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내가 본 대한민국

내가 본 대한민국 (제발, 이젠 더 이상 죽이지 말라!)

박찬운 교수 2015. 9. 27. 09:22

내가 본 대한민국 


제발, 이젠 더 이상 죽이지 말라!


나는 이 새벽에 왜 이런 글을 쓸까? 누가 본다고... 또 누가 이것을 본들 무엇이 바뀐다고... 이 시간에 책이나 읽지... 그 시간에 논문이나 쓰지...

그럼에도 나는 가족들 다 잠자는 이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쓴다. 어둠 속에 고함이라도 지르면 조금 답답한 마음이 뚫릴 것 같은 심정으로 글을 쓴다. 비록 메아리 없는 함성일지라도 나는 지르고 또 지른다. 야! 대한민국! 제발, 좀 바뀌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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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어느 달동네에서 사는 A모녀가 방안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자살했다. A는 남편과 이혼하고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혼자 키웠다. 그녀는 어느 빌딩의 청소원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 왔으나 최근 그것마저 할 수 없게 되었다. 청소용역회사에서 비정규직었던 그녀에게 해고를 통보했던 것이다. 빚은 나날이 늘어가고 채무 독촉은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어제 그녀는 딸과 함께 자살함으로써 한 많은 세상을 마감했다.”


위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서 하루가 멀게 일어나는 자살사건 하나를 상상해본 것이다. 현실로 일어나는 사건은 저 이야기보다 더 비극적이다. 오늘도 저런 사건이 우리 사회 어딘가에서 일어날 지도 모른다.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 사람들의 태도는 둘로 나누어진다.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어렵더라도 살아야지. 죽기는 왜 죽어. 조금만 노력하면 살지 왜 못살아. 사람이 어려움을 극복해야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노력하면 왜 못 사냐. 애는 왜 죽여... 죽으려면 혼자 죽지.”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나라도 그런 상황에선 죽었을 거야. 돈이 원수, 세상이 원수다. 어떻게 홀로 사는 여자가 그 어려움을 감당하겠나. 도와 줄 가족이 있나, 나라가 도와 주나. 애? 이런 세상에서 애만 남기고 어떻게 가나. 같이 가는 게 그래도 낫지.”


당신은 전자에 속하는가? 아니면 후자에 속하는가? 지금의 내가 아닌, 30년 전의 나에게 묻는다면, 전자에 속했을 것이다. 그 때는 모든 불행은 나 자신의 무능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했으니... 그렇게 나는 교육받고, 그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의 생각은 달라졌다. 나는 단연코 후자에 속한다. A는 죄가 없다. 죄는 이 사회, 이 나라에 있다.


지난 2013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하루 평균 약 40명에 달한다. 통계청의 ‘2013년 사망 원인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4,427명으로 1년 전보다 267명(1.9%) 늘었다.


우리의 자살률은 1980년대 초(83년 인구 10만 명 당 8.7명)와 비교하면 400% 가까이 증가했다. 2003년 22.6명으로 ‘자살률 세계 1위’에 처음 오르면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009년 31.0명, 2010년 31.2명, 2011년 31.7명으로 급속히 오르다 2012년 28.1명으로 감소했으나, 2013년 28. 5명으로 다시 상승했다. 특히, 이런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어느 나라와도 비교살 수 없는 압도적 1위다. OECD 평균 자살률이 최근 12명이 조금 넘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는 무려 18명이 많다.


우리나라 자살의 특징 중 하나는 중년 이후 자살률ㅡ2013년 통계로 보면 40대 34.0명, 50대 41.3명, 60대 50.5명, 70대 86.3명, 80대 116.9명ㅡ이 급격히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한마디로 살기 어려워서이다.


노인 자살의 대부분은 경제적 빈곤에서 비롯된다. 중년 이후의 자살의 직접적 원인이 우울증 혹은 스트레스라고 하지만, 그 병의 원인도 따지고 보면 경제적 빈곤과 관련이 깊다. 경제적 빈곤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 사회 안전망이 없다 보니 이들의 정신적 불안을 치유할 방법이 없는 게 근본적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도대체 대한민국, 왜 이러는가. 글로벌 시대에서 세계 1등을 하려면 다른 것으로 해야지 자살률로 1등을 한다? 그것도 지난 10년간 부동의 1등을 차지한다? 이 사회는 분명 병들었고, 지금 죽어가는 사회라고 진단해도 그것을 누가 오진이라 말할 수 있을까. 과연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는가?


