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문학

노년, 그 비참함에 대한 반론

박찬운 교수 2017. 10. 3. 18:31

키케로, 노년의 비참함에 대해 반론하다



<키케로의 흉상, 기원후 1세기 중엽 추정, 로마 카피톨리노 박물관 소장, ©Glauco92. 키케로의 흉상은 마치 살아 있는 키케로를 박제한 것과 같이 사실적이다. 역시 로마인들이 만든 이런 흉상은 단순한 예술품이 아니라 돌로 만든 초상화다. 키케로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카이사르와 같이 머리 숯은 적고, 이마는 넓다. 무엇인가 강인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인상이다.>


젊은 시절엔 나이 한 살이 추가되면 기뻣다. 어른 되어 가는 게 뿌듯했다. 지금은? 쓴 웃음만 나온다. 이제 50대 후반을 향해 나아가니 어딜 가도 내가 선배라고 인사할 사람들이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나이가 들어 버린 것이다. 어머님은 십 수 년 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이제 구순을 바라보시는 연세다. 장인 어른은 작년 초 오랜 병상을 이기지 못하시고 소천하셨고 장모님은 간병인의 수발을 받으시며 하루하루를 보내신다. 몇 년 전부터는 대학동기 자녀 결혼식에 참석하고 있다. 그 집 아이나 내 집 아이나 다 같은 또래이니 내게도 이제 발등의 불이다. 자식의 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기가 온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불면의 밤이 많아지는 때다.


생노병사! 이것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주로(走路)이다. 그래서인지 이를 소재로 하는 글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된다. 로마역사에 관한 책을 읽어가다가 이 문제에 대한 2천 년 전의 로마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천병희 교수가 번역한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라는 글이다. 이 글은 천교수가 쓴 <그리스 로마 에세이>(도서출판 숲)에 실린 한 편의 글이다.


말이 나왔으니 천병희 교수에 대하여 한 마디 하자. 이 분은 그리스 로마 원전을 우리 말로 번역해 온 이 분야의 독보적 인문학자이다. 그는 2013년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적 윤리철학서 <니코마코스윤리학>을 출간하였다. 2009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정치학>을 출간한 지 4년 만이다. 이로써 그는 1976년 번역한 <시학>을 출간한 이래 37년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3대 명저 모두를 원전 번역했다. 이 외에도 그는 지난 40여년간 20여 권의 그리스 로마 원전을 우리말로 번역해 옴으로써 나 같은 비전문가에게 희랍문학과 라틴문학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 시대에 이런 인문학자가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천교수님의 그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천병희 교수의 <그리스 로마 에세이>


<노년에 관하여>에서 키케로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현인으로 추앙 받던 대()카토의 음성으로 노년, 곧 늙는다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 내용은 당시 로마에서 유행했던 스토아 철학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듯 하다. 그러니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전제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이해다. 내가 이해하는 한도에서 간단히 이 철학을 설명해 보자.


동서고금을 통해 물질주의 시대에 나타나는 새로운 철학은 정신과 이성 그리고 영혼을 강조한다. 스토아 철학은 원래 알렉산드로스 사후 동서양의 문화가 절충된 세계주의 문화, 헬레니즘 하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 시절 서구는 동서양의 교류로 물질적 영화를 만끽할 수 있었던 사회이었다.


동서양의 온갖 사치품이 동서 교역로를 통해 들어오자 사람들은 이를 구하기 혈안이 되었다. 그러자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척도가 되었다. 물질주의가 팽배해진 것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지식인 사회에서는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물질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물질의 이면을 지배하는 법칙, 진리(로고스), 인간의 육신을 뛰어 넘는 불멸의 영혼이런 것들을 인식하지 않으면 인간은 단지 물질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비참한 존재가 될 것이었다.


고로 세상(물질)은 신적 이성과 일치해야 하며, 인간은 자연과 화합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에 따른다는 말은 결국 신의 뜻에 따른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육체는 일시적이지만 육신을 지배하는 영혼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정념의 노예가 되지 말고 이성과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라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주장했다.


위와 같은 철학이 키케로가 활동한 기원 전 1세기 로마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것은 헬레니즘 시대에 일어났던 것과 같이 로마가 제국화하면서 물질주의가 급격히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과도한 물질주의에서 로마의 향락문화가 독버섯처럼 일어났고 그에 대한 반성의 분위기가 사회의 한 편에서 강력히 분출되었다. 이것이 로마에 스토아 철학이 유행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스토아 철학은 로마의 기독교 발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기독교는 물질에서 영혼의 세계를 극대화한 종교다. 그러니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 스토아 철학에서 강조하는 물질에 대한 금욕과 인류애는 기독교의 교리와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니 말이다. 

 

노년의 비참함에 대한 4가지 질문카토의 답변

<노년에 관하여>에서 현인 카토는 사람들이 노년이 비참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네 가지 질문으로 정리하면서 그에 대해 답변한다. 그는 첫 번째로 이렇게 질문한다. 노년은 우리를 쓸모 없게 하는가?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간명하다. “전혀 염려할 것이 없다. 노년은 노년대로 쓸모 있는 게 인생이다.”


