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내가 본 대한민국

내가 본 대한민국(학벌 카스트 사회, 대한민국)

박찬운 교수 2015. 10. 18. 11:27

내가 본 대한민국


학벌 카스트 사회, 대한민국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죄송해요.” 


2013년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권모 군(16)이 죽기 전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다. 학업 성적 전국 2%, 경북 포항의 자율형 사립고에서도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우등생이었지만, 권 군이 투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모순적이게도 ‘학업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2013. 4. 13. 자 국민일보)


10대 자살이 사회적 문제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5-19세 청소년 사망 중 자살이 차지하는 비율이 2000년 13.6%에서 2011년 36.9%로 급증했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1천여 명의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 성적비관과 입시 스트레스가 주된 이유다. 자살을 생각한 십대 절반 이상이 성적 진학 문제로 자살충동을 느껴보았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우리나라 학벌의 상징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저 학교를 들어가면 인생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가 청소년들을 입시경쟁으로 내몰기에 일어나는 것이니 이들의 자살은 이름하여 사회적 타살이다. 우리는 이런 입시경쟁의 이면에는 대학서열과 그에 따른 학벌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데 긴 토론을 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에서 사람답게 사는 방법은 일류대학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존심을 가지고 살 수가 없다.” 한국인들은 이런 강박관념 속에 사는 것이다.


나는 이제껏 공개석상에서 단 한 번도 이 문제를 거론한 적이 없다. 언젠가 한번 제대로 말할 날이 올 것이라 기다리면서 애써 외면해 왔다고나 할까. 오늘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학벌(學閥)의 사전적 의미는 ‘출신 학교나 학파에 따라 이루어지는 파벌’이란 뜻이다. 세상사가 유유상종으로 이루어지니,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고향을 찾고, 혈연을 찾는 것은 어쩜 당연하다. 거기에다 특정학교를 나온 사람들끼리 특별한 연대감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게 볼 것은 아니다. 이런 정도의 학벌의식은 동서고금의 보편적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보편적 현상이 왜 유독 대한민국에서는 큰 문제가 될까? 그것은 학벌이란 게 이미 한 세기 전에 공식적으로 폐지된 신분제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특정 학벌을 갖지 못하면 공직의 상층부에 진입하기 어렵고, 민간영역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넘볼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이것은 각 언론사가 정부 개각 이후 대학별 장관 수나 100대 혹은 500대 기업 CEO 중 출신대학별 수를 보도할 때마다 확인된다.




위 고려대학교, 아래 연세대학교. 이 두 학교는 서울대를 포함해 SKY라는 대한민국 학벌체제를 구축한다.


학벌문제를 철학적으로 인식하면서 그 폐해와 대안을 집요하게 천착한 철학자 김상봉은 대한민국을 학벌사회로 규정하면서 그 실체를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서울대는 한국의 지배계급이다. 한마디로 말해 서울대는 권력이다. 한국사회는 서울대 학벌을 정점으로 하여 그 아래 연·고대를 비롯하여 다수의 차상위 학벌집단 그리고 다시 그 아래 중위권, 하위권 이런 식으로 학벌에 따라 권력이 차등 분배되고 그에 따라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이 발생하는 사회이다. ... 학벌은 모든 종류의 권력을 불평등하게 배치하는 기제인 동시에 경제적 불평등을 결정하는 배치기제이기도 한 것이다.”(김상봉, <학벌사회>, 한길사, 84쪽)


그렇다, 김상봉의 말대로 학벌은 권력의 문제다. 특정 학벌이 정·관·재 등 모든 권력을 독점하니 자라나는 청소년들, 그 중에서도 공부깨나 하는 친구들은 이 특정학벌에 진입하기 위해 기를 쓰는 게 현실이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매우 문제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젊은 시절 자신이 해왔던 방식대로 나이가 들면 자식들에게 그것을 강요한다.


학벌이란 권력의 문제이면서 개인의 인격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한 개인의 자신감은 대학서열 구조에 연동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위 명문대 출신들은 비명문대 출신에 비해 인생을 자신감 있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그 출신이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한 경우이다. 이런 경우에는 비서울대 출신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며 오히려 열패감은 더할 수도 있다.) 내 주변에서도 평소 소심했던 아이가 서울대에 들어간 이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 혹은 그 반대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참, 재미있는 나라다!



박근혜 정부 2기 각료명단(일부 인사는 청문과정에서 낙마). 대학을 보면 특정대학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비명문대 출신은 소위 학벌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위축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은 대학을 나오고, 박사학위를 갖고, 교수가 되었어도 어쩐지 자신감이 없다. 내 주변을 살펴보아도 비서울대 출신 교수들은 서울대 출신 교수들이 자신들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쩜 교수사회의 파벌의식은 이런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싹트는지도 모른다.


학벌 콤플렉스는 비서울대 출신 중에서 유난히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도 발견된다. 비서울대 출신이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해서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쳐 매사가 과유불급한 사람 있다는 것이다. 아차! 말하고 보니 혹시 이게 나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닐까? ㅎㅎㅎ.


