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포효

분노할 땐 분노하자,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꾸길 원한다면

박찬운 교수 2016. 1. 14. 17:35

분노할 땐 분노하자,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꾸길 원한다면






내가 지금 어느 소 영웅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나도 이제 이런 일에선 해방되고 싶다. 이런 일은 후배들이 해주기를 바란다. 그게 솔직히 내 마음이다.


나는 오늘 누구에게 미루지 않았다. 나는 일어섰고 분노를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방금 전에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젯밤 기내에서 한숨도 못 잤으니 몸은 천근만근 무겁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을 쓴다. 잊지 않기 위해, 이런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을 거라는 일종의 사명감이 있기 때문에.


나는 지난 9일간 미얀마를 다녀왔다. 두 번째 미안마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의 주목적은 세계 3대 불교성지로 불리는 바간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 여행은 매우 특별하고도 즐거운 여행이었다. 미안마인 3인과 나 이렇게 넷이서 바간을 중심으로 2천 킬로미터를 차로 누볐다. 나는 이 여행에 대해서 곧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나갈 것이다.


이 피곤한 순간 나는 미얀마에서 일어난 불쾌한 순간을 회상한다. 그리고 그것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말해야겠다. 나는 어제 밤 12시 40분 발 아시아나 항공을 타고 양곤에서 인천으로 오기로 되어 있었다. 밤 열시 경 공항에 도착해서 체크인 수속을 밟았다. 그런데 데스크 직원이 느닷없이 탑승은 새벽 4시 반에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사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200명이 넘는 승객들이 어젯밤 대합실에서 밤을 새웠다. 미안마라고 해서 항상 더운 나라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거기도 지금은 겨울이다. 밤엔 두툼한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날씨에 대합실의 의자에 누워 밤을 샌다고 생각해 보라.


대부분 승객들이 체크인을 끝낸 이후 5시간이 넘도록 항공사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씨 착한 호구승객이라도 이런 상황이 되면 화가 나지 않을 순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와서 항공기가 왜 이렇게 늦게 뜨게 되는 지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행기는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이륙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박교수, 참지! 뭐 세상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또 한 구석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박변호사, 법률가가 도대체 뭐야! 이럴 때 능력을 보이라고 배운 것 아니야?”


많은 승객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비행기 많이 타봤지만 이런 항공사는 처음이다, 아니 승객을 짐짝처럼 던져놓고 코빼기도 안 보인다는 게 말이 되냐... 어떤 승객은 승무원을 불러 항의를 하기도 했다. 승무원은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도 자연재해 운운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늘어놓았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승객 여러분, 제가 한 마디 하겠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법률가이자 로스쿨에서 내일의 법률가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번 사태는 승객이 참을 수 있는 한도를 넘었다고 봅니다. 저는 아시아나 항공사에 사과를 받아낼 겁니다. 소액이라도 적절한 보상을 요구할 것입니다. 저와 동참하겠습니까?” 이 말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사무장을 불렀다.
“본사에 다음 사항을 연락하세요. 지연운항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 승객에게 적절한 보상조치를 취할 것, 만일 이런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적절한 법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기대를 갖고 기다렸지만 두어 시간이 지나서 돌아온 답변은 자연재해로 어쩔 수 없었다는 말뿐이었다. 나는 다시 일어났다.
“승객 여러분, 이 항공사가 승객을 어떻게 대할 지를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을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저는 다음 사항을 제안합니다. 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하면 일어서지 마십시오.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책임자를 불러 사과를 받고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협상대표로 위임해 주십시오. 제가 지금 작성한 위임장에 성명과 주소 등을 적어 주십시오.”


드디어 비행기는 오늘 정오를 넘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앞좌석에 있는 승객들은 비행기에서 빠져나갔지만 내 좌석 부근 승객 150여명은 자리를 지켰다. 나는 책임자가 기내로 들어와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런 일에 이골이 난 항공사도 만만한 게 아니었다. 승객들에게 한편으론 빨리 기체 밖으로 나갈 것을 읍소하면서, 또 한편으론 그러지 않으면 항공법 위반이라고 협박을 했다.


승객들의 얼굴을 보니 피로감이 밀려오는 모양이다. 다들 빨리 나가고 싶은 눈치다. 이러는 사이 나를 협상대표자로 위임하는 위임인이 96명을 넘었다. 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항의를 하기 위해선 전략을 바꿔야 했다.


“승객 여러분, 제게 많은 분들이 위임장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조금만 참고 기다리십시오. 제가 반드시 적절한 결론을 내겠습니다. 일단 비행기 밖으로 나가 모여 주십시오. 그 사이 제가 협상을 벌리겠습니다.”


이런 일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확히 사과를 받는 것과 소액이라도 보상금을 받아내는 것이다. 그래야 항공사에 일정한 교훈을 줄 수 있다. 나와 책임자 간에 오고간 이야기를 여기에 다 쓸 수는 없다. 결국 나는 이런 합의각서를 책임자로부터 받아냈다.