큰일은 체력이나 민첩성이나 신체의 기민성이 아니라, 계획과 명망과 판단력에 따라 이루어지지. 그리고 이러한 여러 자질은 노년이 되면 대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늘어난다네.” “한창 때의 젊은이들은 경솔하기 마련이고, 분별력은 늙어가면서 생기는 법이라네.”(<그리스 로마 에세이>, 409, 411)


<러셀 자서전,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나는 평소 버틀런드 러셀을 존경한다. 이 자서전은 그가 90이 넘어 쓴 책이다. 이 책 서문에서 그는 자신을 지배해 온 세 가지 열정을 이야기한다. 사랑에 대한 열정, 진리추구에 대한 열정 그리고 고통 받는 인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러셀처럼 맑은 정신으로 노년을 보내면서 인생의 후배들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카토는 노년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두 번째 질문, ‘노년은 우리의 몸을 허약하게만 하는가에 대하여 답한다. 노년이 되어 힘이 없다고 우리는 이제 인생 다 끝났다고 낙심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노년은 힘은 없지만 원숙한 권위가 있다. 이 자질은 소년이나 청년에서 찾을 수 없는 우리 인생의 자산이다.


힘이 있으면 그 재산을 쓰되, 없다고 아쉬워하지는 말게나. 청년이 소년 시절을, 또는 장년이 청년시절을 아쉬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말일세. 인생의 주로(走路)는 정해져 있네. 자연의 길은 하나뿐이며, 그 길은 한 번만 가게 되어 있지. 그리고 인생의 매 단계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하네. 이런 자질들은 제철이 되어야만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라네.”(<그리스 로마 에세이>, 422)


세 번째 노년의 비참함에 대한 질문, 노년은 감각적 쾌락이 없으니 무슨 재미로 사는가? 카토의 대답은 전형적인 금욕을 고집하는 스토아주의자로 들릴 지 모른다. 그에겐 쾌락이란 하나의 역병이다. 그러니 노년이 되어 이런 쾌락이 물러간다면 축복이 아닌가.


세월이 정말로 젊은 시절의 가장 위험한 약점에서 우리를 해방해준다면, 그것은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얼마나 멋진 선물인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역병 가운데 쾌락보다 치명적인 것은 없다네. 쾌락의 탐욕스러운 추구는 쾌락을 충족시키도록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거리낌 없이 부추긴다는 것이었네.” “우리가 이성과 지혜로도 쾌락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것에 욕망을 품지 않게 해주는 노년에야말로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그리스 로마 에세이>, 425, 426, 427)


이제 카토가 대답하는 노년의 비참함에 대한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노년은 죽음에 임박했으니 슬픈 것인가? 스토아 철학자답게 그의 답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죽음은 자연과의 조화이니 조금도 슬플 일이 아니다. 죽음은 육체가 죽는 것이지 우리의 영혼까지 죽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세상 너머 저 세상에서 불사하며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주어진 수명이 짧다 해도 훌륭하고 명예롭게 살기에는 충분히 길기 때문일세”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무엇이든 선으로 간주되어야 하네. 그런데 노인들이 죽는 것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치 오랜 항해 끝에 드디어 육지를 발견하고는 항구에 들어서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네.”(<그리스 로마 에세이>, 448, 449)


그러니 이런 죽음을 생각하는 이들에겐 결코 나의 인생 다시 살고 싶다니, 내 인생 돌려 줘 하는 소리는 나오지 않으리라. 최선을 다해 산 인생은 더 이상 여한이 없는 법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과거를 후회하면서 다시 살고 싶은 생각은 결코 없다.


<말들의 경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생은 저 같은 경주인가. 저 같이 인생을 질주하고 나서도 후회스럽다면서 다시 한 번 경주장의 출발점에 서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저 한 번의 질주로 내 인생을 마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질주해야 한다.>


경주가 다 끝난 지금 나는 결승선에서 출발선으로 도로 소환 당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네.” “내가 살았다는 것은 나는 후회하지 않네. 나는 내가 헛되이 태어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살았으니까. 그래서 내가 삶을 떠날 때 집이 아니라 여인숙을 떠나는 듯한 느낌이 들 것 같네.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은 임시로 체류할 곳이지 거주할 곳이 아니기 때문일세.”(<그리스 로마 에세이>, 457)


키케로의 글을 읽으면서 인생의 황혼기도 충분히 우아할 수 있음에 안도한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우아한 노년이 되기 위해서는 정신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건강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노년의 분별력도 권위도 생긴다. 만일 치매라도 걸려봐라. 키케로가 말한 노년에 대한 찬사는 일순간에 비참함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니 키케로의 글은 노인으로서 위엄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건강을 전제로 쓴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몇 년 전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어느 책 추천사에서 소박한 바람 하나를 말했다. 바로 노년의 건강에 관한 것이었다. 평범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야 할 소망일 것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도 생각하고 기억하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새 소설이나 신문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기를 원한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여기저기 다닐 수 있고 혼자서 옷을 갈아입고 식사도 자기 손으로 하며 화장실에도 혼자 다닐 수 있었으면 한다. 또한 만성 질환으로 고통 받지 않기를 소망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기를 원한다.”(<우아한 노년>, 데이비드 스노돈, 유은실 옮김, 8-9)


[이 글은 내가 쓴 책 <로마문명 한국에 오다>  8장 '라틴문학의 왕자 키케로, 지혜를 말하다' 의 한 부분을 수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