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반 고흐 그림이야기(선집)

반 고흐그림이야기 45화(고흐 그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팔리다!)

박찬운 교수 2015. 9. 28. 05:36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이야기 제45화

<고흐 그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팔리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제대로 평가를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많은 위인들이 죽은 다음에야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화가들의 세계를 보면 더욱 그렇다. 야속하지만 이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그림 값으로 결정된다. 생전엔 종이 값도 받지 못하다가 사후엔 천문학적 가격으로 거래되는 그림들을 그린 화가들이 있다. 그들 삶을 생각하면 할수록 애석하기 그지없지만 이미 그들은 이생의 사람들이 아니다.


한국인 누구라도 최고의 화가로 좋아하는 이중섭(1916-1956)! 그는 나이 40에 가족과도 연락이 끊긴 채 쓸쓸히 병사했다. 이중섭은 생전에 대표작 <황소>을 비롯해 적지 않은 그림을 남겼지만 한 점 제대로 팔아본 게 없다. 이중섭만이 아니었으리라. 식민지와 전쟁이란 척박한 환경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화가들이 있었지만 생전에 그들 작품이 대중으로부터 제대로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다.


이중섭의 <황소>. 이 그림이 2010년 서울 옥션에서 35억6천만 원에 거래되었다.


이중섭의 그림이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사후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다. 그는 가난에 시달려 종이조차 구할 수 없어 미군이 버린 담배 은박지로 그림을 그렸다. 생전에 그가 자신의 그림이 후일 얼마나 많은 사람에 의해 사랑받을지, 얼마나 높은 가격으로 거래될지ㅡ 그의 대표작 <황소>는 2010년 서울 옥션에서 35억6천만 원에 낙찰되었다ㅡ조금이라도 예상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이런 상상은 그에겐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고흐가 좋아한 네덜란드의 선배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는 어땠는가? 그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화가였다. 영화화되기도 한 그림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바로 그의 대표작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명화 중 하나다. 이 그림을 얼마나 좋아 하는지, 집에도, 연구실에도, 그 프린트가 벽에 걸려 있고, 최근에는 핸드폰 배경화면으로도 설정했을 정도다. 이 그림은 지금 네덜란드의 국보나 마찬가지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현재 헤이그의 마우리츠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네덜란드의 국보급 명화다.


그가 그린 그림이 35-6점 남아 있는데, 서구 미술관 중 어느 곳이라도 그의 그림 한 점만 있으면 그 미술관의 격이 달라진다. 그림 값? 너무 희귀해 경매시장에 등장했다는 이야기마저 들은 바 없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의 그림을 소장할 수 없으니 대형위작 사건의 표적이 되곤 했다. 아마 베르메르 진품 작품이 지금 경매시장에 나온다면 천문학적 가격으로 팔릴 것은 불문가지다.


이렇게 그의 작품이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베르메르는 생전에 무명 작가였다. 그림을 그려 팔았지만 그의 그림은 당시 많고 많은 삼류화가의 작품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사후에도 오랜 기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죽은 지 2백년이 지나, 한 평론가의 글 하나 때문이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베르메르의 이름은 세기의 명화로 인정되는 그의 그림과 함께 영원히 잊혀 졌을 것이다.


고흐는 어땠는가? 그만큼 생전과 사후 평가가 극명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10년간 화가로서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려 900여 점의 유화를 남겼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고, 가난한 삶을 면치 못했다. 동생 테오마저 없었다면 그는 붓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형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테오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그는 이렇게 형을 위로하기도 했다.


“3월에는 이곳 파리시의 전시관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새로운 전시를 할 계획이래. ... 이제 우리는 성공이 찾아오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해. 분명 형은 살아 있을 때 성공을 거두게 될 거야. 일부러 나서지 않아도 형의 아름다운 그림들 때문에 저절로 이름이 알려지게 될 거라고.”(1890년 1월 22일 테오의 편지)


그러나 테오의 바람, 아니 고흐의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흐는 살아 있을 때 큰 인정을 받지 못하고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고흐 사후 그가 남긴 그림의 운명은 어땠는가.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의 그림은 세상 모든 사람들, 동서양을 불문하고, 찬사에 찬사를 받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보면서 영혼의 그림이란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 찬사에 맞춰 그가 남긴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올라, 경매장에서는 한 점에 무려 1억불에 가깝게ㅡ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가셰 박사의 초상>은 1990년 미국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8,250만 불에 거래되었다ㅡ거래되고 있다. 상상을 해보자. 그의 그림 모두(유화 900여점과 드로잉 1,100여점)가 한꺼번에 경매에 나온다면 그 평가액이 얼마나 될까? 단순히 계산해 보아도 웬만한 나라 1년 국가총생산을 넘을 것이다!


