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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서유견문(2) 알카트래즈, 그 철옹성의 감옥을 가다

박찬운 교수 2015. 9. 28. 10:28

신 서유견문(2)

[알카트래즈, 그 철옹성의 감옥을 가다]


많은 페친들께서 제 견문기를 좋아하시니 내킨 김에 과거 써 놓은 글 몇 개 더 꺼내 놓아야겠습니다. 제가 노트북 컴퓨터를 처음 쓴 게 1995년부터입니다.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부리나케 배웠지요. 그 때까지 저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문서를 쓸 때 손으로 글을 쓴 다음 사무원에게 넘겨 타이핑을 시켰습니다.


1996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1년 전부터 컴퓨터를 익혔습니다. 삼성 노트북이 막 나온 것으로 기억하는 데 그것을 사서 워드 프로세스 기능과 통신기능을 익혔지요. 그 덕에 1995년 가을 미국 여행과 그 뒤의 미국 유학에선 어디를 가든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며 제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습니다.


아래 글은 1996년 제가 있던 버클리에 가까운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의 기록입니다. 아마 이 글은 그 즈음 변호사회 회보에 싣기 위해 쓴 것이긴 하지만 글이 게재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소 글이 깁니다만 첫 번째 신 서유견문보단 재미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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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트래즈를 아시나요

저는 오늘 독자 여러분을 유명한 관광명소 한 곳으로 안내할까 합니다. 여러분이 언젠가 샌프란시스코에 간다면 어디를 맨 먼저 가보고 싶습니까. 금문교입니까, 아니면 피셔먼워프입니까. 두 군데 모두 명소이기는 하지만 저는 두말할 것 없이 알카트래즈를 권하고 싶습니다.

혹시 클린트이스트우드가 주연을 한 <알카트래즈에서의 탈출>(ESCAPE FROM ALCATRAZ)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까. 탈출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철옹성의 감옥을 기묘한 방법으로 탈출하는 어느 죄수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말입니다. 바로 이 영화가 알카트래즈 감옥에서 1962년 실제로 일어났던 탈출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비디오 챠트 1위에 올랐던 <1급살인(>MUDER IN THE FIRST)이라는 영화를 흥미 있게 본적이 있는데, 이것도 알카트래즈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한 죄수(헨리 영)가 알카트래즈에서 탈옥을 기도했지만 동료의 밀고로 잡히고 맙니다. 그 덕에 그는 알카트래즈의 지하 감옥(DUNGEON)에서 3년간 징벌을 받습니다. 그는 그곳을 나오자마자 식사 도중 자신을 밀고했던 사람을 스푼으로 찔러 죽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다시 법정에서 1급살인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를 변호했던 변호사가 그 당시 하버드 로스쿨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공선변호인(스탬필)이었는데, 그는 법정에서 알카트래즈라는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감옥제도가 피고인을 살인도구로 만들었다고 역설합니다. 그의 변호는 배심원의 심금을 울렸고 결국 알카트래즈 지하감옥은 위헌적인 제도로 판단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몇 년 전 보고 변호사로서의 진면목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고 느낀 바 있습니다. 언젠가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꼭 알카트래즈에 들러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겠다고 결심도 하였지요.


조금 서론이 길었지만 오늘 제가 안내하고자 하는 곳이 바로 그 알카트래즈 감옥입니다.


알카트래즈의 위치 및 가는 방법

알카트래즈는 샌프란시스코 배이(Bay) 한가운데에 위치한 바위섬으로, 다운타운에서도, 금문교에서도, 피셔먼워프에서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을 가려면 피셔먼워프의 피어41에서 그곳으로 가는 배를 타야합니다. 이곳은 피셔먼워프를 방문한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고자 하는 곳이라 배편은 항상 매진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당일로 가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것을 모르고 갔다가 두 번이나 실패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결국 집사람이 다니고 있던 어덜트 스쿨에서 그곳을 견학할 때 부부동반으로 신청해 갈 수 있었지요.


