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문학

독서가 취미라고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어보셨습니까?

박찬운 교수 2015. 10. 23. 14:45

서가 취미라고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어보셨습니까?

 


독서가 취미라고요?

당신의 취미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 제 취미는 독서입니다라고 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취미를 중국어로 아이하오(愛好)라고 하니, 독서가 취미라는 분은 분명 책 읽는 것을 즐기고 좋아할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아니, 그는 고통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정신적으로는 마조키스트입니다. 너무 과한 이야기인가요?


 물론 독서 중에는 즐길 수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어떤 책은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약간의 성적 판타지가 있는 책들은 독서 중에도 몸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책을 읽으면서 즐겁다고 한다면 저도 단박에 그렇다고 할 것입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흥분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겁니다.

 

독서는 고통

하지만 제겐 독서는 고통입니다. 제가 읽는 어떤 책도 고통이 따르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책 속에서 지식을 구하는 것도 고통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도 고통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고시공부를 했습니다. 두꺼운 법서를 여러 번 읽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당시 읽었던 법서 몇 권을 보관하고 있는데, 그 중 한 권을 보여드리지요. 민사소송법 교과서인데 11번 읽었다고 표시되어 있군요(민소법을 이 책으로만 공부한 건 아닙니다. 이 책 말고도 몇 회 독 이상 읽은 책이 또 있습니다). 이렇게 책을 읽은 것은 그 속에 있는 내용을 거의 암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즐거움? 물론 모르는 것을 알고 나면 짜릿한 기분이 들지요. 하지만 고통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고통을 매번 느끼면서 법률서적을 읽습니다.


내가 1980년대 초 고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민사소송법 책이다. 책 표지 뒷장에 일독할 때마다 일자를 서 놓았다. 지금 보니 11번을 읽었다. 당시 나는 저 책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 외우려고 했다.


 저에겐 법률서적 뿐만이 아니라 문학, 예술, 과학 등등 제가 손을 댄 어떤 책들도 쉬운 책은 없었습니다. 읽고 나서 뿌듯한 것은 쉴 새 없이 느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히 독서가 즐거웠다고? 독서가 취미라고? 그렇게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인내 없인 읽을 수 없는 책, 로마제국쇠망사, 문명이야기...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영역이 역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역사책을 많이 읽습니다. 최근에 세계 역사와 관련하여 주요한 책이 몇 권 나왔습니다. 에드워드 기본의 로마제국 쇠망사’ 6권이 완역되었는데, 이 책이 어느 정도의 볼륨인 지 아십니까. 대충 계산해보아도 3,500쪽 정도가 됩니다. 이런 책을 어느 누가 다 읽었다 할 것이며, 그것을 읽으면서 즐거웠다고 할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제가 좋아하는 또 한 작가 윌 듀란트의 대작 문명이야기’ 10권도 최근 완역되었습니다. 이건 무려 6,500쪽 분량입니다. 이 책을 어느 누가 다 읽었다 하겠습니까? 그것을 읽으면서 즐거웠다고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을 발견하면 제게 알려 주십시오. 한번 찾아뵙고 스승의 예를 갖추겠습니다.


 단행본은 쉬울까요? 플라톤의 법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권으로 출간되었지만 1천 쪽이 넘습니다. 쉽게 책장을 넘길 수가 있을까요? 천만에요. 한 쪽 한 쪽을 읽을 때마다 머리에서 쥐가 납니다. 내가 과연 몇 쪽을 더 읽고 포기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제게 있어 독서는 삶입니다. 일과 중엔 일이 있으니 어렵지만 자투리 시간(지하철 출퇴근, 화장실...)과 퇴근 후 그리고 주말의 여유 있는 시간은 대부분 독서로 시간을 보냅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逆說呼)하는 마음으로 책을 대합니다만, 고통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얻은 지병이 과민성대장질환입니다. 책을 읽다가 막히는 대목이 나오면 아랫배가 더부룩해집니다.

 

30년 동안 재수, 3수를 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최근 저는 문학서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여러 가지 이유로 소설류를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늘 아쉬웠습니다. 소설은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종횡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 진즉 생각했지만 이제껏 충분히 시간을 내지 못했습니다.


