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발틱제국을 가다

발틱 제국을 가다(2)

박찬운 교수 2022. 10. 4. 05:47

<볼프스산체>
2차 대전 중 히틀러의 비밀 요새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다. 그 중에서 볼프스산체는 가장 유명한 곳이다. 히틀러는 소련 침공 이후 이곳에서 800일을 머물면서 전선을 지휘했다. 이곳은 천연의 요새이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당시 소련 국경과는 80킬로미터 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고 주변에는 마주리아 호수 등이 있어 물을 얻기 쉬울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천연의 장벽 역할을 해주었다. 또한 주민의 수도 많지 않았고 이미 독일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도 독일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평지이지만 울창한 숲이기 때문에 요새를 숨기기에는 적격이었다.


가이드 매트가 볼프스산체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곳에 대해 설명한다. 우리와 같이 여행하는 분들 대부분이 65세 이후의 노인들인데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자세가 사뭇 진지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가 놀란 것이 스웨덴인들의 이런 자세다. 8박9일 동안 함께 다녔지만 버스 안이 소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지극히 조용하다. 그저 부부 사이에서 소근소근할 뿐이다.

가이드에게 질문도 하지 않는다.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잘 지킨다. 차량 탑승 약속 시간에 나가면 이미 늦는다. 이들 노인들은 약속 시간 10분 전에 대부분 차량에 탑승해 있다.

볼프스산체의 전체 지도, 이 지도 중 요새 13번이 히틀러의 요새다.


바로 여기에서 1944년 7월 20일 클라우스 쉔크 얼 폰 슈타우펜버그가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던 장소이다. 슈타우펜버그는 당시 대령으로 히틀러의 총애하는 인물이었다.

히틀러와의 회의를 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시한폭탄을 터트리기로 하고 이곳 회의실에 폭탄을 설치했다. 폭탄은 떠졌지만 히틀러의 생명을 뺏진 못했다.

이것은 군 장교들에 의한 일종의 쿠데타였다. 사건이 발생한 당일 밤 슈타우펜버그를 비롯한 사건의 주모자들은 모두 사살되었다.


여기가 요새 번호 13번, 히틀러 벙커다. 벙커는 철근 콘크리크 구조물인데, 요새 한 가운데에 조그만 방이 있다. 이 방까지 지붕에서 10여터, 벽에서 8미터 정도의 콘크리트가 타설되어 있다.

당시 연합국의 폭탄이 뚫을 수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의 한계가 두께 4미터 정도였다고 하니 이 정도면 아무리 공중에서 폭탄이 쏟아져도 요새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사했을 것이다.


히틀러 벙커에 들어가 보았다. 난공불락의 콘크리트 구조물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요새 번호 16번, 괴링의 벙커

<빌뉴스>
여행 3일째가 마감되는 시간, 우리는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 도착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발틱 3국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리투아니아? 우리에겐 아직도 생소한 나라이다. 빌뉴스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사를 알아보면 이렇다.

14세기 이전의 리투아니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는 14세기 게디미다스 대공이다. 그는 리투아니아를 비롯하 인근 국가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역사에서 리투아니아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지금도 빌뉴스 한 가운데는 그의 이름을 가진 성채가 존재한다. 리투아니아는 그 뒤 16세기에 이르러 폴란드와 연합왕국을 이룬다. 이 때가 가장 번성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 연합왕국은 두 개의 수도를 갖는다.

하나는 쿠라쿠프, 다른 하나는 빌뉴스. 하지만 이 왕국은 18세기에 들어 와 러시아의 부상에 따라 리투아니아는 러시아의 일부가 된다. 그 뒤 1차 대전이 일어난 다음 독일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전후에는 다시 폴란드의 지배를 받게 된다.

2차 대전 중에는 독일이 다시 점령하고 독일 패전 이후에는 러시아가 다시 이 지역을 장악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냉전 체제가 끝나고 발틱 3국 공히 1991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여 현재의 리투아니아가 탄생한다.

새벽의 문, 빌뉴스 관광의 시작은 바로 여기부터이다. 16세기 초 빌뉴스의 성벽이 만들어질 때 함께 만들어진 문이다.

이 문에서 놓치지 말 것이 문 상단에 있는 자비의 어머니 상이다. 금으로 장식된 성모 마리아 상이다.