근대 사회학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인 에밀 뒤르켐은 자살에서 사회의 영향에 특별히 주목한 사람이다. 그가 쓴 『자살론』은 바로 사회적 자살률에 관한 연구서이다. 뒤르켐의 관심은 자살률에 영향을 주는 것이 무엇이냐에 있었다.


뒤르켐은 우선 비사회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질환, 인종, 유전, 풍토 등과 같은 요인이 자살률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조사했다. 그는 통계학적 분석을 한 다음 이런 것들은 예상과는 달리 자살률과 큰 관련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자살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회’라고 하는 실체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요인이었다. 뒤르켐이 각종 자살 관련 통계에서 발견한 사회적 요인으로서의 자살의 원인은 ‘사회의 응집력’ 혹은 ‘연대력’이라는 현상이었다.


이것은 자살률이 사회의 응집력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의 응집력이 강한 곳은 약한 곳에서보다 자살률이 더 낮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적 자살을 이기적, 이타적, 아노미적 자살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이다.


이기적 자살은 한 사회나 집단의 응집력이 대단히 약화되어 과도한 개인주의가 판을 칠 때 나타난다. 개인은 사회와 어떤 연대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살현상이다.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의 규제와 억압이 존재하지 않거나 모호한 상태, 즉 무규범 상태나 아노미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자살을 말한다. 경제적 위기에서 사회적 규율이 혼란상태에서 발생하는 자살 등이 그런 류에 속한다.


뒤르켐의 자살론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자살의 사회적 측면을 직시하여 그 원인을 탐구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경제적 빈곤은 개인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더 큰 원인은 사회 그 자체에 있다. 낮은 임금, 비정규직, 고용불안 등의 문제는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이다. 여기에서 사회의 응집력과 연대력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생겼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사회가 된 것이다. 약한 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릴 때, 자살은 자연스런 사회적 현상이 되어 막을 수가 없다.


자살을 막으려면 이 사회의 응집력 혹은 연대력을 높여야 한다. 무슨 방법으로? 그것이야 이미 답이 나오지 않았는가? 사회안전망 혹은 복지제도를 확충하는 일이다. 적어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 사람이 죽고 사느냐의 문제는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비극을 막을 수가 없다.


나는 최근(작년 12월) 매우 흥미로운 다큐 프로그램 하나를 보았다. EBS 다큐프라임에서 본 것인데, 그리스와 아이슬란드의 자살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들 나라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 경제가 거덜이 났다.


원래 그리스는 지중해 민족의 낙천성과 자살을 금지하는 정교회 규율 덕분에 유럽 국가 중에서도 자살률이 가장 낮았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하자 자살률은 평소 2배가량 치솟았다.


반면, 아이슬란드는 지중해 민족의 낙천성과는 거리가 먼 북구의 섬나라다. 그런데, 국가부도를 겪은 이 나라는 자살률이 늘지 않았을 뿐더러 최근 조사에서 156개 나라 중 국민행복지수 9위를 기록했다. 같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도, 한 나라는 자살률이 치솟고 다른 한 나라는 자살률에 변화가 없는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사회안전망 곧 복지제도의 문제였다. 그리스는 국가부도 위기에서 복지예산을 대폭 줄였다. 연금생활자는 연금이 반 토막 났다. 실업자들은 거리로 내몰렸고, 과거 같으면 연금으로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젠 그것을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이들의 상실감은 상상 이상이 되었다. 연일 데모가 일어났고, 경제는 더 추락했다.


이에 비해 아이슬란드는 복지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늘어난 복지예산은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더 거두고, 다른 예산을 줄이는 것으로 해결했다. 정부는 적극적으로 노동시장에 개입하여 실업자들에게 직업훈련을 시키고 새 직장을 알선했다. 그렇게 해서 경제는 안정되고 실업률은 낮아졌다. 경제가 살아난 것이다.


아이슬란드의 예는 우리에게 많을 것을 시사한다.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살률이 낮고 행복지수가 높은 북구 복지국가에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자살률을 낮추고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안 할 뿐이다.


대한민국에 외친다. 이제는 더 이상 죽이지 말라!

나는 앞으로 연속되는 글에서 여러 차례 ‘사회 안전망’ ‘복지제도’ 등을 강조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반드시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우리의 경제는 복지국가라는 목표를 향해 재정립되어야 한다.


부자는 세금을 더 내야 한다. 국가는 새는 돈을 막아야 한다. 남북의 긴장을 완화시켜 국방비를 대폭 감축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돈으로 복지제도를 확충하는 그랜드 디자인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