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복지

<세월호>와 <카트>에 줄 수 있는 대답은?

박찬운 교수 2015. 9. 27. 17:50

<세월호>와 <카트>에 줄 수 있는 대답은?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이야기를 종료한 후 당분간 안거에 들어가고자 했다. 머리도 식히고 생각도 정리할 겸... 그런데 일요일 새벽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금요일 어느 모임에서 <세월호> 관련 동영상을 보았다. 어제는 오랜만에 극장에 가 <카트>를 보았다. 연이틀 눈시울을 적셨다. 극장에선 많은 관객들이 소리 없이 우는 소리가 상영 내내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국민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 국민의 생존도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 그것이 국가의 실존이라면, 굳이 대한민국이라는 배에 우리가 승선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는 좋으나 싫으나 우리의 운명이라는 철지난 국가주의적 사고로 이 모든 것을 덮으려 하지 말자. 생각 같아서는 나부터 당장이라도 한바탕 저주를 퍼부으며 이 배에서 하선하고 싶다.


<세월호>와 <카트>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은 어떤 사회인가. 탐욕스런 자본의 나라다. 모든 것은 돈의 논리로 환원되는 비정한 사회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정글이다. 오로지 센 놈, 그것도 비열한 놈만이 경쟁이란 이름하에 살아남는 사회다. 자기보존과 자기생존이 지상과제인 사회다. 남을 배려하거나 함께 사는 것보다는 오로지 나와 내 자식의 삶만을 위해 사는 초 절정 이기주의의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국가는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탐욕스런 자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존재다. 정글의 피 튀기는 투쟁을 경쟁이란 이름으로 미화하여 전 국민을 노예화한 존재다. 비열하고도 비정한 자들이 그들만의 굿판을 벌일 때 그 뒤를 지켜주는 보디가드, 바로 그게 이 나라의 존재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생명은 귀중하지 않다. 인간의 존엄성? 이런 말은 종이 위에서나 춤추는 말장난이다. 세월호와 같은 비극은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작은 세월호는 매일같이 일어나지 않는가. 카트? 이 나라 절반의 노동자가 파리 목숨이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그럼에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찍소리 한번 못 내고 산다. 이것은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나 자신이 어려운 과거가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질곡에 내 자신을 함몰시키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다. 생존을 넘어 고상한 정신세계를 추구해 온 사람이다. 이 정글의 사회에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했고, 그림을 좋아했으며, 빈센트 반 고흐를 추억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부끄럽다. 그 모든 것이 가식이고 위선이란 생각이 든다. 너는 살만하니, 너는 배울 만큼 배웠으니 그런 여유를 부리냐? 이런 질문에 답할 길이 없다. 이젠 그런 나의 삶을 포기할지 용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다. 남이 불행한데,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게 나의 최소한의 양심이다.


이 비정한 사회에 희망이 있는가? 나는 이 아침 내 자신에게 물어본다.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 인간의 존엄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 자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사회를 비정한 정글에서 구해 사람과 사람이 연대하는 사회로 만들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복지다. 이것만이 살 길이다. 국민의 삶을 결핍의 공포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인간이 필요한 최소한은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은 해방되고, 사회는 숨통이 트여, 우리는 다른 가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는 그것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당위이자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가치다. 지금 분명한 것은 절대적 부가 부족해 사람들이 불안한 게 아니다. 그 부가 특정계층에게 쏠려 있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이 사회를 북구유럽과 같이 완전히 개조하는 것만이 이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이다. 그런 세상을 위해 증세를 하자! 젊어서 열심히 돈을 벌고, 그 절반을 내놓자. 이웃의 행복과 나의 미래를 위해 내놓자. 그 대가로 노후엔 여유 있는 삶을 살아보자. 예술과 낭만을 찾아가며 존엄하게 늙어가자.


그럼 어떻게 이런 사회를 만들까? 누가 이 총대를 짊어져야 할 것인가. 정치 밖에는 없다, 그래도 그게 희망이다. 정치란 세상을 조정하는 기술이 아닌가. 제대로 된 지도자를 찾아내야 한다. 적어도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나라 미래에 대한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정치인을 찾아야 한다. 그게 누구냐?


내가 그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다음 대선에선, 나는 반드시 그의 선거운동원이 될 것이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다. 치열하게 운동해 그를 당선시킬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를 바꾸어 버릴 것이다. 그것만이 <세월호>와 <카트>에 줄 수 있는 답이다.


《추신》
저는 한 사람의 초인을 그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할 나이도 한참 지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 분노하고, 그것을 뜯어 고치려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자는 겁니다. 그리고 이젠 분명한 방향에 공감하고 동의할 때라는 거지요. 그게 복지입니다. 지도자는 이런 생각을 함께 하는 이들 중에 나타날 겁니다. 초인이 아닌 범인 중에서요.(2014.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