젊은이들은 그냥 지나가지만 중년 이상의 빌뉴스 시민이라면 거의 대부분 이곳 문을 드나들면서 마리아 상을 향해 성호를 긋는다.

 

성 테레사 교회, 1650년에 세워진 것으로 초기 바로크 양식이다. 내부의 제단은 화려한 로코고 양식이다.

성테레사 교회의 내부


성령 러시아 정교회, 이 교회는 원래 17세기 목조 교회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인데, 불타 없어지고 18세기 바로크 스타일로 다시 재건된 것이다.


성령 러시아 정교회의 내부, 우연히 예식이 진행되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엄숙한 분위기가 다른 교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감히 사진기를 들이대고 찍기가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는 장중했다.


빌뉴스 중앙광장, 세계 대전으로 대부분 파괴된 건물을 잘 복원해 놓았다. 빌뉴스의 구도시는1994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빌뉴스 구시청사, 원래 시청사는 14세기 말에 세워졌으나 18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졌다.

전면의 모습은 전형적인 고전주의 건축양식이다. 6개의 도리아식 기둥과 그 위의 삼각형 페디먼트가 돋보인다.

이 시청사는 이미 19세기 초에 극장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사용되었다. 지금은 특별 전시 열람 공간으로 사용된다.

 

빌뉴스 대학 내의 성요한 성당과 종탑. 빌뉴스 관광에서 빌뉴스 대학은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1568년 제주이트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북유럽에서는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이다.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와 연합왕국을 형성하고 있을 때 이 대학은 연합왕국 내에서 가장 명성 높을 대학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리투아니아의 대표 대학으로 학생 수가 2만 5천여명이라고 한다.

성요한 성당은 학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거기에는 과거 이 학교를 빛낸 교수들의 저서와 그들의 연구업적이 전시되어 있다.

 

성요한 성당에 전시되어 있는 과거 유명 교수들의 연구업적

 

빌뉴스 대학 구내 서점, 천정의 벽화가 인상적이다.

빌뉴스 대학 도서관, 수백년간 학문의 선배들이 이곳에서 진리를 탐구했다. 그것이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온고이지신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난다.



대통령 궁, 빌뉴스 대학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다. 구도시 한 가운데에 꽤 큼직한 건물이 있어 의아하지만 원래 이곳은 16세기에 만들어진 빌뉴스 주교관이었다고 한다.

주교는 18세기 말까지 여기에서 거주했으나 1795년부터 총독 관저로 사용되다가 리투아니아 독립 이후에는 대통령궁이 되었다.


카테드랄과 종탑, 빌뉴스의 최대 성당이다. 14세기에 리투아니아가 기독교화하면서 고딕양식으로 지어졌으나 그것은 15세 초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뒤 재건축이 번복되었다.

현재의 것은 18세기에 건축된 것이다. 소련 강점 당시에는 폐쇄되는 수난을 겪었고 인물화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가 독립되는 시점에서 이 성당은 다시 원래의 용도로 돌아갔다.


카테드랄의 내부를 보자, 기본적으로 고딕양식이지만 볼트가 특이하고 어딘가 모르게 로마네스크적 냄새가 난다. 기둥에 성인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게 특징적이다.


게르미다스 동상, 카테드랄 바로 옆에 있는데 이 사람이 빌뉴스의 창시자다.

성안나 성당, 내가 빌뉴스에 본 가장 훌륭한 건물이다. 15세기 말에 건립된 것인데 외관은 거의 변형이 없다고 한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전면 파사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정도로 화려하고 정교하다.

하지만 내부는 매우 빈약하다. 알아본 바, 내부는 원래의 것이 아니라 20세기에 들어와 리노베이션된 것이다. 역시 건축은 당대의 것이 최고라는 말이 실감난다.

성안나 성당 바로 옆에 있는 것은 베르나딘(시토 수도회) 교회인데, 이 건물은 안나성당보다는 규모에서는 더 크다. 역시 고딕 양식인데 내부의 고딕 볼트가 볼만하다.

'여행과 인생 > 발틱제국을 가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틱 제국을 가다(4)  (1) 2022.10.07
발틱 제국을 가다(3)  (0) 2022.10.05
발틱 제국을 가다(1)  (0) 2022.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