정 끝에 찾아낸 발할라!
내가 발할라를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독일에 오기 전 독일역사에 관한 책 몇 권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머리에 많이 남는 게, 영국박물관 관장을 역임한 닐 맥그리거가 쓴 <독일사 산책>이란 책이었다. 그는 독일 역사를 박물관의 유물이나 도시의 건물로 설명한다. 박물관장다운 설명방법인데, 독일의 본질을 꿰뚫는 매우 이색적인 방법이었다. 그의 글에서 ‘영웅의 전당, 발할라’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그 글을 통해 19세기 독일이 고민한 독일 민족주의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었다.
발할라의 외관 이모 저모
발할라에서 바라 본 도나우 강
루드비히 1세의 집념과 발할라 건축
발할라는 바이에른의 왕 루드비히 1세(재위 1825-1848)가 독일 민족의 긍지를 세우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나폴레옹에 의해 수모를 당한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이런 건축 역사를 했다는 것이 꽤나 흥미롭다. 물론 거대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이루어진다. 어느 나라의 수도를 가도 거기엔 그 나라의 긍지를 알리는 기념물들이 있다. 이것도 그런 유의 건축물이라면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발할라는 분명 그 이상이다.
발할라는 신고전주의 건축가 레오 본 클렌츠에 의해 십 수 년 간의 공사 끝에, 1842년, 레겐스부르크 근처 도나우 강변의 어느 산정에 마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옮겨 놓은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건축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오늘 나처럼 산길로 올 것이 아니라 도나우 강을 통해 와야 한다. 강에서 접근해 계단을 통해 100미터가 넘는 계단으로 올라오면 도나우 강을 향해 건설한 발할라 기념관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이 길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것을 연상시킨다. 클렌츠의 목적도 그것이었다. 그리스의 후예로서 독일의 파르테논을 만든 것이다. (참고로 19세기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유럽의 적자로 그리스의 문화를 계승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그리스 시대 건축물을 본뜬 공공건축물이 유행했다. 이것이 바로 신고전주의 건축이다.)
발할라의 내부 모습
레겐스부르크는 독일 전역과 그 너머에서까지 대표들이 찾아와 신성로마제국 제국회의를 열었던 장소다. 제국회의는 신성로마제국 소속 대의원들이 모여 국사를 의논한 독일 의회였다면 발할라는 또 다른 의미의 독일 의회다. 위대한 독일 영혼(영웅)이 시대를 불문하고 모여 역사적 업적을 자랑하는 의회다.
이 영웅들을 불러 모은 발할라의 외관은 도리아식 기둥이 4면에 늘어서 있고, 삼각형 지붕 박공엔 파르테논처럼 게르만 부족의 창조신화(북쪽)와 기원 후 9년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로마군단을 괴멸시킨 게르만의 영웅 헤르만(아르메니우스)의 전투장면(남쪽)이 조각 되어 있다. 기념관 내부를 들어가면, 길이 50미터 폭 20미터의 공간에 화려한 색채의 대리석이 위엄을 뽐내면서, 보는 이의 눈을 자극한다. 바닥에 깔린 석판은 하얀색과 황금색이며, 벽은 분홍색, 거기에 황금빛과 청색으로 빛나는 천장은 여인상들이 받치고 있다.
발할라를 만든 루드비히 1세
발할라. 이것은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데 오딘 신의 시녀 발키리가 전사한 영웅을 인도해 조상을 만나게 하는 장엄한 궁전이다. 그러니 이곳은 영웅적인 독일 국민들이 그 영웅을 낳게 한 위대한 조상을 만나는 장소다. 이보다 더 극적인 역사교육이 어디에 있겠는가.
독일 민족주의의 교과서, 발할라
이 발할라는 독일 민족주의를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교과서다. 그것은 건물의 외관 때문이 아니다. 루드비히와 그 후대들이 이곳에 모신 영웅들의 면면을 통해서다. 루드비히는 이 기념관을 개관하면서 100여 명의 영웅(정치가, 군인, 예술가, 철학자와 과학자)을 골라내 조각상을 세웠고, 1962년부터 오늘 날까지 바이에른 정부는 매 5-7년에 한번 씩 조각상을 추가해, 현재는 (조각상은) 총 196개에 이른다. 그러니까 지난 200년 동안 독일(바이에른)은 독일 역사에서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독일인 196명을 골라내 독일 국민들에게 독일의 영광을 이야기 해 온 것이다.
