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복지

의료개혁의 핵심은 공공의료에 두어

박찬운 교수 2023. 10. 24. 04:29

 

 
요즘 정부가 의사 수를 늘리기 위해 의대 정원을 증원하겠다고 하나 의료계는 대체로 환영보다는 반대 분위기가 센 것 같다. 정부가 의사들에게 특별한 반대급부 제공 없이 밀어부친다면 격렬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고, 과거의 예처럼 결국에는 실패로 끝날 공산이 크다. 나는 지난 문재인 정권 시절부터 이 문제에 대해 몇 번 이곳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의료문제 중 심각한 것은 의사들이 특정 지역을 선호하고 특정 분야에선 아예 일하지 않으려는 현상이다. 이로 인해 국민의 건강권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서울의 큰 병원으로 와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생겼다. 저출산이 계속 되는 상황에서 특정과는 거의 소멸 위기에 처했다. 산모들이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병원이 줄어들고 아이들이 갈 수 있는 소아과는 씨가 말라가고 있다.

의사들도 불만이 많다. 건강보험이 보장하는 수가가 너무 싸, 병원 유지를 위해서는 적정 수 이상의 환자를 받아야 하고 과잉치료를 해서라도 수입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키가 의사 수의 증원일까? 물론 우리나라의 의사 수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적다. 따라서 적정 수준으로 증원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우리 의료의 근본적 문제점을 알면 그것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대한민국 의료문제는 우리 건강보험이 안고 있는 근원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우리의 의료구조와 건강보험이 애초부터 조화되기 어려운 데서 나온 필연적 결과다. 앞으로 의사 수가 많아져도 국민은 제대로 된 의료처우를 받기 힘들 것이고, 의사들은 수입이 준다면서 정부를 원망할 것이다.

1. 우리나라 의료는 공공의료가 아닌 개인병원 중심의 각자도생 방식이다.
우리나라에 현대의학이 상륙한 일제강점기 이래 의사는 귀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서양의학을 배우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으며 그런 환경에서 양성된 의사는 특권층일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잘 사는 것이 보장된 직업이었다. 그런 의사가 되는 과정은 모두 개인에게 맡겨졌기에 대부분 잘사는 집안의 자식이 의사가 되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공공의료는 전혀 발전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의 병원 90% 이상이 개인병원이다. 의료를 완전히 개인에게 맡긴 거나 마찬가지다(병상수 기준으로 공공의료 비중은 영국은 100%, 호주 69.5%, 프랑스 62.5%, 독일 40.6%, 일본 26.4%에 달함, 민간의료보험 중심의 의료 공급시스템인 미국도 공공의료 비중이 24.9%임, 그에 비해 한국의 공공의료 비중은 9.2%(2015년 기준)에 불과함). 의사가 되는 것도 개인의 힘이요, 병원을 운영하는 것도 개인이 할 일이었다. 병원은 기본적으로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운영되었으니 의료의 공공적 가치는 안중에도 없었다.

2. 건강보험이란 맞지 않는 옷이 입혀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정부는 80년대 이후 건강보험을 들여와 국민 개보험으로 정착시켰다. 건강보험은 국민들에겐 엄청난 의료 서비스 혁명이지만 의사들에겐 양면성이 있는 제도다. 수가 많아져 가는 의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선 건강보험이 필수적이다. 환자가 병원을 가기 어려운 환경에선 의사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보험의 운영주체는 의사에 대해 항상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한정된 건강보험 재원으로 전 국민에게 의료혜택을 주기 위해선 의사에게 지급하는 돈을 엄격하게 심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만든 게 심평원이다. 병원과 심평원은 항상 숨바꼭질하는 관계다. 병원은 좀 더 많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과잉진료로 부풀리고 심평원은 그것을 깎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상황에서 의사들이 수입을 늘릴 수 있는 출구가 있는데 그게 바로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이다. 건강보험 적용대상이 아닌 검사나 시술이라도 환자로선 치료를 위해 안할 수가 없다. 이것은 병원이 얼마든지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고 환자로부터 돈을 받아낼 수 있는 영역이다. 의사들은 바로 이 부분을 통해서 병원 수입을 올려 왔던 것이다.

