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고독과 슬픔 28

나는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가

우연히 한 페친이 올린 글을 읽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그가 최근 책을 냈다는 것이다. 그의 담벼락을 찾아가 보니 바로 내가 아는 그 사람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얼굴은 예전의 그가 아니지만 중후하게 늙어가는 그의 모습에서 잘 살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인이자 수필가, 걸어 다니는 인문학자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를 안 것이 조금 있으면 40년이 된다. 젊은 시절 강원도 어느 부대에서 그를 만났다. 제대한 뒤 한두 번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어쩌다 보니 차 한잔 같이 마시질 못했다. 그저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었을 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페친의 담벼락에서 그의 소식을 들으니 내 무심함에 미안함을 느낀다. 30년 이상의 시간이 이렇..

가을밤의 넋두리-고독한 삶은 운명인가-

가을밤의 넋두리-고독한 삶은 운명인가- 긴 명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갑습니다. 그렇게 더웠던 염천 지옥의 계절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가 심각하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조금 센티한 말을 해야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나이도 먹을 대로 먹었습니다. 과거엔 이 나이가 되면 꽤나 괜찮은 어른이 될 줄 알았습니다. 공부도 남들 하는 만큼 했고, 경험도 크게 부족하지 않으니 경륜과 지혜를 갖춘 선배로서 제법 신나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되었는데도 제 자신은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헛산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한계도 느끼고요. 나이를 먹을수록 고독이란 놈이 저를 더 세게 잡는군요. 집과 연구실..

흔들리는 오후

발걸음이 무겁다. 나는 집을 떠나 강남의 H카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딱히 일이 있어서도 누굴 만나기 위해서도 가는 것이 아니다. 주말 점심을 먹고 나면 의례 가는 곳이 거기이기 때문이다. 몸속에 무슨 자동장치가 박혀 있는지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를 그곳으로 이끈다. 나는 H카페 창가에서 두어 시간 거리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내 삶의 중요 부분이다. H카페에 들어서자 홀은 텅 비어 있다. 가끔 이런 때가 있다. 바리스터 O양이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나는 말 없이 눈인사를 하고 창가에 앉는다. O양은 능숙한 솜씨로 내 전용 카페라테 한 잔을 만든 다음 종을 울린다. “오늘 조금 날씨가 좋지 않네요. 교수님 안색이 좋지 않은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무슨 ..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

3년 공직 생활의 후유증이 꽤 크다. 환갑 넘기고 진갑을 목전에 두니 나이의 무게감도 무시할 수 없다. 겉보기엔 학교 생활에 빨리 적응하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하다. 알게 모르게 무기력증, 우울, 고독이 수시로 찾아온다. 별일 아니려니 생각하고 일부러 잊으려 했으나 그럴 일이 아닌 것 같다. 상태가 어떤지 나 스스로를 관찰해 본다. 무엇보다 사람 만나기가 싫다. 이 증상은 공직으로 가기 전 이미 생겼다. 그것은 아마 교수라는 직업이 준 선물 아닌 선물이었다. 일을 함에 있어 특별히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니 그저 연구실에서 혼자 있는 것에 만족했다. 공직 생활 중에는 공무상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런 중에도 사적 모임은 거의 안 했다. 사적인 모임은 대체로 저녁 시간대에 이루..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https://youtu.be/vir4EHc9qtU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내 피부에 닿는다. 사위는 고요한데 어쩐지 마음이 울쩍하다. 책장을 넘겨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자판을 두드려봐도 글다운 글이 나오지 않는다. 썼다 지웠다가를 반복하다가 유튜브에 들어가니 노래 한 곡이 보인다. 언젠가 정태춘이 바리톤 박정섭과 열린음악회에서 부른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 이 노래를 듣는 동안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세상은 이렇게 고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이렇게 아픈데, 내 삶의 우울함은 하나의 사치다. 이들과 함께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나가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지. 내가 결코 저 육중한 쇳덩이일 수는 없지.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일..

찻잔 속 미풍

언제나 주말 오후 되면 강남 어느 카페 창가에 앉아 진한 카페라테 한잔 앞에 두고 창밖 내다보니 분주히 걸어가는 사람 쏜살같이 내달리는 자동차 쏟아지는 햇빛 눈부셔 잠시 눈감았더니 꿈인지 생시인지 청바지 장발 청년 수줍은 여인 손잡고 걸어가네 저 모습 어제같은데 어느새 사십여년 훌쩍 마음 속 낭만 여전히 바람되어 불어오나 한물간 사람 탄식에 묻혀 찻잔 속 미풍이 되다 (2023. 4. 2.)

환갑을 맞는 새벽단상

할많하않. 하고 싶은 말은 쌓여 있지만 하지 않는다. 이런 자세로 지난 2년 반을 지내왔다. 그 사이 정권이 교체되었다. 공직에 있는 사람이 대중들에게 정치적 상황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 말과 글을 자제해 왔다. 아쉬운 것은 많지만 후회는 없다. 바쁘게 보냈다. 인생에서 이렇게 분주하게 보낸 적이 없다. 거의 매일 자료를 읽고 또 읽었다. 좀 더 완벽한 결정문을 만들기 위해 사무처 초안을 다듬고 또 다듬고 때론 그 정도로는 안 된다 싶을 때는 아예 새로 쓰기 위해 자판을 두드렸다. 일주일이면 3-4회 회의실에서 몇 시간씩 마라톤 회의를 진행했다. 사건을 처리하는 소위원회는 4시간이 기본이고 때론 5시간, 아니 그 이상을 넘기기도 한다. 회의가 아무리 길어져도 중간에 쉬는 ..

상중 독백

저의 형 박형운이 지난 토요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타까운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3일간 빈소를 지키면서 후미진 복도 의자에 앉아 형을 생각하며 독백하듯 글을 써나갔습니다. 제 마음을 추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장지를 다녀와 지난 3일을 복기하면서 글을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사적인 글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이 좋은 일인지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형을 추모하고 싶습니다. 2019년 8월 10일 새벽 4시 조용히 형을 부릅니다. 이젠 의식 없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형, 불러도 대답 없는 형. 이제 몇 시간이 지나면 형을 영영 볼 수 없습니다. 고통 속에서 지낸 형을 이제 영원히 안식할 곳으로 보내드리려 합니다. 형,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63년 살면서 사람대접 제대로 못 받았지요. 공부하지 못한 죄, 가난..

새벽을 여는 이야기

지금 시간 새벽 4시 한잠 자고 나니 머리가 맑다. 어젠 하루 종일 우울한 기분으로 보냈더니 밤이 되자 머리까지 아팠다. 어제 아무 일이 없었다면 나는 밤비행기를 타고 지금쯤 필리핀 클락 공항에 도착해 제부가 모는 차로 동생 집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어제 오전 조카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시내 백화점에 나갔다가 가족 단톡방에 문자 하나가 올라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형수가 올린 것이었다. “형이 위독해요.” 형은 이미 작년부터 몇 번 위기를 넘겼다. 지난 5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위급한 상황이 왔다. 고비를 넘기기 힘들 것이라 생각해 가족들은 마음 준비를 했었다. 그런데 용케 그 위기를 넘겼고 그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5남매 중 누구도 부모보다 먼저 가지 않았으니 최소한의 효도는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