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내가 본 대한민국

내가 본 대한민국(격정시대를 산 우리들)

박찬운 교수 2015. 9. 27. 17:26

내가 본 대한민국 


격정시대를 산 우리들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가 살아온 시대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은 격동의 시대, 격정의 시대, 혹은 낭만의 시대를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금과는 시대가 달랐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 조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아니, 신뢰해야 한다. 우리도 늙을 것이고 분명히 그런 말을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나의 부모님세대는 어린 시절에는 식민지를, 청년기에는 전쟁을, 3-40대는 4. 19 학생혁명과 5. 16. 군사 쿠데타를 경험하고 살았다. 그분들은 절대적인 빈곤을 경험한 세대였다. 밥이 없어 밤마다 배불리 먹는 꿈을 꾸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세대다. 교육을 제대로 받았는가? 나의 조부모 세대는 무학세대이고, 부모님도 가까스로 중등교육을 받았을 뿐이다. 그것도 어머니는 전쟁 통에 다니시던 학교를 중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 아버지가 내 초등학교 시절(70년대 초) 시골 면장을 지내셨는데, 월급이 3만원을 넘지 못했다. 어머니는 날이면 날마다 돈 걱정을 하셨다. 그런 이유로 일찌감치 내게 꿈이 하나 생겼다. 그게 뭔지 알겠는가? 우리 아버지의 월급 3배 이상을 받는 직업을 갖는 것이었다. 월급 10만원! 그게 내가 어린 시절 꾼 꿈 중 가장 알짜배기 꿈이었다.


이런 시대를 살아오신 나의 부모님세대를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그래, 격동의 시대라 말하자. 시대는 극적으로 요동치면서 민초의 삶을 괴롭혔다.


그렇다하여 나의 부모님세대가 아무런 낭만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분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분들도 오늘날 사람들이 모를 세계가 있었고, 나름 인간으로서 풋풋한 낭만이 없지 않았다. 식민지의 엄혹한 하늘 아래에서도,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사랑은 꽃피었고, 문학은 익어갔다.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1955년)에서 이런 구절을 남겼지 않았는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호주머니 속엔 아무 것도 없는 빈 털털이라도 가슴 한 가운데에는 낭만의 강물이 흐른 세대, 그것이 나의 부모님세대였다. 그러나 한 가지는 염두에 두자. 낭만이란 것도 사실은 배운 사람들에게나 해당된 것이었지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겐 그저 사치스런 일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는 지금 50대다. 이름 하여 베이비부머 세대다. 5. 16. 군사 쿠데타(1961년) 즈음에서 태어나 개발독재의 한 가운데를 살아왔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면서 무장공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건(1968년)을 들으며 자연스레 반공투사가 되었다. 나는 곧잘 반공웅변대회에 나가 목청을 높이면서 북한의 만행을 고발했다.


나의 초중등학교 시절은 서슬 퍼런 권력이 비판의 싹을 죽이던 시절이었다. 세상은 어수선하더니 곧 이어 10월 유신(1972년)이라는 초헌법적 조치가 발표되었고, 이 나라는 사실상 종신통령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1974년)이 일어나 무고한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징역가고, 사형을 당했다.


독재의 명분은 배불리 먹여준다는 것이었으니 새마을 운동(1970년 시작)이라는 마취제는 국민들의 저항을 잠재웠다. 아침저녁으로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하는 노래 소리가 전국 어디서나 들렸다. 그 시절 우리는 “천 불 국민소득, 백억 불 수출”이라는 표어가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고, 국산 모델 제1호 자동차 포니가 출시(1976년)되는 것을 흑백 티브이를 통해 보면서 환호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10. 26(1979년)이라는 변고에 의해 국부가 시해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한순간 망연자실했다. 절대적 지도자를 무조건적으로 존경하도록 훈련받았던 나는 박정희 없는 대한민국을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그 뒤 12. 12. 군사정변(1979년), 광주민주화항쟁(1980년), 6월 민주항쟁과 직선제 개헌(1987년)을 거치면서 20대 청년기를 보냈다. 그 사이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30대 중반엔 IMF 금융위기(1997년)를 겪었다. 그런 중에서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성장하여 두 번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헌정사에서 이질적인 인물 노무현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부엉이 바위 위에서 몸을 던져 유명을 달리했다(2009년). 다시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 이명박 정권은 삼천금수 강산을 4대강 사업으로 뒤집어 놓고, 자원외교를 한다면서 천문학적 규모의 국고를 탕진했다. 그리고 급기야 이 글을 쓰고 있는 2014년 지금, 우리는 영원히 간 줄만 알았던 독재자, 그 딸이 대통령이 된 나라에서 살고 있다.


