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내가 본 대한민국

내가 본 대한민국 (불평등 시대,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할까)

박찬운 교수 2015. 9. 27. 17:22

내가 본 대한민국 


불평등의 시대,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할까


내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려고 했던 10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 머리를 지배한 것은 가난이라는 문제였다. 예수도, 부처도 이 삶의 모순을 일찌감치 발견하고 그 해결을 위해 고민하지 않았던가.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이라는 인간사의 모순을 보았고, 그것을 불평등의 기원으로 이해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나는 뒤 늦게 루소의 <인간불평등의 기원>을 읽고 동지를 만난 듯 기뻤다.


1973년 10월 충청도 촌놈이 서울에 도착했다. 우리 가족이 거처를 정한 곳은 청계천 판자촌 변. 방 한 칸에 여섯 식구가 뒹굴었다. 밤에 모로 누웠다가 돌아누우면 내 자리는 이미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잠버릇만큼은 기가 막히게 좋다. 자는 동안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학교에 가니 친구들 대부분이 청계천 판자촌에서 사는 아이들이었다. 어느 날 판자촌에서 불이 나 구경을 가보니 순식간에 백여 집이 타버렸다. 판자촌 지붕이 모두 콜타르를 발라 놓은 것이라 불만 나면 그보다 더 좋은 불쏘시개가 없었던 것이다.



청계천 판자촌. 내가 서울에 이사 왔을 때 이런 판자촌이 청계천과 중랑천에 즐비했다. 수만 명이 비좁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이 판자촌이 영 불편했던 모양이다. 1975년경 일시에 이 판자촌은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성남으로 이주했다. 사진은 청계천 복개공사가 진행 중인 1960년대 중반 정경이다.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한 기억, 그것은 사는 동안 순간순간 영화처럼 재생되었다. 꼭 10년 전,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그 때, 시 아닌 시를 썼다.(지난 여름 페북에 올린 <소년의 눈물>에 소개한 것이지만 오늘 여기에 그 일부를 올린다.)
...
셋방살이 좁은 방
밤 10시 일일 연속극이 끝나면
가족들은 일찍 잠이 들었다
집안의 희망 그 때서야 책장을 넘겼다

소년의 눈가에는 
항상 우수가 넘쳤다
80명이 넘는 동급생들 
그 중에는 소년보다 훨씬 우울한 
친구도 있었다

어느 날 동급생들과 
쌀 1말, 라면 2박스 어깨에 메고
청계천변 사람 살 곳 아닌 곳에 
살고 있는 친구를 찾았다
돌아오는 길 우리 모두는 울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우리가 어른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생일 날 케이크 한 쪽 먹어볼 신세는 될 수 있을까
...

나는 살아오면서 삶의 철학 하나를 정립하였다. 그것은 인간에게 최소한의 물질이 확보되지 않고서는 행복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정신적 행복을 중시하는 사람에겐 나 같은 사람은 그저 유물론적 인간으로 비칠지 모른다. 이런 분들은 내게 행복을 원한다면 정신수양을 쌓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겐 이런 말이, 한 마디로, 개떡 같은 말이다!


나는 행복이란 것도 인간사의 상부구조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행복의 기초는 하부구조의 단단함에서 온다. 그 하부구조가 바로 물질이고, 돈이다. 행복하기 위해선ㅡ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ㅡ우리의 주머니가 어느 정도 채워져야 한다. 빈주머니에서 행복을 이야기하는 사회는 위선이다. 그 위선에 속아선 안 된다.


이 책은 70년대 후반에 나와 독서계를 강타했다. 한 때 학생 의식화 작업에 이 책이 쓰인다고 당국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까지도 우리 청소년들이 읽는 필독서다.


70-80년대는 성장의 시대였다. 성장은 우리 사회의 물질적 발전을 가져왔지만 빈부격차라는 부산물을 안겨주었다. 성장의 과실을 따 마음껏 향유하는 계층과 아무리 노동해도 남는 것은 가난밖에 없는 사람들로 급속히 나누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대의 작가 조세희는 이런 풍경을 그의 대표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약칭 난·쏘·공)에서 이 사회의 빈곤층의 삶을 이렇게 절절히 표현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여기에서 법이란 무엇이었을까. 만인에게 평등한 정의로운 것이었던가. 아니다, 그것은 부자의 곳간을 지켜주는 문지기 역할을 했을 뿐이다. 사실 법이 없었다면 부자란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부자는 빈자가 있음으로서 가능한 것이고, 그것을 제도화시키고 보호하는 게 법이다. 빵집 쇼윈도에 쌓여 있는 빵이 온전할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법의 존재 때문이 아닌가.


이러한 진실을 <난·쏘·공>의 한 대목에서 조세희는 이렇게 표현했다. 읽을수록 가슴을 치는 대목이다.


“어떤 놈이든 집을 헐러 오는 놈은 그냥 놔두지 않을 테야” 
영호가 말했다.
“그만 둬” 
내가 말했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


이런 현실에서 가난한 자가 취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만일 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은 당대의 고생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식으로, 자식의 자식으로, 대대로 내려간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의가 아니다. 그것이 고착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신분제 사회로의 회귀다.


