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서울 이곳저곳 12

아련한 추억을 찾아-중부건어물 시장 탐방기-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나 혼자만의 산책시간을 가졌다. 오늘 간 곳은 을지로 4가 근처, 중부건어물시장(중부시장).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아주 먼 옛날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1973년 충청도 벽촌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말 그대로 서울은 가까운 친척 하나 없는 사고무친한 곳. 아버지는 한국 전쟁 시 장교로 참전했고 전쟁 후엔 시골 면장을 하신 분이다. 나름 자존심이 센 분임에도 피치못할 이유로 식솔을 거느리고 낯선 서울 땅을 밟았다. 먹고 살기 어려워도 아버지 성품으론 감당하기 힘든 일이 장사다. 그런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와 처음 손을 댄 일이 도심 한 가운데 건어물 시장에서 마른 멸치를 파는 것이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군대시절 친구 중 한 분이 멸치로 유명한 통영 출신이었던 모양이다. ..

너무 늦은 세운상가 탐방기

어쩌다 공무원이 되니 하루하루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역시 교수에 비하면 일과가 빡빡하고 좀처럼 나홀로 시간을 갖기 어렵다. 그래도 점심 산책만은 바꾸고 싶지 않은 내 삶의 버릇이다. 직원들과 밥을 같이 먹고 나면 의례 홀로 산책 시간을 갖는다. 하루는 명동의 이곳저곳을, 다음 날은 충무로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빈다. 코로나 시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지를 매일같이 목격한다. 오늘은 모처럼 혼밥을 했다. 갑자기 점심 약속이 취소되니 어찌나 반가운지(ㅎ ㅎ) 1년 전 내 모습으로 돌아가,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 국수 한 그릇과 김밥 한 줄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니, 산책할 시간이 넉넉하다. 오늘은 어딘가를 가고 싶다. 발 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곳은 세운상가..

서울의 새로운 명소 ‘문화비축기지’

서울의 새로운 명소 ‘문화비축기지’-세계수준의 문화 도시의 가능성을 보다- 문화비축기지 T6 오늘 모처럼 문화도시 서울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상암동 ‘문화비축기지’에서 말이다. 서울시 인권위원 자격으로 그곳에서 열린 인권관련 회의에 참석했다가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문화비축기지 전체를 돌아보았다. 아마 이곳에 대해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곳은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바로 건너편 야트막한 산자락(매봉산)에 위치한 문화공원이다. 지하철 6호선 월드컵 경기장 역에서 내려 경기장으로 나가 서문 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멀리 원통 모양의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거기가 이곳 '문화비축기지'. 경기장 옆 큰 길을 건너 그 건물 쪽으로 발길을 재촉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T6, 문화비축기..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을 찾아 -한 가문에 빚진 마음을 갖다-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을 찾아 -한 가문에 빚진 마음을 갖다- 금요일 오후 연구실을 나섰습니다. 마음이 조금씩 흥분되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가보았어야 할 곳이기에 때 늦은 방문이지만 좋은 기회가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광화문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세 정거장을 가니 효자동. 박근혜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시민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정거장에서 도보로 3백 여 미터를 걸어가니 목적지에 닿았습니다. 어딜까요?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 .기념관을 들어가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철우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지인이지만 이곳에서 만나니 기분이 특별합니다. 이 교수는 우당 선생의 증손자입니다. 이번 방문은 지난 번 제가 이곳에 포스팅한 ‘한 가문을 넘어 모든 이의 역사가 된 가문 이야기..

역사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다

역사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다-기억, 그것은 산 자의 의무- 남영동 경찰청 인권센터(구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87년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31년이 지났지만 나는 그 사건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나는 사법연수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바로 몇 달 전 가을 결혼을 했으니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을 때다. 연수원을 졸업하면 바로 군대에 가야 할 처지니 마음은 신숭생숭. 하지만 살아 온 인생 중 가장 여유가 있을 때였다. 그러던 중 1월 어느 날 박종철이 죽었다. 조사 중 고문을 받다가 죽은 것이다. 경찰 수뇌부가 필사적으로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지만 뜻한 대로 되지 않았다. 하나하나 진실이 드러났고 그것은 민주화 열기로 이어져 분노의 정점을 향해 달렸다. 박종철의 죽음과..