1. 지연운항과 관련하여 공식적으로 서면사과를 한다.
2. 승객들에게 위로금 조로 미화 50불 상당의 바우처를 지급한다.


많은 것을 기대한 사람들에겐 좀 싱거운 합의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승객이 지쳐있어 한시라도 빨리 공항을 벗어나고 싶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 정도의 합의라도 승객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합의사항을 낭독하는 순간 승객들은 공항이 떠나가도록 박수를 쳤다.


한 순간의 해프닝이라면 해프닝이다. 하지만 누구도 당해보지 않으면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떤 권리를 주장할지, 어떻게 상대로부터 사과를 받아낼지 막막할 것이다. 이런 일에 나 같이 목소리를 높인다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는 나서줘야 한다. 오늘은 내가 나섰다.


세상을 바꾼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조금씩 변하는 것이다. 만약 어느 누구도 나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그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항공사의 지연운항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마저 사라질 것이다.


오늘 나와 승객들은 분노를 표시했다. 적어도 그 정도의 분노는 필요한 게 아닌가? 나는 과거 이런 유의 경험을 적지 않게 했다. 이런 상황에 있다 보면 가슴이 끓어올랐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포효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 분노가 하루가 다르게 무뎌진다. 마음속에선 “이젠 내가 이런 일을 할 군번이 아닌데...” 하는 음성이 들려온다.


아, 이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것 하나는 이것이다. “젊은 법률가들이여! 세상의 불의를 보면 분노하라. 세상은 당신들의 분노를 기다린다. 법률이란 이렇게 선용하면 강력한 칼이 된다. 당신은 그 칼을 어디에 쓸 것인가?"


(참고사항: 만일 제 옆에 혈기방장한 젊은 변호사 한 사람이 있었다면 집단소송해 보라고 권했을 겁니다. 저는 지금 로스쿨 교수라 변호사 업무를 할 수 없습니다. 잠시 그게 한이 되더군요!)


(2016. 1. 14)


-------


1월 19일 아시아나 항공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가 왔다.


박찬운 교수님께

안녕하십니까?

먼저 저희 아시아나항공을 선택하여 이용해주신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교수님께서 지난 01월14일 당사 항공편을 이용하시는 과정 중에 항공기의 장시간 지연운항이 발생하여 걱정과 불편을 끼쳐드리게 된 점, 회사를 대표하여 정중히 사과 드립니다.

교수님께서 말씀주신 01월14일 양곤-인천행 OZ770편의 출발 지연이 발생된 경위를 아래와 같이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항공편은 다른 노선을 운항하는 항공편과 연결되어 운항이 되고 있으며, 당사에서도 최대한 정시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스케줄 운영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기상,항공기
결함 및 이로 인한 항공기 연결 등 당사가 예측할 수 없었던 원인으로 지연이 발생되기도 합니다. 당일 이용하신 인천행 OZ770편은 선행편인 인천-양곤 항공기는 인천공항의 강설로 인한 항공기 연결로 최초 30분의 지연출발을 하여 운항하고자 하였으나, 이륙준비를 마친 해당 항공기가 활주로로 이동하는 과정 중 항공기를 밀어주던 토잉카가 빙판에 미끄러지면서 항공기 바퀴의 조향센서를 자극하여 그 수치가 기준을 벗어남에 따라 긴급정비상황이 전개 되었습니다. 결국 해당 항공기가 단시간내에 수리를 마치고 안전한 운항을 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항공기의 교체를 결정할 수 밖에 없었고, 불가피하게 해당편을 장시간 지연(04시간02분)하여 운항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선행편이 양곤공항에 지연 도착함으로 말미암아, 교수님께서 이용하신 OZ770 편이 4시간16분을 지연하여 양곤공항을 출발하게 되었던 바, 고객이 큰 불편을 겪는 지연 상황에서 양곤 공항 및 인천공항의 직원 안내가 미흡했던 점에 좀 더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과 드립니다. 차후 부득이한 비정상운항 발생 시 직원들의 정확한 정보 제공과 적극적인 응대, 신속한 후속조치로 고객님들의 불편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개선하겠습니다.

차후 동종의 상황하에서 보다 고객의 편의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하는 한편, 모든 고객분들께 보다 편리하고 안전한 항공 여행을 제공해 드릴 수 있도록 끊임 없는 연구와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 드립니다.

폐사를 위해 고견 전해주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항공편 지연 및 직원 응대로 불편을 드리고 불쾌한 마음으로 모시게 된 점 거듭 사과드리며, 정시성 향상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조금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갑자기 매서워진 겨울 한파 건강 유의하시고 2016년에도 댁내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01월 19일
아 시 아 나 항 공 주식회사 
고객만족팀장 최병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