 문학서 중에서도 제가 당분간 시간을 투자하고 싶은 것은 세계고전문학입니다. 제가 이들 문학서를 읽는 것은 그저 스토리를 알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작가와 호흡하면서 읽어 보고 싶습니다. 작가가 무엇을 고뇌했는지를 충분히 느끼면서 읽고 싶습니다. 제 나이나 경험에 비추어 그럴 때가 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학서도 장난이 아니군요. 엄청난 고통이 따라야만 완독이란 쾌감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대학시절부터 읽어보고자 했고 몇 번 읽기를 시도했던 책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완역본을 읽으려면 세 권 1,500쪽에 도전해야 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완역본 두 질, 나는 저 책을 번갈아가면서 완독했다. 지난 30년간의 숙제를 끝낸 셈이다.


 작년엔 민음사 완역본을 읽으려고 큰 맘 먹고 시도를 했지만 2권 째에서 포기했습니다. 번역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어떤 곳은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이 책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올해 도전을 위해 다른 번역본(열린책들) 한 질을 더 구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막히는 곳이 있으면 다른 번역본을 읽으려고요. 정말로 다부진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습니다. 과연 이 책을 완독하는 기쁨을 누렸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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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쉽지 않은 독서를 끝냈습니다. 드디어 해냈습니다! 30년간의 숙원사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전부 읽었습니다!! 눈이 침침합니다. 지난주는 사흘 이상 안구가 아파 고생했습니다.


 어려운 독서를 끝내니 마음은 홀가분하지만 머리는 복잡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하나 둘 머리에 떠오르며 말을 걸어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뒤 천천히 반추하고자 했지만 조급한 마음은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합니다. 오늘 아침 전철을 타고 오면서, 학교에 도착하면 만사를 제키고, 이 글부터 써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까요? 긴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시간도, 능력도 없습니다. 단지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관심 가졌던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그의 삶은 극적입니다. 삶 자체가 소설입니다. 그는 평범한 서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했습니다. 톨스토이처럼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20대엔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다가 결국 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바실리 페로프, <도스토에프스키 초상>, 1872


 급기야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사형집행 직전에 황제의 은전을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 게다가 그는 간질병 환자에 놀음 벽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날의 그의 초상은 이렇게 격정적이었고, 방탕했으며, 황폐했습니다.


 이런 삶이 그의 작품 곳곳에 스며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중에서도 죽기 직전에 쓴 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야말로 그의 삶 전체가 녹아 있는 작품이라는 데에 이론이 없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무엇을 그린 것인가

이 소설은 조그만 소도시에 일어난 친부 살인사건이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에겐 그 사건 자체가 흥미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인간존재의 실상과 영원의 문제인 종교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소설 곳곳에 나타납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초판 첫 페이지, 사진 위키피디아


탐욕스럽고 격정적인 인간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아버지만큼이나 격정적이고 본능적인 인간 큰 아들 드미트리, 지적이고 무신론적 인간 둘째 아들 이반, 순수하고 경건한 신앙인 셋째 아들 알로샤. 이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각기 그린 인간 실존의 전형들입니다. 그들 하나하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삶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신과 연결시켰습니다. 신은 이들에게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요? 과연 신이 축복한 인간은 누구였을까요?


 사실 우리가 읽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구상한 소설의 1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는 원래 2부에 걸친 장편소설을 쓰기로 하고 이 글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2부를 쓰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런 이유인지 그가 서문에서 밝힌 이 소설의 주인공 알로샤가 이 소설에서 주는 메시지는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생각만큼 강력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2부에서 알로샤를 혁명가로 만들어 그를 통해 어떤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할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만일 2부가 완성되었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주는 메시지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카라마조프적이란 말에 대해

이 책을 읽다보면 카라마조프적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제게 이 소설의 키워드 하나를 선정하라고 한다면, 저는 서슴없이 이 단어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만큼 이 단어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의 직접적 뜻은 카라마조프가 사람들 같은이란 의미일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일까요?


 표도르 파블로비치, 드미트리, 이반, 알로샤의 성격을 생각해 봅시다. 이 네 사람의 성격이 하나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한 사람에게서 이 네 사람의 성격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탐욕스럽고, 어떤 때는 동물적이고 격정적이며, 어떤 때는 지적이고 냉철하며, 또 어떤 때는 경건한 사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쩜 카라마조프적인 인물로 상징화할 수 있는 사람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격정적이었고, 한 때 신을 부정했습니다. 때론 도박에 정신을 팔았으며, 간질병으로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아버지와 3형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전 생애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성격을 하나씩 나누어가진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또 어쩜 카라마조프적이란 말은 우리 모두에게도 사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에겐 그런 카라마조프적 기질이 없을까요? 조용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나 나나 다소간 차이는 있겠지만 카라마조프적인 사람들입니다. 누군가 이 질문을 제게 한다면 저는 분명히 말할 것이다. 저도 카라마조프적인 사람이라고.