간단한 알카트래즈의 역사

이 섬은 1854년 등대를 설치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등대는 미국의 서부해안에 설치된 최초의 등대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시기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어, 소위 골드 러쉬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아마도 이 지역을 왕래하는 배가 많아 자연히 등대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군대가 이 섬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여 이곳을 요새화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이곳을 군형무소로 이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죄수, 인디언, 미서전쟁 당시의 전범들이 이 시기 이곳의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 뒤 알카트래즈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중에는 민간교도소로 대여되기도 하였고, 1차대전 중에는 군인들의 군기교육장소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1920-30년대에 들어서자 군대는 이곳의 가치를 점점 낮게 평가하였고 군인들의 주둔도 나날이 줄게 되어 이곳을 유지하는데 비용만 들어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미연방정부는 보다 강력한 보안경비(시큐어리티)가 가능한 교도소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 몇 건의 중대한 감옥탈출사건이 터져 연방정부로서는 국민들에게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탈출은 불가능한 감옥을 선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알카트래즈는 이러한 연방정부의 구미에 딱 맞는 감옥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이 시기 연방정부는 사법당국의 영향권 아래에서 교도소장의 재량에 따라 제 각기 교도소 운영을 하는 게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고 판단하고, 지휘감독 체계가 단일한 교정기구로, 법무성 산하에 연방교정국을 만듭니다. 초대국장 샌포드 베이츠(SANFORD BATES)는 바로 1930년대 미국의 감옥을 보안위주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 알카트래즈는 1934년 미국 내에서 가장 엄격한 시큐어리티가 보장되는 초중구금(Super Maximum Security)교도소로 탄생되었습니다. 이곳의 모토는 한마디로 “가장 엄격한 통제, 가장 저급한 권리”였습니다.


알카트래즈는 1963년까지 미연방정부의 초중구금교도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963년 이후 이 섬은 잠시 인디언들이 점거하는 사건도 있었으나 결국 1972년 금문교국립휴양지역의 하나로 지정되어 국립공원관리국이 관할하는 미서부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시설개관

이곳 알카트래즈에는 역사적인 건물이 여러 개 있지만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셀블록(옥사)입니다. A, B, C, D 네 개의 블록으로 감옥은 설치되어 있는데, A, B, C는 일반 죄수들을 독방구조의 일반구역이고, D블럭은 규율위반자들을 징벌하는 특별구역입니다. 알카트래즈의 독방구조는 가로 1.8미터, 세로 2.5미터정도의 방으로 안에는 침대가 놓여있고 침대 뒤 벽면에는 수세식 변기와 세면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한쪽 벽면에는 철제 책상이 벽면에 부착되어 있지요.


D블럭의 셀은 다른 방과 다르지 않으나 운영상으로 명백하게 차이가 났다고 합니다. 세 개의 형식이 있는데 하나는 엄정독거(SOLITARY)로 이곳에 들어가 문이 닫히면 완전히 암흑이 되고 거기에서 죄수는 1일 24시간을 보내야만 합니다. 두 번째 형식은 격리구금(ISOLATION)인데 이것은 엄정독거에 비교하여 어둡지는 않지만 24시간 독거 수용되는 징벌방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라구금(STRIP CELL)인데 이것은 죄수를 완전히 발가벗겨 가두는 징벌방이라고 합니다. 특히 D블럭에 있는 던젼(DUNGEON)이라는 지하 감옥은 원래 군대의 지하 창고 또는 요새로 쓰였던 곳으로, 알카트래즈가 감옥으로 바뀐 다음에는 재소자 중에서 규율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사람을 징벌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시설입니다.


저는 아쉽게도 이곳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단지 사 가지고 온 책을 통하여 그곳의 운영실태를 보았지만 한마디로 끔찍한 징벌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1급살인을 보시면 알겠습니다만 이곳에서 얼마간 있었던 죄수 중에서 정신과 질환을 앓게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하는 것은 이곳의 끔찍함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자료입니다. 이곳은 그 영화의 이야기대로 1940년대 이후 샌프란시스코 법원의 한판사가 위헌판단을 함으로써 더 이상 징벌방으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알카트래즈에 수감되었던 유명죄수

30-40년대 미국의 갱단을 대표하였던 알 카포네나 머시인 건으로 알려졌던 켈리 등이 이곳을 거쳐 간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의 관심사는 그들과 같은 조직범죄자는 아니지만 미국 감옥사에서 독특한 인물로 손꼽히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THE BIRDMAN OF ALCATRAZ라고 불리운 로버트 스트라우드(ROBERT STROUD)입니다.


이 사람은 미국 감옥사에서 아마도 감옥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일 것입니다. 장장 54년간을 감옥에서 보내다가 감옥에서 생을 마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알라스카에서 한 사람을 죽인 혐의로 유죄가 확정되어 형을 살던 중 자신의 형제와 면회를 제한한 교도관을 살해하여 다시 재판을 받아 교수형이 확정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가 당시의 윌슨 대통령 부인에게 탄원을 한 덕에 영부인의 도움으로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답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미국 사회에서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감옥생활을 하면서 새에 관한 탁월한 연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알카트래즈에 오기 전의 감옥에서 자신의 감옥에 날아오는 새를 관찰하며 새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감옥 내에서 많은 새를 키우기도 하였고 이 분야에 관한 탁월한 글도 썼습니다. 그가 쓴 STROUD'S DIGEST OF THE DISEASES OF BIRDS는 지금도 도서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책으로 조류학 분야에서는 하나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이큐가 138이었으며 4개 국어를 할 수 있는 영리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말년에 알카트래즈로 와서 수감생활을 하였는데 이곳에서 사는 17년 동안은 전의 감옥처럼 새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D블럭에서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지요.