발할라의 벽면엔 저런 흉상이 196개가 있다. 아래 사진 두 장은 임마뉴엘 칸트와 알브레히트 듀러
발할라에서 보여 준 독일 민족주의의 실체는 소위 대 게르만 주의(Greater Germany)라는 것이다. 19세기 독일인 들 사이에선 과연 독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독일은 영토로 정의되는가? 독일은 독일 말을 쓰는 사람으로 정의되는가? 이것은 독일이 다른 나라처럼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일정한 영토에서 오래 동안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유럽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면서 항상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독일을 정의해 왔다. 신성로마제국 독일의 영토는, 시대에 따라 어떤 때는 유럽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고, 또 어떤 때는 쪼그라들고 발기발기 찢어지기도 했다. 루드비히 때만 해도 독일 내엔 사실상 여러 나라들이 군웅할거한 상태였다.
루드비히는 발할라 기념관 안내서의 서문에 직접 조각상 선정기준을 밝힌다.
“발할라에 모셔지는 인물은 반드시 독일 혈통이어야 하며, 독일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오니아 출신이건 시칠리아 출신이건 그리스인은 그리스인 것처럼, 발트 제국이나 알자스 출신, 스위스나 네덜란드 출신도 독일인은 독일인이다. 그렇다. 네덜란드 출신도 독일인이다. 플랑망어(게르만어파에 속한 언어로 프랑스와 함께 벨기에의 공용어)와 네덜란드어는 저지 독일어에 포함되는 방언이기 때문이다. 한 민족의 존속을 결정하는 것은 사는 장소가 아니라 언어이다.”
누가 독일의 영웅인가
이런 기준으로 루드비히는 독일어를 사용하기만 하면 독일인으로 간주하고 역사적 영웅을 골라냈다. 하지만 루드비히를 비롯해 그를 승계한 바이에른 정부가 독일 영웅을 골라낸 배경엔 매우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엿보인다. 누구나가 저 사람은 포함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포함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누구나 저 사람이 과연 독일인인가 하고 의심되는 사람도 다수 포함되었다.
영웅의 얼굴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벽에 이렇게 이름만이라도 표기했다. 문설주 위의 이름을 보면 샤를마뉴 대제 곧 카알 대제가 보이고, 로마군단을 물리친 헤르만이 보인다.
몇 사람을 보자. 프랑스에선 샤를마뉴 대제라고 불리고 독일에선 카알 대제이라고 불리는 왕이 이곳에 있다, 이 사람을 최초의 독일 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프랑스라면 당장 반대할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들의 왕이기 때문이다. 오랜지 공 윌리암 즉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3세도 이곳에 있다. 루드비히에겐 네덜란드어는 독일어의 한 부류이며 그가 루이 14세와 전쟁을 벌린 나사우 가문의 독일 왕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일사 아니 세계사적으로 마틴 루터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그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바이에른이 가톨릭 교세가 강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에 적개심을 갖는 바이에른인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그가 이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것은 1848년 혁명 이후에나 가능했다. 유태인들은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써도 오래 동안 포함되지 못했다. 발할라에 유태인으로 들어간 최초의 인물은 1990년에서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그 주인공이 되었다.
누구나 이곳에 있어야 한다고 여긴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
누가 봐도 독일인이지만 정치적 반대자도 들어가지 못했다. 독일인에게 사랑받는 시인 하이네(1797-1856)가 대표적이다. 그는 살아 생전 루드비히의 발할라 구상을 터무니 없다고 비판하면서 발할라는 해골의 터전이라고 말했다. 그가 들어간 것은 2010년의 일이다.
루드비히의 발할라에 신랄한 비판을 한 시인 하이네
칼 마르크스? 그는 지금까지 못 들어갔다. 왜 못 들어갔을 까? 나는 발할라 직원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웃을 뿐 답을 하지 않는다. 쓸데없이 어려운 문제를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그러나 발할라 입구에서 본 소녀(조피 숄)는 보편적 인간으로 살아가길 희망하는 내겐 매우 희망적이다. 그녀는 히틀러에게 비폭력으로 맞서다가 사형을 당했다. 그녀의 조각상 아래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2차 대전 중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조피 숄
“제3제국의 불의와 폭력, 공포에 용감하게 저항한 모든 이를 기리며”
발할라를 방문한 것은 이번 여행의 정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발할라 앞에서 도나우 강을 바라보면서, 독일, 독일인, 독일 민족주의, 세계 평화와 인권...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머리가 갑자기 무거워 옴을 느꼈다.
(제5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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