 

종교에 대해

이 책을 읽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역시 종교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저 기발한 사람들은 사실 모두가 종교적인 인물입니다. 하느님과 한판 씨름을 벌리는 구약의 야곱과 같은 인물들입니다.


 이 책의 신에 대한 이야기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종교에 관한 고백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영원의 문제, 곧 신의 문제이었습니다. 그의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두 인물에 의해 소개됩니다. 한 사람은 알로샤의 스승인 조시마 장로. 그는 순결하고 경건한 인물로서 예수의 삶에 바짝 다가간 인물입니다.


 또 다른 인물은 카라마조프가의 둘째 아들 이반. 그는 일반적으로 무신론자로 알려진 인물로 그의 종교관은 파격적입니다. 이 두 인물 중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은 이반의 신이라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만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조시마 장로의 종교관을 추종했다면 이 소설은 권선징악의 평범한 소설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종교란 그리 단순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씨름해도 승부가 날 수 없는 그런 세계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반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관은 제1권의 마지막 부분 대신문관이란 부분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반의 종교관을 무신론이라고 한마디로 재단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유신론적 무신론자입니다. 그것을 함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대신문관> 바로 몇 쪽 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비록 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점을 알아 둬, 그가 창조한 세계를, 신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야.”(민음사본 제1494)


 이반은 신을 인정합니다. 다만 신이 만든 이 세상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신이 만든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모순에 가득 찬 세상입니다.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불의가 판을 쳐도 공의는 끝내 오지 않는 세상입니다.


 대신문관은 이반이 만들어낸 서사시입니다. 15세기 종교재판이 횡행하던 스페인 세비야에, 예수가 나타나 이적을 행하다가 붙잡혀, 감옥에서 추기경인 대신문관의 신문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저를 사로잡은 대목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자유라는 것과 누구에게나 넘쳐날 만큼의 지상의 빵이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네들끼리 그것을 분배할 능력이 없는 족속이니까! 또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점도 확신하게 될 텐데, 왜냐하면 그들은 나약하고 하찮은 반역자들뿐이니까. 너는 그들에게 천상의 빵을 약속했지만, 다시금 반복하건대, 그것이 약하고 영원히 악덕하고 영원히 배은망덕한 인간 종족의 눈에 과연 지상의 빵에 비길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천상의 빵의 이름으로 수천, 수만 명의 인간들이 너의 뒤를 따른다고 해도, 천상의 빵을 위해 지상의 빵을 멸시할 만한 힘이 없는 수백만 명, 수억 명의 인간들은 어떻게 될까? 너에게는 고작해야 수만 명에 불과한 위대하고 강한 자들이 더 소중하고, 나머지 수백만 명, 약하지만 너를 사랑하는, 바다의 모래알 같은 수많은 인간들은 그저 위대하고 강한 사람들을 위한 재료가 되어야 한단 말이냐? 천만에, 우리에게는 약한 자들도 소중해...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선두에 서서 그들의 자유를 대신 견뎌 줌으로써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에 동의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경외심을 가질 것이며 우리를 신으로 간주할 것이니그리하여 그들에게 있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결국에 가서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민음사본 1533-534)


 위의 말만 가지고서는 대신문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저도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번역판본을 바꾸어(열린책들) 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어렴풋하게 그 의미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우린 예수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대신문관은 그것을 부정합니다. 인간은 그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겐 그런 자유보다는 눈에 보이는 지상의 빵(물질?)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였고, 하느님의 자유를 가장하는 지상의 권력(교회, 교권 등)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런 노예인 인간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나라가 불가능한데 거기에서 어떤 죄가 성립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인간의 실상이자 한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반이 설파하는 무신론의 실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아마 작가 자신도 모를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대신문관>에선 이렇게 표현됩니다.


 노인(대신문관)은 상대방이 씁쓸하고 무서운 말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이든 좀 해주었으면 싶었어. 하지만 그(예수)는 갑자기 말없이 노인에게로 다가와, 아흔 살 먹은 그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는 거야. 바로 이게 대답의 전부야.”(민음사본 제1553)


예수는 대신문관의 그 무지막지한 말에 반론을 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대신문관에게 다가와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이 말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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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짤막하나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해 제 일단의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합니다. 잠이 들면 이반이 보일는지,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드미트리가 보일는지, 아니면 해맑은 미소를 짓는 알로샤가 나타날지 모릅니다.


 오래 동안 묵혀 놓은 숙제 하나를 풀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숙제가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책 더미 속에서 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는 책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냐고 제게 항의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책을 펼칩니다. 고통이자 환희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