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고독과 슬픔 34

일요단상 -2500년 전의 은혜, 배은망덕의 전쟁-

일요단상-2500년 전의 은혜, 배은망덕의 전쟁- 미국이 이란 핵시설을 폭격했다고 한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확전되는 것 같다. 21세기에도 이런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도무지 비현실적인 전쟁이다.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 포로에서 해방된 것은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창시자인 고레스(키루스) 대왕의 은혜 덕분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부르며 성경에 찬미까지 남겼다. 이란, 곧 페르시아는 유대 민족에게 역사적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민족이었다.[이사야서 45장 1절: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왕들의 허리를 풀며..

기억이 내 자존심이었다

기억이 내 자존심이었다 나는 기억력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대학 시절, 강의실에서 나는 거의 메모를 하지 않았다.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강의가 끝나면 조용히 자리에 앉아 그것을 하나하나 되살려냈다. 그렇게 복기한 내용을 정리해 노트에 옮겼다. 친구들은 놀라워했고, 나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생각해 보니 기억력이 내 자존심이었다.강의를 하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나눈 말과 논점을 또렷이 기억하는 일. 메모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건, 나의 뇌가 얼마나 정직하고 튼튼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기억은 나를 이루는 방식이었고, 그 자체가 나의 신뢰였고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요즘, 그 자존심에 심각하게 금이 가고 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한 지 오래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있는가 하면, 잠이..

귀차니즘이 나를 지배한다

귀차니즘이 나를 지배한다 주변에 80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여러 모임에 곧잘 참석하는 선배 변호사님이 몇 분 계신다. 그 분들 중 한 두분은 얼마 전 우리 딸 결혼식에도 오셔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셨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요즘 나는 그분들을 연구 중이다. 그분들이 존경스럽다, 아니 부럽다. 어떻게 하면 나보다 20세나 많은 연세에도 사람들을 그렇게 열심히 찾고 같이 즐길 수 있을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엔 이런 말에 익숙치 않은 분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 그게 뭐 대수냐고? 사람이 사람을 찾고 함께 즐기는 것이야 당연한 게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미안하지만, 자신이 아직 젊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에, ..

빈 둥지의 오후

빈 둥지의 오후 두 딸이 떠났다. 오늘 아침 작은 아이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오후가 되자 동생 결혼식 참석 차 왔던 큰 아이는 사위와 함께 일터인 미국으로 떠났다. 며칠 전 아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집안은 딸과 엄마의 수다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가끔 번짓수를 잘못 찾은 나의 썰렁한 말 한마디가 분위기를 깨긴 했어도 그것은 그냥 내 평범한 일상이었다. 갑자기 집안이 휑한 게 기분이 묘하다. 묵은 체증이 뚫린 듯 시원하기도 하지만 아쉬운 마음에 가슴이 아려온다. 어제 식장에서 어떤 친구는 이제 아이들에게서 졸업하니 얼마나 좋으냐고 덕담을 했다. 웃으면서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지만 마음 한구석은 이미 고독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첫 아이를 낳고 37년이 지나니 내게도 이런 날이 왔다. 좋은 아빠가 되..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하늘 나라로 가신지 5년이 넘었다. 아버지는 2019년 5월 신록이 녹음으로 바뀔 무렵 가족 곁을 떠나 어머니 곁으로 가셨다. 이 글은 불효자가 영전에 바치는 일종의 사부곡(?)이다. 아버지는 89세로 세상과 작별했다. 비록 작고 2년 전에 발생한 암으로 고생을 하다가 가셨으나, 한국 남성 평균수명을 생각하면, 장수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시 국군 장교로 참전한 국가유공자로, 시골 면장을 하다가 70년 대 초 식솔을 거느리고 상경하셨다. 사고무친한 서울에서 이런저런 일을 했지만, 제대로 벌이를 하지 못해 늘 생활고에 시달리셨다. 그런 이유로 슬하에 5남매를 두고서도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못해 평생 가슴에 한을 남기셨다. 그 속에서도 나는 운 좋게 교육을 받았다. 다른 형제의 복을..