의료수준이 높은 병원은 아예 건강보험 적용 없는 민간보험 병원을 원한다. 돈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세계 최고 수준의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것이 사회정의라고 하면서, 건강보험을 사회주의 제도라고 몰아부친다.

3. 민간중심의 의료체계가 건강보험의 장애물이다.
민간중심의 의료체계는 건강보험 제도 하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국민 개보험 체제라고 해도 필수의료 부문의 의사 수 부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내 돈 들여 의사가 되고 내 돈 들여 병원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느 의사 지망생이 돈 안 되는 과를 선택할 것이며, 이미 사회적 기득권을 확보한 의사들이 가족을 데리고 지방으로 갈 것인가.

관리비용도 너무 많이 든다. 의료비의 적정한 배분을 위해 만들어진 심평원 하나만 보라. 그것 운영하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 가겠는가. 현재 심평원의 조직은 임직원 수가 4천 여 명이며, 연간 지출은 5천억 원에 가깝다.

건강보험을 확대하거나 변경하는 데 국민은 뒷전이고 의사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국민에겐 건강보험을 확대(보장성 확대)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좋은 일임에도 의사들은 오히려 수입이 준다고 반발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 의료기관이 기본적으로 국가나 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공의료기관이라면 위와 같은 문제는 일어나기 어렵다. 의사를 의심해서 의료비를 깎을 필요가 없고 건강보험을 확대한다고 해서 의사들이 반발할 이유도 없다. 공공의료기관 중심의 의료서비스 하에선 의사는 기본적으로 월급쟁이 근로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영에 아무런 책임이 없고 부담도 없다. 그저 일만 하면 된다. 그런 환경에선 필수의료 부문의 의사 수도 큰 문제가 안 된다. 공공의료에 대한 국가의 통제 능력이 확실하므로 의사양성 과정과 의료서비스 제공에서 적절한 역할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사회보장제도로서의 건강보험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공공의료 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의료 환경이 우리와 비슷한 미국이 사회보험인 건강보험 제도를 갖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간이 운영하는 의료기관은 공공의료를 보충하는 정도에서 기능해야 하는 데, 우리는 해방 이후 오늘까지, 그것을 만들지 못한 채 건강보험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오늘의 문제를 만든 근본원인이다.

4. 비전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복지국가의 초석은 최소한 사회가 건강을 책임지는 사회다. 한국의 의료기관이 민영의료기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건강보험을 제대로 작동시키는 것이 어렵다고 해도 이는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타협할 수 없는 우리의 목표다.

당장 민영중심을 공공중심으로 바꾸긴 어렵지만 과도한 비용이 들어가는 민간병원의 경영은 삼가야 한다. 서울의 몇 개 병원은 투자비가 조 단위인데 그런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경영방법이 쓰일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무분별하게 시설투자를 해 호화병원을 만들면 건강보험도 위험해진다. 군살을 과감하게 도려내고 적정치료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심평원의 운영방법도 적정한지 점검해야 한다. 불가피한 조직이지만 운영이 방만하지 않도록 새로운 경영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와 함께 정부는 공공의료 비율을 높여가는 확고한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전국 곳곳에 공공병원으로서의 거점병원을 만들어 의료서비스의 중추적 역할을 맡겨야 하고, 이곳에서 일할 수 있는 의료인력을 공급하기 위한 의료인 양성과정을 손봐야 한다(의대 정원 증원은 바로 이런 논의를 한 후 그 필요에 따라 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의료가 본질적으로 공공재임을 인정하지 않고선 이 문제가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의료서비스가 결코 돈 버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제도 개혁을 해 나가야 한다. (이글은 2018년 쓴 글을 2023년 10월의 시점에서 다시 쓴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