사람들은 나를 두고 당신은 학벌 문제에서 해방된 사람 같다고들 말한다. 나로선 고마운 평가다. 내가 표정관리를 잘해서 그런가? 나의 이력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비서울대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외국 유학을 했으며,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다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공직을 거쳐 대학교수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학벌사회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이 아닐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나도 학벌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아니, 자유롭기는커녕 매일같이 이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지 내 삶에 영향을 끼쳤다고 고백하는 게 맞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일찌감치 학벌 콤플렉스를 내 자신의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저 사람은 학벌사회와는 관계없이 잘 사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귀게 된 친구 중 상당수가 서울대 출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법조계는 유난히 서울대 출신이 많지 않은가. 내가 사법시험에 합격할 때는 전체 합격생 중 반수가 서울대 출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니지만, 초년 시절에는 마음 상하는 일이 많았다. 처음 만나는 법조선배가 대뜸 “박변호사, 법대 몇 학번이야?”라고 물을 때는 어떤 대답을 하여야 할지 몰랐다. 이 질문이 사실 간단한 질문 같지만 비서울대 출신들에겐 여러 가지 뉘앙스로 들렸기 때문이다.


사법시험은 학벌사회에서 가난하고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의 신분상승의 출구가 되어  왔다. 이제 곧 폐지의 위기에 있다보니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법시험을 희망의 사다리로 보는 것이다.


비서울대 출신인 내게, 이 질문은 ‘당신도 나와 같이 서울대를 나온 것이 분명하니 몇 년 후배인지 알고 싶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이 질문은, 나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법조계가 다 서울법대 세상이라는 말인가’라는 반감을 주기 알맞은 것이었다.


나의 경험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비서울대 출신이 자신감을 갖고 사는 건 보통 노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두 단계를 거쳐야 이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그들은 자신이 매우 유능한 사람임을 눈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들은 서울대 출신보다 평균 1.5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들에겐 무능력추정원칙이 적용되므로ㅡ이에 비해 서울대 출신은 유능력추정원칙이 적용된다ㅡ노력과 결과로서 자신의 능력이 서울대 출신과 비교하여 다르지 않음을 증명해야 한다.


둘째, 능력만 보여줘서는 안 되고 이제 마음 수양단계를 거쳐야 한다. 차별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스스로 극복하고, 인간사에서 무슨 출신 운운하는 게 별 것 아니라는 것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럴 때까지 끊임없이 마음 수양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도인이 되라는 말이다!


만일 이 두 단계를 성공적으로 거치면 비서울대 출신이 서울대 출신을 능가할 뿐 아니라 오히려 성공의 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다. 이런 인물 중에서, 가물에 콩 나듯하긴 하지만, 소수자 우대정책의 혜택을 받고, 대법관에 발탁되기도 하고, 총리, 장관이 되기도 한다. 다만, 하나 주의할 것은 이런 사람이라도 개성이 세면 곤란하다. 그런 사람은 우리 사회의 기존질서를 깰 수 있으니 결코 발탁의 주인공이 되긴 어렵다.


학벌문제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학벌이 학연으로 작용해 능력본위의 사회를 만드는데 장애요인이 된다고 비판한다. 한마디로 불공정하다는 것인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비명문대 출신이란 이유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불공정함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유능한 명문대 출신이 사회 전 분야를 독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다.


서울대(조금 넓히면 연·고대)는 현재와 같은 구조 하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우수한 인재를 독점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대학 서열 체제에서는 불가피하게 학생능력도 차등화 된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유능한 학생은 서울대를 중심으로 몇 개 대학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심화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아래 서열에 속하는 대학에는 우수한 학생이 거의 들어오지 않음으로써 공고한 ‘서열=능력’의 구조화가 이루어진다.



김상봉 교수가 쓴 <학벌사회>


이런 현상은 지난 30년 동안 악화 일로를 걸어왔다. 생각하면 과거에는 우수한 인재가 서울대와 특정대학으로만 간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는 지방 국립대 등을 포함해 상당수 대학에 들어갔다. 지금 지방대나 비명문 사립대의 자교 출신 교수들은 그런 우수학생들이 그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그와 같은 현상은 현격히 줄어들었다. 지방의 우수한 학생들이 죄다 서울로 몰려오니 지방대 출신이 그 학교에서 교수가 되기 어렵게 되었다. 옛날 같으면 지방대 출신들이 갈 수 있는 자리를 이제는 서울대와 몇 개 명문대 출신들이 차지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벌폐해를 막는 최선의 방법이자 목표는 인재의 분산이다. 서울대와 몇 몇 명문대학에 우수 인재가 상대적으로 많이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순 없지만ㅡ이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는 현상이다ㅡ그들 대학이 우수인재 전체를 독점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들이 우수 인재를 독점하면 그들 학교 출신만으로도 한국 사회의 모든 노른자위는 채워질 수 있다. 따라서 이들 학교의 정원을 통제해서라도 인재집중을 막고 인재가 분산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오늘 이 짧은 지면에서 학벌폐해를 막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진 않겠다. 다만 이 문제를 연구한 김상봉 교수의 해법 리스트만 열거해 보고자 한다.


“서울대 학부의 한시적 폐지, 서울대의 대학원 중심 대학으로의 전환, 공직자 지역할당제, 고시제도의 개혁, 준 공직영역에서의 독점 제한, 입사원서 학력 란 폐지, 국·공립대 사이의 상호개방, 수능폐지와 자격고사의 도입, 실업계 및 전문교육기관의 육성...”


만시지탄이지만 학벌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문제를 방치하면 대한민국은 학벌 카스트라는 신분제에 질식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우리의 사랑스런 자식들이 미래를 비관하면서 하나 둘 부모의 품을 떠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2014년 말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것을 수정하고 편집한 것이다. 2015. 1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