나는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가

우연히 한 페친이 올린 글을 읽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그가 최근 책을 냈다는 것이다. 그의 담벼락을 찾아가 보니 바로 내가 아는 그 사람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얼굴은 예전의 그가 아니지만 중후하게 늙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잘 살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인이자 수필가, 걸어 다니는 인문학자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를 안 것이 조금 있으면 40년이 된다. 젊은 시절 강원도 어느 부대에서 그를 만났다. 제대한 뒤 한두 번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어쩌다 보니 차 한잔 같이 마시질 못했다. 그저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었을 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페친의 담벼락에서 그의 소식을 들으니 내 무심함에 미안함을 느낀다. 30년 이상의 시간이 이렇..

가을밤의 넋두리-고독한 삶은 운명인가-

가을밤의 넋두리-고독한 삶은 운명인가- 긴 명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갑습니다. 그렇게 더웠던 염천 지옥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가 심각하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조금 센티한 말을 해야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나이도 먹을 대로 먹었습니다. 과거엔 이 나이가 되면 꽤나 괜찮은 어른이 될 줄 알았습니다. 공부도 남들 하는 만큼 했고, 경험도 크게 부족하지 않으니 경륜과 지혜를 갖춘 선배로서 제법 신나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되었는데도 제 자신은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헛산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한계도 느끼고요. 나이를 먹을수록 고독이란 놈이 저를 더 세게 잡는군요. 집과 연구실..

흔들리는 오후

발걸음이 무겁다. 나는 집을 떠나 강남의 H카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딱히 일이 있어서도 누굴 만나기 위해서도 가는 것이 아니다. 주말 점심을 먹고 나면 의례 가는 곳이 거기이기 때문이다. 몸속에 무슨 자동장치가 박혀 있는지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를 그곳으로 이끈다. 나는 H카페 창가에서 두어 시간 거리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내 삶의 중요 부분이다. H카페에 들어서자 홀은 텅 비어 있다. 가끔 이런 때가 있다. 바리스터 O양이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나는 말 없이 눈인사를 하고 창가에 앉는다. O양은 능숙한 솜씨로 내 전용 카페라테 한 잔을 만든 다음 종을 울린다. “오늘 조금 날씨가 좋지 않네요. 교수님 안색이 좋지 않은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무슨 ..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

3년 공직 생활의 후유증이 꽤 크다. 환갑 넘기고 진갑을 목전에 두니 나이의 무게감도 무시할 수 없다. 겉보기엔 학교 생활에 빨리 적응하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하다. 알게 모르게 무기력증, 우울, 고독이 수시로 찾아온다. 별일 아니려니 생각하고 일부러 잊으려 했으나 그럴 일이 아닌 것 같다. 상태가 어떤지 나 스스로를 관찰해 본다. 무엇보다 사람 만나기가 싫다. 이 증상은 공직으로 가기 전 이미 생겼다. 그것은 아마 교수라는 직업이 준 선물 아닌 선물이었다. 일을 함에 있어 특별히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니 그저 연구실에서 혼자 있는 것에 만족했다. 공직 생활 중에는 공무상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런 중에도 사적 모임은 거의 안 했다. 사적인 모임은 대체로 저녁 시간대에 이루..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https://youtu.be/vir4EHc9qtU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내 피부에 닿는다. 사위는 고요한데 어쩐지 마음이 울쩍하다. 책장을 넘겨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자판을 두드려봐도 글다운 글이 나오지 않는다. 썼다 지웠다가를 반복하다가 유튜브에 들어가니 노래 한 곡이 보인다. 언젠가 정태춘이 바리톤 박정섭과 열린음악회에서 부른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 이 노래를 듣는 동안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세상은 이렇게 고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이렇게 아픈데, 내 삶의 우울함은 하나의 사치다. 이들과 함께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나가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지. 내가 결코 저 육중한 쇳덩이일 수는 없지.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