이런 가난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까지 한 가지 모범답안만 들어왔다.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 <난·쏘·공>에 이런 대목이 있다. “너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집에 살 수 있고, 고기도 날마다 먹을 수 있단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거기에 희망을 걸고 살아왔다. 그래서 자기는 굶는 한이 있어도 자식만큼은 그렇게 살게 할 수 없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공부를 시켰던 것이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난·쏘·공>의 난장이 가족들과 내가 무엇이 다른 사람일까. 방 한 칸에 여섯 식구가 우글대고 살았던 나 아닌가. 일찌감치 철이 들자 나 역시 오로지 할 수 있는 길은 공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하고 또 했다. 친구들이 세상의 부조리에 반기를 들며 거리를 헤맬 때도, 나는 고시반 기숙사에서 입신양명의 꿈을 꾸고, 고시공부를 했다. 행인지...? 나는 구제되었고,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 하나로 족했다. 형제들은 빠져 나오지 못했다. 일가친척도 나오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공부를 안했기 때문일까? 그렇다. 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게을렀던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인생을 낭비하면서 산 것은 아니다. 그들도 열심히 살았다. 그럼에도 가난의 늪에서 헤어나진 못했다. 가난이란 게 개인의 노력 여하로 풀기에는 너무나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날의 삶을 통해, 가난으로 인해 한 인간이 배움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은 정의로운 사회가 아님을 믿게 되었다. 현대사회에서 배움이란 부의 형성의 최소한의 출발점이요, 행복의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이 배움의 비용이 개인에게 부과되는 사회란 게 문제다. 이런 사회에서는 불가피하게 그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그 사회의 주인이 된다. 그 비용을 부담하지 못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자는 결국 그 사회의 그늘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대를 이어 자식대로 이어지는 바, 이것이 바로 빈곤의 악순환이다.


내가 감히 증언하건대, 우리의 부의 세습은 고도 성장기를 지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는 것이다. 성장기에는 배움의 정도에 따라 노동소득간의 격차가 크긴 했지만 그래도 기회는 많았다. 그래서 노력하면 잘 산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먹혀들어갔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IMF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 체제로 돌아서면서, 노동소득보다는 자본소득이란 게 중요해졌다. 부의 대물림이 격화되면서 잘난 부모 없이는 인생을 역전시키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2014년 한국 독서시장을 강타한 베스트셀러다. 300년간의 서구사회의 불평등구조를 이 책 한 권으로 여실하게 분석할 수 있다. 비록 이 책 속에 한국은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피케티의 분석방법은 우리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분석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산업혁명 후 자본주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이만한 책이 있을까 할 정도로 좋은 책이다. 장하준의 최근작 <장하준의 경제학강의>와 궤를 같이 하는 책이다.


2014년 프랑스 경제학자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이 대한민국 서점가를 강타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전 세계가 고도 성장기를 지나 저성장기로 들어가면서 불평등 구조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자본수익률(돈, 공장, 기계 등으로 얻는 수익비율)이 경제성장률(모든 국민의 평균 소득 증가율)을 능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 세계는 프랑스 혁명기의 자본/소득비율(해당 사회의 총자본규모가 국민소득의 몇 배인가를 나타내는 비율) 700%(이 말은 국민소득을 7년 모아야 전체 자산을 구매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개인적으로 보면 이 비율이 크면 클수록 연소득으로 부동산과 같은 자산을 취득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함)에 가까이 가고 있다. 한국은 어디에 해당할까?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은 이미 700%를 훨씬 넘겨 자본/소득비율에서 세계 1등 수준이라고 한다.


[해설: 저 성장기에는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능가하고, 자본/소득비율이 높아진다. 이렇게 되면, 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높아지게 된다. 이것은 사람들이 노동을 통해 버는 것보다는 자산을 통해 버는 돈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득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 동국대 김낙년 교수가 피케티의 분석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소득상황을 분석했다. 전체 개인소득자 3천여만 명 중 연 소득이 1천만 원도 채 안 되는 사람이 절반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것은 우리나라 소득자를 돈 잘 버는 순으로 일렬로 세웠을 때 하위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1년에 1천만 원도 벌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다 상위 10%의 사람들이 전체 소득의 50%에 가까운 소득과 전체 가계 자산의 60%를 차지하는 게 우리사회다. 이런 소득 및 자산 불평등은 사실상 세계 최고의 불평등 사회인 미국에 이어 두 번째 수준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그 불평등 구조가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화되었다. 나는 이것을 고치지 않는 한 우리의 장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자식들에게 공부만 잘하라고 하는 것은 로또 당첨을 바라면서 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에겐 경쟁 자체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은 예외가 될 것이라는 요행을 믿고, 바늘구멍 같은 경쟁사회로 뛰어든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온갖 스펙을 마련하지만 그것들이 사회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쓸모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사회에 우리 자식을 내몰 것인가. 이제는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어떻게? 그것이 내가 이 새벽에 글을 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