알카트래즈에서의 탈옥
알카트래즈는 한마디로 철옹성입니다. 완전한 보안이 유지되었고 주변은 바다인데다 물살은 빨라 설혹 감옥을 빠져나온다 해도 헤엄을 쳐 육지로 가는 것은 불가능한 곳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자유에 대한 욕망은 본능적이라 알카트래즈 30년 역사에서 무려 14번이나 탈옥사건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중에는 객관적으로 보아 성공한 사례도 있습니다.


왜 이런 어중간한 표현을 쓰느냐 하면 성공하였다고 보여 지는 그 탈옥자들의 생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감옥에서는 나갔지만 샌프란시스코만의 빠른 물살과 찬 조류에는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오늘 저는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탈출사건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알카트래즈가 문을 닫은 1963년을 1년 앞둔 1962년에 일어났던 것으로 미국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세계 감옥사에서 하나의 전설로 회자되는 사건으로 불립니다.


그 주인공은 프랑크 모리스(FRANK MORRIS)를 주범으로 한 3명(원래는 4명이 탈옥을 기도하였으나 한 명은 마지막 단계에서 포기하고 말았음)입니다. 이들은 몇 달 동안 아무도 모르게 자신들의 감방 뒤 벽면을 스푼을 이용하여 구멍을 냈습니다. 3명은 어느 날 야음을 틈타 그 구멍으로 빠져나간 다음 천정으로 올라가 샌프란시스코 만으로 몸을 던져 탈주하고 말았습니다. 감옥당국은 이들을 잡기 위해 전국을 뒤졌으나 결국 이들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탈주 작업을 위해 자신들이 구할 수 있었던 끈, 신문지, 콘크리트, 페인트 등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닮은 마스크를 만들어 자신의 침대에 놓아둔 다음 작업을 하였다고 합니다. 실로 기상천외한 사람들이라 할 것입니다. 모두에서 말한 클린트이스트우드의 <알카트래즈에서의 탈출>은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얼마 전의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의 탈주방법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인데 이들이 사용한 탈출 방법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행형을 생각하며

저는 30년 전 미국의 초중구금시설을 관찰하면서 여러 가지를 느꼈습니다. 특히 감옥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저로서는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알카트래즈는 감옥사상으로 보면 지극히 응보형사상에서 입각한 시설입니다. 시설의 철저함도 그렇지만 그 위치가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화려한 다운타운을 지척에 두고 있고 그림 같은 금문교가 손에 잡힐 듯한 곳에 있다는 것이 바로 응보형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주변의 경관은 너무나 아름답고 바람은 너무나 감칠맛 납니다. 지척의 샌프란시스코는 자유와 풍요로 넘칩니다. 재소자들은 이것을 매일 먼발치에서 보면서 자신의 수감생활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가 천국이라면 알카트래즈는 지옥이었습니다. 이것은, 백문이불여일견, 그곳을 가면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잔혹함이 엿보이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초중구금시설을 산속에 세웁니다. 물론 땅값을 고려한 것도 있겠지만 우리의 감옥당국은 산 속이 사람 많이 사는 곳보다 죄인에게는 가혹하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시설의 차이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풍요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를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감옥의 수준은 그 사회의 경제 구조의 최저수준과 궤를 같이한다고도 하니 우리와 미국을 같이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카트래즈는 30년 전의 시설입니다. 그러니 지금 정도의 우리와 비교 못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한마디로 우리의 수준은 30년 전의 알카트래즈보다 훨씬 못 미친다고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초중구금시설인 청송교도소를 몇 년 전에 가보았는데 80년대에 세운 그 시설은 알카트래즈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청주에 가면 여자교도소가 있는데 원래 청주보안감호소를 개조하여 여자교도소로 만든 곳입니다. 독방시설에 여전히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는데 무려 3-4명이 여름철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할 때 우리도 하루 빨리 감옥시설의 전반적인 개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미국의 감옥제도에서는 배울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말하는 것은 이 지면의 한계를 넘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생략합니다만 미국은 행형에 철학이 빈곤한 나라이고, 철학이 있다 해도 실현하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에서 하나의 아이덴디티를 실현하기 어려운 만큼 행형시설에서 교정이란 정말로 힘든 과제입니다.


따라서 미국의 시설은 어떤 곳을 보면 지극히 개방적이고 어떤 것을 보면 지극히 잔혹합니다. 우리가 미국의 감옥제도를 공부함에 있어서는 미국의 사회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 없이 단순 모방은 우리의 행형을 단순 후퇴시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감옥을 이야기한 부분은 이 글이 20여 년 전에 써진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에 들어 와 이 분야에서 상당한 개선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헌법재판소의 진보적인 결정과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침해 개선 노력이 돋보입니다.)




알카트래즈 섬과 감옥,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이 지척에 있다

알카트래즈의 일몰, 참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한때 지옥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