비록 식민지 시대의 엄혹한 시련도 아니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생명의 안위를 절대적으로 걱정하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결코 만만한 시대는 아니었다. 그 정도면 또 다른 질풍의 시대요, 남다른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대의 부침 속에 살아 온 우리들은 한편으로 울고, 또 한편으론 환희의 날을 살았으니, 그것을 격정의 시대라고 표현한들,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랴.


격정의 시대에 살았던 우리들의 자화상은 그리 떳떳한 것만은 아니었다. 누구는 민주화를 위해 앞장 서 감옥도 갔지만, 누구는 그와 관계없이 양지만을 쫓았다. 절대적 빈곤보다는 상대적 빈곤이 심화되는 사회가 될 때, 우리는 상대적으로 잘살고, 상대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길 원했다. 마음 한 가운데는 정의가 불타고 있었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불의와 혼동되었고, 정의의 편에 선다고 하면서도 불의는 소리 없이 찾아와 화합이라는 미명 하에 시대를 왜곡했다.


그 시절 우리들은 이상과 허무 사이를 오가면서 고뇌했다. 나와 동시대의 작가 최영미는 그의 대표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격정의 세월을 보낸 뒤의 허전함을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그 시대를 살아 온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렸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랬다. 한편으론 민주화를 위해 몸을 불사르는 것 같으면서도, 기실 그것은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정도의 멋이었을 뿐이었다. 남들 (민주화) 운동하니 후일 보험 든다는 생각으로 그저 장단이나 맞추었던 것이다. 운동장에서는 대의를 위해 목청을 높였지만, 불 꺼진 카페의 음침한 칸막이 안에서는 달콤한 키스로 불타는 청춘을 달랬다. 그러나ㅡ최영미의 말대로ㅡ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런 시대에 민주화를 외치면서, 한편으론, 달콤한 키스라도 하면서 살아온 사람은 그래도 그 시대의 행운아였다. 많은 이들이 이런 경험조차 하지 못하고 어쩌다 나이만 먹었다. 지금은 고교졸업생의 8할이 대학에 가지만 나의 시대는 4할이 채 못 가는 시대였다. 많은 친구들이 대학 간 친구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차디 찬 삶의 현장을 벗어나질 못했다. 그들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하고,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에게 낭만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이들은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고 싶어도 동참하지 못했다. 그런 것 자체가 이들에겐 사치스러운 것이었기에... 원래 시대의 의미를 찾고, 그 시대의 본질을 캐는 사람들은 지식인들이다. 그 사람들은 아픔을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론 낭만을 찾는다. 행복의 조건은 여기서 나온다. 사람이 비록 어려워도 그 의미를 이해한다면 그는 언젠가 그 삶을 극복할 수 있다. 아니, 극복 못하면 어쩌랴. 그는 최소한의 행복을 누릴 자격은 되는 사람이다.


그 대열에도 끼지 못하고 살아 온 수많은 사람들, 시대의 민초들은, 그저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를 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주변엔 그런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나의 형제들이 그렇고, 일가친척이 그랬다. 우리가 어찌 이들을 잊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격정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성장의 마지막 과실을 따먹은 행운아였다. 그 때도 경쟁이야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 배운 사람들은 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을 구하지 못하진 않았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노동의 기회는 많았다. 나와 친구들은 학교를 졸업한 뒤 곧 직업을 가졌고, 결혼을 하였으며, 아이를 낳았고, 차를 샀으며, 집을 장만했다.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90년대 한참 직장을 다니면서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가는 후배들을 오렌지족이라 불렀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사는 젊은이를 볼 때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90년대 후반 찾아 온 IMF 금융위기 이후 그들의 삶은 빛을 잃었다.


그들 대부분은 풍요 속에서도 빈곤을 느끼며 산다. 부모세대는 어렵게 성장했더라도 그 결실을 맛보았건만 자신들의 미래는 그런 성장 가능성이 없다며 한탄한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그늘이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저성장 시대에 돌입한 이 사회의 불행한 세대가 되었다. 내 두 딸이 그들 세대를 이으면서 미래가 없다고 탄식할 줄이야... 나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