1888년 11월 작 <아를의 붉은 포도밭>


오늘 조금은 서글프지만, 아니 그래도 흥미 있을, 작품 하나를 소개한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팔린 딱 한 점의 그림이다.(여기에는 최근 이설이 등장했다. 일부 전문가들 주장에 의하면 고흐의 그림 중 이것 말고도 팔린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선 통설적 견해를 받아들이자.) 1888년 11월 아를에서 그린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그림은 현재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에 걸려 있는데, 그 작품 앞을 지나가는 관객들은 이 그림이 발산하는 아름다움에 자연스레 발길을 멈춘다. 그리고 그 작품이 고흐의 작품임을 아는 순간, 고개를 끄덕인다. 더욱, 그것이 고흐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팔린 그림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탄성을 지른다. 그들은 조용히 우리들의 친구 빈센트의 아름다운 영혼이 깃든 이 그림에 경의를 표하고 마음의 꽃다발을 바친다.


자, 그럼 이제 이 그림을 나와 함께 한 번 감상해보자. 이 그림은 포도농장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전경에는 푸른 옷을 입은 여인들이 포도나무 사이에서 몸을 구부린 채 포도수확에 여념이 없다.


고흐의 그림은 파리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더니, 아를에선 더 밝은 색으로 진화했다. 노란색과 붉은 색이 주조를 이루는 아를의 그림에서 우리는 생동감과 에너지를 느낀다. 이 <아를의 붉은 포도밭>도 그런 그림 중의 하나다.


그림의 왼쪽 위를 보면 숲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강이 흐른다. 때는 저녁! 하늘을 보니 둥근 태양이 서녘 하늘을 밝히고 있다. 한 마디로 찬란하다! 그 찬란함이 얼마나 강렬한지 태양은 하늘과 땅 전체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특히 오른쪽에 흐르는 강의 색깔이 도드라진다. 햇빛이 반사되는 강물! 노란색 속에 푸른색이 숨어 있다. 이 그림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농촌 아낙들을 표현한 것이지만 분명 그것을 넘는다. 오히려 찬탄할 수밖에 없는 자연에 대한 예찬이 이 그림의 주제다.


색의 주조는 노란색과 붉은 색 그리고 푸른색이다. 삼원색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도통 믿기지 않는다. 원근감도 매우 뛰어나다. 그림의 소실점이 중앙에 위치하지 않고 오른쪽 상단에 있음으로 매우 특이한 구도를 만들고 있다. 그림 속의 모든 대상은ㅡ숲, 포도농장, 일하는 여인들, 흐르는 강물ㅡ소실점을 향해 점점 작아지면서 결국에는 사라진다.


이 그림은 전체적 구도나 대상의 배치는 사실적이다. 하지만 대상을 표현하는 색의 선택은 사실적인 것을 초월해 고흐의 영감을 표현하는 매우 독특한 수단이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상파의 사실주의와는 또 다른 세계, 다가 올 21세기의 초현실주의의 단초를 읽을 수 있다.


이 그림은 1890년 초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20인 전>에 출품된 작품이다. 이것만 보아도 고흐가 죽기 전 세인들의 평가를 전혀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흐는 아직 무명의 작가였으니 이 전시회는 그로서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회였을 것이다. 그런 전시회에 고흐가 그림을 보냈다면 그 작품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분명히 고흐 스스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부를만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럼 이 그림이 누구에게 팔렸을까? 브뤼셀 <20인 전>은 지난 번 제7화에서 본<외젠 보쉬의 초상화>에서 잠시 설명했듯이 당시 브뤼셀의 예술가들이 만든 단체로, 이 단체는 매년 외국 화가들 20인을 초청하여 전시회를 열었다. 외젠 보쉬는 바로 <20인 전>의 핵심 멤버였다. 이 그림은 바로 그 보쉬의 동생 안나 보쉬ㅡ 그녀 역시 벨기에의 여류 인상파 화가 중 하나였다ㅡ에 의해 팔렸던 것이다. 단돈 400프랑(현시세 약 1천불)에!


비록 헐값이었지만 브뤼셀에서 그림 한 점이 팔렸다는 사실은 당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고흐에겐 낭보였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의해 조금이라도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좋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좋았으면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을까?


“ ...어제는 브뤼셀에서 제 그림이 400프랑에 팔렸다는 소식을 테오가 전해줬습니다. 다른 그림이나 네덜란드 물가를 생각해 본다면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그럴수록 제대로 된 가격에 팔릴 작품을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 생각입니다. 자신이 먹을 빵을 직접 일해서 벌어야 한다면 저는 아주 많은 돈을 벌어야만 합니다.”(1890년 2월 15일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고흐는 이 편지에서 이 그림이 팔리는 덕분에 희망을 가지고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 눈시울을 붉혔다. 화가로서 직업을 바꾼 지 10년 ... 열심히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럼에도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일부러 안 판 것도 아니고, 화상인 동생을 통해 열심히 팔려고 했음에도 말이다.


고흐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이제야, 한 점을 팔았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했다. 나 고흐의 영혼을 읽은 사람이 있다. 나도 화가로서 살아갈 존재의 의미가 있는 거야. 그러니 앞으로 더욱 열심히 그릴 거다. 내 마음의 고뇌를 나의 붓으로 그려나갈 거야.”


이제 우리 모두는 고흐를 사랑하고, 그의 작품을 인정한다. 비록 늦었지만 하늘나라에 있는 고흐가 이런 사실을 알면 좋겠다. 거기에서라도 함빡 웃는 그의 모습, 생각만 해도 즐거운 상상이다.







위 이야기는 필자의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사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