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내가 본 대한민국

내가 본 대한민국 (나는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

박찬운 교수 2015. 9. 27. 09:45

내가 본 대한민국 


나는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



나는 가끔 대한민국 사회에서 사는 게 숨이 막힌다. 나는 자유롭게 살길 원한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쓰고 싶을 때 마음대로 쓰고 싶다. 나는 그것이 인간존재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자유가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대학시절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이 기본적 자유가 시시때때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변호사가 된 이후에는 불온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불온한 책을 보았다는 이유로,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간 이들을 위해 변호하기도 했다.


누구는 말할 것이다. 우리는 분단된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자유의 제한은 감수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그래도 우리는 북한에 비하면 얼마나 자유스런 사회에서 사느냐고. 그러나 나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의 자유를 옥죌 때마다 북한을 들먹이는 것을 이젠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다.


우린 북한의 존재가 우리 삶에서 하나의 한계로 작용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를 더욱 자유롭고, 포용이 넘치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강점이자 최고의 안보정책이다. 그런 사회에서 어느 누가 종북을 하겠는가. 안보는 총칼로만 하는 게 아니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사회와 체제에 대해 긍지를 가질 때, 그것이 진정한 안보이다.


2014년 겨울, 한국 사회는 다시 동토지대가 되어가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결정을 하자마자 신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 기세다. 자칫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특정 정치적 결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 조직을 후원했다는 이유로, 또 그들의 집회에 참여해 말했다는 이유로 수사를 받고, 감옥에 갈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몇 년 전 일이다. 국방부에서 시중 서점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책들을 금서로 정한 다음 군인들에게 읽지 못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뜻 있는 군법무관들이 그런 것은 헌법상의 사상·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헌법재판소는 이를 기각했다. 결국 국방부의 그런 조치가 대한민국 땅에서 허용된다는 것이다.


이 아침, 독자 여러분에게 묻는다. 이와 같은 우리 사회의 현실에 동의하는가. 만일 동의한다면, 더 이상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글은 독자 여러분을 위한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위와 같은 일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국민으로 살 것인가, 인간으로 살 것인가.’


만일 당신이 어떤 책을 보고 싶은데 국가가 그 책을 불온도서로 규정했다 치자. 이 때 그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철저한 ‘국민’이다. 이런 사람은 국가가 읽지 말라는 책을 왜 읽느냐고 오히려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이런 사람도 있다. 내가 책을 읽는데 국가의 승인을 왜 받아야 하냐고. 도대체 국가가 무엇이건대, 나의 책 읽는 일까지 참견하느냐고. 이런 사람은 책을 읽는 것은 전적으로 ‘나’ 개인의 일이지 ‘국가’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사람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좀 연장하면 우리의 국가보안법의 정당성 여부에 이른다. 국보법은 금서를 인정한다. 어떤 책이 ‘반국가단체(북한)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면ㅡ그런데 이 목적성은 책을 저술한 사람이 판단하는 게 아니다. 국가가 그렇다고 판단하는 게 문제다ㅡ그것은 금서이며, 그것을 읽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다. 그것을 위반하면 국가의 엄격한 제제(형벌)를 받게 된다.


그러니 이 법률을 당연시한다면 당신은 철저한 ‘국민’이다. 이 법률을 반대한다면 당신은 ‘인간’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는 대가가 따른다. 감옥에 갈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대가이다. 이제 독자들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은 국민으로 살 것인가, 인간으로 살 것인가.’


국민? 인간? 이런 데에 조금 관심 있는 사람들은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만나볼 것을 권한다. 특히 그가 쓴 『시민의 불복종』을 읽어보시라. 그는 인간으로 사는 세상을 희망했다. 소로가 바라던 세상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 세상은 나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다. 나의 삶의 방식이 존중되는 사회, 그것이면 족하다. 소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시민불복종』(강승영 옮김), 이레, 13쪽)


권위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정권이 들어서면 자유를 위한 투쟁도 끝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자유란 한 번 얻어졌다고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명박 정권 5년과 박근혜 정권 2년간 나타난 일련의 보수화 물결은 인권의 위축을 가져왔고 우리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심각한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세상의 역사를 사상사적인 면에서 보면 사상의 자유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었다. 아니, 당연한 권리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상의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알지만 그 권리는 무수한 투쟁을 통해 얻어진 것이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지만 사상의 자유야말로 유혈 낭자한 전장 터 한가운데서 피어난 장미꽃과 같은 것이다.


