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

박찬운의 여행독법 7원칙-걷고, 바라보고, 머물고, 기록하는 여행의 방식-

박찬운 교수 2025. 12. 10. 06:04

박찬운의 여행독법 7원칙

-걷고, 바라보고, 머물고, 기록하는 여행의 방식-

 

타클라마칸 여행 중 키질석굴 앞에서

 
나는 지난 30년간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여행가라고 부른다. 앞으로도 내가 가야 할 곳은 많다. 누구 말대로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다. 오늘 아침 나의 여행을 잠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내게 여행은 무엇이었던가?

나의 여행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나는 여행을 통해 세계를 다시 배우고, 그 세계를 비추어 나 자신을 다시 읽는다. 법률가로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여행은 내 삶의 또 다른 학교였다. 길 위에서 나는 인간의 존엄과 상처, 기쁨과 고독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 사유는 자연스럽게 글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여행을 정리해 보니 내 여행에는 일곱 가지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여행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태도이자, 결국 내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철학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그것을 소개한다.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 앞에 있는 필자. AI에 부탁해서 그린 그림

 
1. 걷기 — 나의 여행은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나는 걷기 전에는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발걸음을 내딛고 도시의 바람과 소리와 냄새를 온몸으로 받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내 여행은 시작된다. 속도가 빠르면 세계는 스쳐 지나가지만, 걷는 동안 세계는 나에게 말을 건넨다. 걷는 일은 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을 열어주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다.
 

남미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

 
2. 바라보기 — 보이는 것 너머를 읽으려는 노력
나는 풍경을 단순히 ‘본다’는 느낌으로 여행하지 않는다. 영어로 말하면 나의 여행은 to see보다는 to catch를 하는 여정이다. 풍경 뒤에 숨은 시간, 그 공간을 살아온 사람들의 삶, 도시가 품고 있는 구조와 기억을 읽으려 한다. 시장을 스치는 소음, 골목의 벗겨진 벽, 사람들의 눈빛 하나에도 그 사회의 층위가 겹겹이 담겨 있다. 여행이 내게 주는 선물은 눈앞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 뒤의 의미다.
 

이스탄불 갈라타 타워에서

 
3. 머무르기 —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깊이
많은 사람들은 도시를 ‘소비’하듯 여행하지만, 나는 한 장소 앞에서 조금 더 멈추려 한다. 머무름은 공간을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하고, 그 장소가 나에게 말을 걸 기회를 만들어준다. 빠른 이동보다 한 걸음 느린 체류가 더 많은 것을 남긴다. 머무르는 동안 비로소 나는 그 도시와 조용히 연결된다.
 

미얀마 바간에서

 
4. 성찰하기 — 낯선 공간에서 나를 다시 읽는다
여행은 외부 세계를 만나는 일이지만, 동시에 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다. 나는 새로운 공간에서 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이 장면 앞에서 멈추었을까?” 이 질문은 나의 감정과 생각의 뿌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여행은 결국 나를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일이다. 여행을 통해 나는 “타자로서의 나”를 만난다.
 

이란 이스파한

 
5. 기록하기 — 글을 쓰기 전에는 여행이 끝나지 않는다
나는 여행 후 글을 쓴다(이를 위해 여행 중 호텔 방 침침한 등불 아래에서 집요하게 메모를 한다). 적어도 여행다운 여행을 했다면 글쓰기는 하나의 책무에 가깝다. 남미에서 한 달을 여행하고 돌아온 뒤 20일 동안 쉬지 않고 여행기를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글쓰기는 여행을 다시 살려내는 과정이며, 산만한 기억과 감정을 구조화하는 작업이다. 언어로 옮겨질 때 비로소 여행은 나의 것이 된다. 고로, 내게 글쓰기는 여행의 마지막 단계이자 완성이다.
 

미국 아리조나 모뉴멘트 벨리

 
6. 비워두기 — 우연을 받아들일 자리 만들기
나는 여행 계획을 과하게 세우지 않는다. 여행의 진짜 장면은 계획된 곳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서 나타난다. 길을 잘못 들어 만난 풍경, 우연한 대화, 스쳐 지나간 표정에서 여행의 생명력이 피어난다. 마음의 빈자리를 남겨두어야 여행이 나를 채울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레기스탄

 
7. 인간의 삶을 관찰하기 — 결국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일
세계 어디를 가든, 결국 나는 사람에게서 여행의 의미를 발견한다. 거리에서 만난 노인의 눈빛, 시장에서 땀 흘리는 상인의 손,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아이의 표정. 이 모든 경험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삶의 무게를 읽어낸다. 나는 도시를 보지만, 그보다 먼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본다. 여행은 자연을 향한 시선이자, 인간을 향한 시선이다.
 

모로코 마라케시

 
맺으며
이 일곱 가지 원칙은 내가 세계를 만나고, 나를 돌아보는 방식이다. 나는 여행을 통해 배우고, 글쓰기를 통해 정리하며, 다시 여행을 통해 삶의 균형을 채워왔다. 나의 여행은 늘 두 번 이루어진다. 한 번은 발로 걷는 여행이고, 또 한 번은 문장 속에서 다시  기억을 살리는 여행이다. 그 두 여행이 겹쳐질 때 비로소 나는 더 깊어진다. 그리고 그 깊어짐이 나를 다시 길 위로 이끈다. (2025.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