40년 전으로의 여행

40년 전으로의 여행 점심을 빨리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11시 반쯤 연구실을 나섰다. 혼밥을 하는 날은 이렇게 일찍 식당에 가야 주인 눈총을 덜 받는다. 오늘은 오랜만에 학교 뒤 사근동으로 향했다. 그곳 명희네 집에서 칼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근처 베이루트에서 즐겨 마시는 카페 라테를 주문했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사근동 거리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사근동에서 지대가 높은 한양대 부속고등학교 쪽에서 바라다 보는 사근동, 한양대 뒤에 있는 후미진 동네다. 나는 그 때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가 처음 서울에 온 날, 처음으로 학교에 간 날, 학교에서 시골 촌뜨기가 처음 맞이했던 그 황망했던 일... 그게 정확히 44년 전 일인데... 커피를 한 잔 하고 내가 이곳 사근동에 처음으로 ..

도심 속의 쉼터, 서울성공회대성당

도심 속의 쉼터, 서울성공회대성당 성당 입구 에서 본 성당 전체 모습, 이중벽체의 로마네스크식, 영국 성공회 교회에서 자주 보는 중앙탑이 보인다. 빨리 정치의 계절이 갔으면 좋겠다. 눈만 뜨면 문모닝, 안모닝... 나 자신도 그 속의 일부가 되어간다. 마음이 편치 않다. 내 영혼 속의 평화를 언제 찾을 수 있을지... 시청 근처에서 회의가 있어 나가는 길에 성공회 서울대성당을 들렀다. 가끔 가보는 곳이지만 찬찬히 성당 전체와 그 내부를 본 적이 없다. 오늘은 한 번 이 성당을 제대로 보리라. 주변을 둘러보고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아, 도심 속에 이런 별천지가 있다니! 이곳은 성소이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도심의 쉼터다. 성당 뒤 앱스 성공회는 영국의 국교회라고 하는 Anglican Church 가 한..

살곶이 다리에서

살곶이 다리에서 서울 사는 사람 중에서도 이 다리를 모르는 이가 많다. 살곶이 다리. 한양대학교 캠퍼스 바로 옆으로 청계천과 중랑천이 흐른다. 이 두 개의 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한강 쪽으로 200여 미터 더 내려오면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돌다리가 있다. 그게 바로 살곶이 다리다. 성동교에서 바라다보는 살곶이 다리. 왼쪽 건물이 한양대 FTC 건물이고, 오른쪽 도로가 동부간선로이다. 조선시대 살곶이 다리는 저 다리 중 왼쪽 부분만이다. 오랜만에 점심을 먹고 산책에 나섰다. 성동교를 건너다가 살곶이 다리가 눈에 들어와 한참을 바라다보았다. 갑자기 머릿속에선 40년도 훨씬 넘은 흑백 필름이 돌아가고 있었다. 때는 1973년.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나는 저 충청도 두메산골에서 서울이란 곳으로 올라왔다. 우리..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을 다녀오다

전동성당 내부,3랑식인데 좌우의 측랑과 중심부의 천정은 완벽한 반원형 볼트다. 볼트엔 벽돌로 된 리브가 지난다.전동성당의 내부를 언뜻 보면 약현성당과 유사하지만 조금만 유심히 살피면 금방 다름을 알 수 있다. 우선 내부의 측랑을 이루는 아치형 기둥과 천정으로 이어지는 보는 일종의 이중벽체나 마찬가지다. 이 벽체 위의 지붕은 2계단 지붕 중 아래 것에 해당한다. 중앙 네이브(중심부)의 천정 볼트도 약현성당과는 달리 완전한 반원형이며, 잘 보면 검은 리브가 지나가고 있는 데, 이것도 약현성당과는 달리 벽돌로 되어 있다. 중심부의 지붕은 2계단 지붕 중 위에 것에 해당한다.(2015. 12. 13)

서울의 마지막 낭만, 내 사랑 사근동

청계천 판자촌은 지금 이렇게 변했다. 한양대 근처 청계천의 모습이다. 나는 사근동을 올 때마다 이 마을의 미래를 생각한다. 이 마을과 오랜 인연을 가진 이의 최소한의 책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마을이 현재 모습을 간직한 채 앞으로도 계속 가야 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거듭나도록 무언가를 바꾸어야 할지. 이 마을을 바꾼다면 어떤 식으로 바꾸어야 서울에서 가장 유니크한 마을을 만들어 이곳과 인연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큰 행복을 안겨줄지... 이런 것들이 내 고민 중 하나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혹시 이곳 와 보신 분들, 사근동의 장래는 어때야 할 것 같습니까? 서울의 마지막 낭만을 살리면서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