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서울 이곳저곳

너무 늦은 세운상가 탐방기

박찬운 교수 2020. 12. 7. 21:42

어쩌다 공무원이 되니 하루하루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역시 교수에 비하면 일과가 빡빡하고 좀처럼 나홀로 시간을 갖기 어렵다. 그래도 점심 산책만은 바꾸고 싶지 않은 내 삶의 버릇이다. 직원들과 밥을 같이 먹고 나면 의례 홀로 산책 시간을 갖는다. 하루는 명동의 이곳저곳을, 다음 날은 충무로의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빈다. 코로나 시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지를 매일같이 목격한다.

오늘은 모처럼 혼밥을 했다. 갑자기 점심 약속이 취소되니 어찌나 반가운지(ㅎ ㅎ) 1년 전 내 모습으로 돌아가,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 국수 한 그릇과 김밥 한 줄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니, 산책할 시간이 넉넉하다. 오늘은 어딘가를 가고 싶다. 발 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곳은 세운상가. 이곳을 둘러보는 것은 내겐 오래된 숙제나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50여 년을 살면서도 세운상가를 찬찬히 둘러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곳의 건축에 대해 종종 신랄하게 비판을 해왔다. 역사도시라고 자랑하는 서울 한 가운데에 어떻게 이런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만들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가벼운 미학에 혀를 찼다.

세운상가 건물군 중 한 상가 이름이 세운상가다. 이 사진은 종로 쪽이 아닌 청계천 방향에서 찍은 것이다. 건물 양쪽에 공중 데크가 설치되어 있어서 차도와 관계없이 퇴계로까지 걸어갈 수 있다(현재는 대림상가까지).

더욱 이 건물을 디자인한 김수근이 만든 다른 건축물을 기억하면 세운상가는 독재의 상징물에 불과했다. 그가 설계했다고 한 남영동 대공분실, 거기에서 박종철이 죽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서초동 법원청사, 그것은 얼핏 보아도 시민의 삶과는 동떨어진 권위주의 그 자체다. 내게 세운상가는 남영동 대공분실이자 서초동 법원청사에 다름 아니었다.

세운상가가 시작되는 지점, 종묘 바로 건너편에서 세운상가는 시작된다. 이 광장은 원래 현대상가가 있었던 자리에 만들어졌다. 

이런 평가는 나만의 독단이 아니다. 세운상가가 세워질 무렵 서울시에서 도시계획을 담당했던 한 공무원의 소회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손정목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전 5권, 이에 대해선 나의 별도의 독후감이 따로 있음)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우선 김수근에 대한 그의 기억을 보자.

  “나는 건축을 깊이 알지 못하지만 김수근을 예술가라고 생각해본 일은 없다. 그가 설계한 작품 중 내가 좋아하는 건축물이 적지 않게 있기는 하나 그를 만날 때마다 느꼈던 그 강한 속기(俗氣)가 끝내 그를 예술가라고 생각하게 해주지 않았다. 그는 예술가이기에 앞서 다재다능한 사업가였다고 생각하고 싶다.”(제1권 142-143).  

세운상가에 대한 그의 평가는 어땠을까? 손정목의 비판은 여전히 혹독하기 그지없다. 몇 가지 세간의 비판을 소개하지만 그중에서도 역시 정점은 이 부분이다.

  “(네 번째의 비판은) 그것(세운상가)이 남북방향으로 긴 건물군이라는 점이다. 남산 위에 올라가서 서울시가지를 내려다보면 시가지의 주된 맥이 청량리-광화문-신촌 마포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뚜렷이 알 수가 있다. 이 동서방향의 시가지 흐름의 중심부에 남북방향으로 건물군이 들어서서 흐름의 선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용납될 수가 없다.... 김 시장(김현옥)의 제안에 겁도 없이 뛰어든 ‘김수근 일생일대의 실수’였다고 생각한다.”(제1권 282-283)

이런 이유로 오랜 기간 나의 발걸음은 이곳을 향하지 못했다. 그저 먼발치에서 흉물스런 건물을 보며 하루빨리 철거를 기원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곳을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게으름이다. 이제라도 찬찬히 세운상가를 둘러보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세운상가의 공중데크, 이 길을 걸어가면 퇴계로 3가 대한극장이 보이는 진양상가에 닿을 수 있다. 현재는 일부구간만 가능. 코로나 사태로 점심 시간인데도 인적이 드물다. 데크 오른 쪽엔 세운상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관이 만들어져 있다.

