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남부독일 여행기

2018년 남부 독일을 기록하다(1) -콘스탄츠 3국 학술대회

박찬운 교수 2018. 7. 8. 05:02

2018년 남부 독일을 기록하다(1) 



성실한 법학자들의 모임, 콘스탄츠 3국 학술대회




콘스탄츠 대성당에서 본 구도시와 보덴제



콘스탄츠로 가는 길

 

서울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절반은 성공했다고 본다. 그러나 훌훌 떨쳐버리고 떠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서울을 떠나기 전날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상황이 조금만 악화되면 언제든지 독일 콘스탄츠로 가는 여정은 취소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제일 큰 문제는 아버지의 건강이었다. 지난 달 초부터 심상치 않은 일들이 아버지 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달여에 걸쳐 검사를 해보니 몸의 몇 부분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다.

 

90을 바라보시지만 그 연배의 다른 노인 분들과는 비할 수 없는 건강과 지력을 가지고 계신데... 이젠 아버지도 별수가 없는 모양이다. 의사 선생의 말은 당장 무슨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저 몇 달 지켜보자고 한다. 치료도 하지 않고 그저 기다린다는 게 황당한 일이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내가 나가야 하는가. 나가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어떻게 되지... 큰 효자도 아니면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공항으로 가는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츠 대학에서 한독일 3국 법학자들이 만나 발표를 하고 토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릴 수가 없었다. 이것을 위해 한 학기 틈틈이 준비해 오지 않았는가. 이리 생각하면, 자고로 공부하는 자는, 아니 나라는 사람은, 참으로 이기주의자다. 자기 하고 싶은 것은 양보를 하지 않으니 말이다. 한 번 해야겠다는 마음이 머릿속을 채우면, 그것을 하지 않으면 잠도 오지 않고, 밥도 먹고 싶지 않다. 그게 바로 나다. 그렇게 지난 57년간 살아왔다. 이젠 고칠 수 없는 내 성격이다. 이대로 살다가 죽을 뿐이다.

 

콘스탄츠로 (가는) 오는 길은 멀고도 어려웠다. 인천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간 다음, 거기에서 취리히로 환승하고, 또 거기서 공항 셔틀 택시로 한 시간을 달려 콘스탄츠에 도착했다. 집을 떠난 지 꼬박 20시간만이다. 호텔에 도착한 것은 72일 자정 무렵. 씻자마자 잠을 청했지만 시차 때문인지 잠은 오지 않는다. 내일부터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니 약간 흥분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자.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2018년 여름 콘스탄츠 학술대회와 그 이후 약 1주일 동안 독일남부를 돌아본 나의 여행일기다. 현지 호텔에서 새벽 시간을 이용해 기록한 것이다. 어렵게 독일까지 왔으니 학술대회 마치고 바로 들어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별 생각 없이 유람이나 하면서 유유자적할 수도 없다.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니 기록을 하면서 다닐 수밖에 없다. 나는 이것을 공적 여행이라고 부른다. 내 자신에겐 약간의 학대다. 호텔방에서 어둔 등불 아래 글을 쓴다는 게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눈이 아파 몇 번이나 포기했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뭔가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기록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을 만든 이가 바로 나다.

 


학술대회가 열리는 콘스탄츠 대학에서 본 보덴제


콘스탄츠 대학에서 보덴제를 배경으로 한컷!

 


성실한 법학자들의 모임 콘스탄츠 학술대회

 

20년 전부터 한양대 법과대학(현 법학전문대학원)은 일본 오사카의 칸사이대 법학부와 매년 정기 교류회를 갖고 있다. 서울과 오사카를 오가며 양국의 교수들이 우의를 다지며 학문적 성과를 교류하는 것이다. 이런 모임이 14년 전부터는 독일 남부 콘스탄츠 대학 법학부와 3국 학술대회로 발전했다. 우리 학교가 콘스탄츠 대학 간에 자매결연을 맺어 칸사이 대학을 참여시켜 3국 학술대회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 모임은 한일 간의 학술대회와는 별도로 2년에 한번 씩 서울, 오사카, 콘스탄츠에서 교대로 열린다.