70-80년대 독재정권에 항거하던 지식인 사이에서 많이 읽힌 책 중에서 19세기 말 영국 역사가 존 베리가 쓴 『사상의 자유의 역사』란 책이 있다. 거기에서 베리는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한 험난했던 역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사상의 자유가 어떤 식으로든 가치 있으려면 그것은 언론의 자유를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언론의 자유에 너무 익숙해져 그것을 하나의 당연한 권리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권리는 아주 최근에야 획득되었으며 그것을 얻는 데 이르는 길에는 유혈의 호수들이 가로놓여 있었다." (『사상의 자유의 역사』(박홍규 옮김), 바오, 20~21쪽)


서양사상사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강고한 권위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해도 그것에 도전하는 이성을 결코 잠재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세를 생각해보라. 그 종교적 권위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말 한번 잘못하면 화형을 면치 못했다. 종교적 권위는 물리적이고 도덕적인 폭력을 행사했고, 법적으로 강제했으며, 사회적 비난을 무기로 삼아 이성을 공격했다.


그럼에도 인간의 이성은 유일한 무기인 논증을 기초로 그런 압제 속에서도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인간의 삶은 종교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신뢰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습관과 제도를 하나하나 바꾸어 나갔다. 그리하여 새로운 문명, 즉, 생각하는 자유와 그것을 표현하는 자유가 있어야 함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베리는 이러한 자유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제한 없는 토론의 자유가 중요했음을 강조한다.


"만일 문명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순전히 인간의 능력 범위 내에서 확보될 수 있는 정신적·도덕적 진보의 최고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상과 토론의 완전한 자유이다." (『사상의 자유의 역사』, 265쪽)


대한민국에선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자유는 국가보안법이란 괴물에 의해 시시때때로 부인되었다. 정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문명국가에서 누리는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제7조를 보라.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조항은 우리의 사상의 자유와 토론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옥죄는, 법이라는 이름의 4번 타자이다. 이 법을 잘못 사용하면 정권은 그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북한 정권과 동일시하여 감옥에 넣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자칫 말 한마디가 치명적일 수 있으니 말이다.


국보법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북한이 제시하는 어떤 정책도 동의할 수 없게 만든다. 아니 그것 이상으로 북한에 대해서는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적대적으로 표현해야 이 사회의 건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국보법 적용의 역사를 보면 어떤 사람의 주장이 결과적으로 북한의 주의·주장과 동일한 경우도 북한을 찬양·고무하는 자로, 혹은 동조하는 자로 평가되었다. 우리가 남북한과 관련된 말을 하고자 한다면 북한의 주의·주장을 전부 찾아보고, 북한이 말하지 않은 것만을 골라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해야 한다.


서구는 1,000년 이상 종교적 권위에 이성이 도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근세사에 들어서 국가 권력이 만든 권위에 도전하는 이성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다. 비록 그 과정은 다르나 본질은 다를 수 없다. 종교는 도전하는 이성을 이단시하면서 폭력으로 대응했으나 결국 이성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서구 사회의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는 모두 이성의 도전에서 얻어낸 결과가 아닌가.


대한민국도 필시 그런 역사를 걸어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국가 권력이 아무리 국보법을 무기로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제한한다 해도 결국 이성의 도전에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완전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그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을 정지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해방 이후의 우리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땅에 떨어진 국보법의 현주소가 바로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소로가 염원한 사회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그가 원하는 삶의 방식이 허용되는 사회란 개인을 한 이웃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국민이 될 것을 강요하지 않고 국가와 상관없이 살 수 있는 인간 본연의 삶을 ‘최대한’ 인정하는 그런 사회를 말한다.


"그런 국가는,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초연하며 국가에 대해 참견하지도 않고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더라도 이웃과 동포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한 그들이 국가의 안녕을 해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민의 불복종』, 58쪽)


소로가 바라는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될 수는 없을까. 불복종 운운의 이야기를 했다고 두들겨 맞는 사회가 아니라 이런 말도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고견이라고 존중해줄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사회, 그것이 과연 나만의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언젠가 우리가 반드시 이 땅에서 성취해내야 할 우리의 본 모습이다. 나는 정령 그런 사회를 소망한다.



이 책은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지었다. 소로는 이 책에서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 염원을 썼고, 불의를 행하는 국가에 협조할 수 없음을 명백히 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사상의 자유라는 주제를 서양의 종교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개관한 학술적인 성격의 책이다.이 책은 우리나라가 권위주의와 독재로 사상과 양심의 자유 그리고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제약되었을 때 지식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970~1980년대 젊은이의 사상의 은사였던 리영희 선생은 교도소에서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