세운상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빌딩이다. 정확히는 종묘 앞 종로3가에서 퇴계로 3가를 남북으로 잇는 주상복합 건물군을 통틀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1966년부터 몇 년 간 속도감 있는 공사로 1970년 대 초 8개의 건물(현대상가, 세운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호텔, 신성상가, 진양상가) 이 탄생한다.

원래 이곳은 일제 말 미군 공습을 대비해 화재 연소를 막기 위한 공터였다고 한다. 해방 후 이곳에 하나 둘 무허가 건물이 들어서고, 한국 전쟁 후엔 피난민까지 밀려온데다 집창촌까지 만들어지니, 수도 서울의 명암이 교차하는 도시 슬럼가의 대명사가 되었다.

과거의 풍전호텔, 현재는 이름이 바뀌어 PJ호텔이다. 올해로 창업 50년이 되었다. 세운상가 건물 중 리모델링을 통해 새롭게 탄생했다.
PJ호텔에서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또 다른 세운상가 건물이 보인다. 신성상가, 건물 외벽에 신성아파트라고 써 있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서울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이 일대는 일거에 철거되는 운명을 맞는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도시 재개발 사업인데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김수근이 이곳에 남산과 이어지는 주상복합형 아파트를 만들어 서울 도심을 완전히 변모시킨다.

빌딩의 하부 몇 개층은 상가가, 그 이상은 고급 아파트가 들어섰다. 서울의 돈 있는 사람들이 마치 파리시내의 세느강변 아파트에 산다는 착각을 하면서 모여들었고, 솜씨 있는 기술자를 거느린 수백 수천의 상인들이 이곳에 들어와 빼곡하게 전자상가를 만들었으니, 70-80년대 이곳은 서울 최고 부촌이자 최고 상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운상가 공중데크에서 보이는 청계천, 주변은 한참 재개발 중이다.

그런 세운상가에 변화가 온 것은 강남개발이 가져 온 여파다. 돈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이곳을 떠나 강남으로 이사를 갔다. 80년대엔 용산에 대규모 전자상가가 만들어지면서 상권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건물은 낡아가고 투자는 없으니 이곳을 찾는 이는 줄어들었다. 서울도심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가다가 2000년대에 이르러 지방자치 시대가 되니 새로 뽑히는 시장마다 이곳을 탈바꿈시키겠다고 장밋빛 공약을 내놓는다.

PJ 호텔과 신성아파트 인근 골목은 우리나라 인쇄산업의 메카다. 비록 전성기는 지났다고 하지만 지금도 이곳엔 수 백 개의 인쇄소가 골목을 꽉 채우고 있다.


오세훈 시장은 이곳을 과감히 철거해 녹지화하고 주변 지역엔 마천루 빌딩을 짓는 재개발 계획을 발표한다. 그러나 상인들의 반발과 경기침체로, 세운상가 초입의 현대상가 하나만 철거한 상태에서 계획은 표류되었고, 그런 중 시장 직을 내놓는다.

그 뒤를 이은 박원순 시장은 오시장의 계획을 원점으로 돌리고 새로운 발상으로 이곳을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원형을 보존하는 도시재생사업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서울역 앞의 고가도로를 공중공원화 하듯, 그는 이곳도 공중데크로 상가를 연결해, 남산으로 이어지는 보행로를 만든다. 현재 이 사업은 세운상가-청계상가-대림상가까지 완공되었고 조만간 전 상가가 보행로로 이어지도록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세운상가 주변은 현재 공사 중이다. 몇 년 후 이곳은 도심 마천루로 탈바꿈 될 것이다.

오늘 세운상가를 돌아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오랫동안 생각해 온 세운상가 철거는 이제 접을 때가 되었다. 흉물스런 콘크리트 건물도 서울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뜯어서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가꾸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원순의 안목이 높았고 그가 결정한 것이 맞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몇 년 후 세운상가 주변은 21세기 빌딩숲으로 탈바꿈할 것이고 그 가운데에 공중 데크로 이어진 고풍스런 주상복합 건물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 서울 도심은 비로소 선진국 도시로서의 품격을 갖게 될 것이다.

현재 공중데크는 대림상가까지 완공되었고 계속 공사 중이다. 계획에 의하면 올 중으로 나머지 상가가 모두 공중데크로 이어진다고 했지만 공사진행 속도로 보면 내년에나 완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