 

나는 교수로 부임한 이후, 한일 학술대회엔 거의 빠짐없이 참여했지만, 3국 학술대회는 제대로 참여해 보지 못했다. 이유인즉, 이 학술대회 공식 언어가 독일어이기 때문이었다. 독일어를 배운 지가 거의 40년이나 되고, 내가 공부하는 영역이 독일법학과 크게 관계가 없다보니, 독일어로 하는 학술대회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 왔던 것이다. 일단 참여한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러다가 최근엔 독일어 사용자가 줄다보니 영어 사용자도 참여를 권유받게 되었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지난 20년 이상 영어로 해외에 나가 발표를 하고 토론을 했으니, 그거야 못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 올해 교류 학술대회엔 일찌감치 지원을 해 놓은 것이다. 물론 속마음이야 학술대회 보다는, 그것을 기화로 독일남부 여행을 하고 싶은 생각도 한편에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도 하고 여행도 한다!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 격 아닌가!

 


학술대회는 첫날은 콘스탄츠 대학에서, 나머지 이틀은 콘스탄츠 구도심에 있는 옛날 시청사인 라트하우스 홀에서 열렸다.



한 학기 내내 시간이 있을 때마다 발표문을 썼다. 나는 최근 한국에서 일고 있는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에 기초하여 테마 하나를 정했다. ‘검사와 경찰의 바람직한 관계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문제만을 정리해서 소개하는 것은 3국 학술대회에 적합지 않다. 무엇보다 서로가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를 정해야 하고 그것을 비교법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이런 학술대회에선 필요하다. 그래야 서로 토론이 가능하다. 내가 정한 주제는 3국이 검토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검사라는 제도가 프랑스에서 시작해 독일로 넘어 갔고 그것이 일본을 거쳐 한국에 온 것이다.

 

그런데 한 세기 이상 세월이 흐르면서 3국의 검사제도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영미의 검사제도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참여자들에게 검사의 기능에 대해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것을 제안하는 내용의 발표문을 준비했다. 3국의 검사제도의 공통적 특징은 검사가 수사의 주재자로서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수사 대부분은 경찰이 하고 있지만 그것의 최종적 결정권자이자 지휘자는 검사다. 이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검경간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가.

 

도심 거리에서 보이는 라트하우스 외벽(위)과 학술대회가 열린 건물(아래)학술대회가 열린 건물. 라트하우스는 길거리에서 언뜻 보면 그저 도심의 일반 건물처럼 보이나 들어가면 정원이 있는 큰 건물이다. 입구 건물의 외벽엔 과거 이곳의 역사를 알려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콘스탄츠 구도심에 있는 건물들 중 상당수가 외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추측건대 외벽벽화는 이곳 건축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보인다. 번성기에는 거의 모든 건물들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을 터이니 도심이 매우 아름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 검경은 수직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엔 경찰이 워낙 수준이 낮아 그런 것을 용인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이야 그럴 수가 없다. 당연히 경찰로선 수평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여기에 검찰은 국민의 인권보장을 위해선 현재와 같은 수직적 관계를 고집하고 있다. 과연 독일과 일본은 어떨까? 이들도 우리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가?

 

이런 생각 아래 나는 참가자들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과연 검사가 수사관인가? 검사가 수사관이어야만 하는가? 검사가 수사관이자 기소관이라고 보는 대륙의 전통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영미의 검사제도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장점이 있는 것은 아닌가? 독일은 2백년, 일본과 한국은 백 년 이상 검사 제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질문은 참으로 우리 제도의 근원을 다시 살피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이런 질문에 참가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라트하우스. 입구를 들어가면 저런 건물이 나온다.



3국 학술대회는 3일간 진행되었다. 전체 주제 위기적 상황에 대한 법의 대응에 맞게, 각 전공법률 참가자들의 발표가 준비되었는데, 참여자 중 25명이 각각 1시간씩 시간을 부여받아 발표와 토론을 진행했다. 40여 명의 참여자가 3일 동안 아침부터 저녁시간까지 단 한 명의 이석도 없이 참여했다. 수많은 학술대회를 참여했지만 이렇게 열성적이고 성실한 참여자를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게 독일과 일본 학자들의 특성인가. 공부란, 연구란,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고 엉덩이로 한다는 게 만국의 공통인 모양이다.



필자의 발표 장면

 


나로선 참으로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대부분 참여자가 독일어로 발표와 토론을 하는 지라, 이를 알아들을 수 없는 나로서는 간간이 한국 참여자들로부터 내용을 전해 듣는 정도에서 그치니, 평소 말 많은 나로서는 참기 힘들 정도였다. 정신적 고문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렷다. 그런 고통의 시간 중에 간간히 영어 발표자가 나오면 얼마나 반갑던지... 첫날 마지막 발표자로 연단에 오른 나는 모두에 그 고통을 말했다.



학술대회 중 우리가 저녁식사를 한 번 냈다. 보덴제에서 라인강이 시작되는 지점에 뷔르츠하우스라는 멋진 식당에서 진짜 독일 음식을 맛보았다. 맨 아래 음식은 내가 먹은 돼지 족발 요리 '학사'. 맛도 그런대로 좋았다.


 

내가 평소 얼마나 말이 많은 지 당신들 아는가. 그런 사람이 오늘 너무 과묵했다고. 그리고 중대한 제안을 했다. 앞으로 이 모임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방법이 없으니 영어로 발표하고 토론하자. 더욱 우리나라엔 독일 유학생들이 줄어들어 앞으로 독일어로 발표할 학자들을 찾기 힘들거라는 말까지 했다. 이 말에 독일 학자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독일어를 유창하게 쓰는 한국이나 일본의 학자들의 얼굴도 썩 좋지 않았다.

 

그러나 발표가 끝나고 나나 한 일본 교수가 찾아와 내게 이런 말을 한다. “박교수님, 오늘 정말 말 잘 했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이 학술대회에 참여할 것 같아요.” 알고 보니 이 사람은 미국 유학파였다. 독일어를 못하는 것은 나나 그나 다를 바가 없었다. 역시 유유상종이다.

 

학술대회와 관련해선 내용을 정확하게 캐치하지 못했으니 남의 발표와 토론은 길게 쓸 게 없다. 다만 내 주제에 대해 그들과의 대화(영어로!)를 통해 느낀 결론은 이것이다. 제도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지 않지만 양국의 검사와 경찰 간의 관계는 우리와 사뭇 달라 보였다(물론 이 정도야 이미 자료로 확인한 바다). 듣던 대로 협력적 관계가 비교적 잘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제도는 유사한데 현실은 크게 다르다? 아무래도 문화적 요인이 크다.

 

독일의 경우엔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상석이 없을 정도로 평등한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우리 같으면 헤드 테이블을 만들어 모임의 중심인물을 대우하는 데, 이들에겐 그런 격식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정면에서 물어 보았다. “정말 당신들은 헤드 테이블이 없는가?” 내 옆의 콘스탄츠 교수가 답을 한다. “ 우리에겐 그런 문화는 없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이런 문화가 검경 간에도 있는 것이다. 경찰이 검사에게 수사 지휘를 받는다 해도 그것은 법 규정에 따른 것이지 인격에 대한 지휘가 아니다. 일이 다를 뿐이다. 수사지휘를 받는다고 해서 검사가 자신의 상관은 아니다. 이것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우리의 검경 수사권 갈등을 푼다는 게 정말로 쉽지 않다. 독일과 같은 문화가 없는 우리에게 독일의 협력관계를 기대할 수 없다. 문화가 없으니 법률을 만들어 강제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그게 최선의 답은 아니지만. 발표와 토론을 하면서 내내 내 마음을 짓누른 것은 상이한 문화와 전통에서 오는 충격이었다.


 

학술대회를 마치고 참석자들이 라트하우스 홀에서 증명사진을 남겼다.



3일 간의 학술대회는 콘스탄츠 대학과 도심(올드 타운)의 옛날 시청사(라드하우스) 홀에서 열렸는데 참으로 격조가 있었다. 바로 이런 것이 유럽인, 그중에서 독일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 온고지신이라고나 할까. 5백년 넘는 고색창연한 건물에서 학자들이 모여 발표와 토론을 한다고 상상해 보라.

 

선인의 업적이 그대로 현대의 학자들에게 이어지는 장면이다. 발표장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는 독일인들이 만든 근대문명의 이기들... 보는 것만으로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수백 년의 전통을 이렇게 완벽하게 이어 받는 이들... 학문에 자존심이 없을 수가 없다. 아무리 미국이 세계를 재패했다고 해도 그들이 이런 장면을 보면 고개를 숙인다. 돈으로 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2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