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발틱제국을 가다

발틱 제국을 가다(4)

박찬운 교수 2022. 10. 7. 05:31

탈린
유럽의 문화의 수도라고 하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이 아름다운 도시를 간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된다. 우리 발틱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탈린이다. 7월 11일 오후 일행은 탈린에 입성했다.

탈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12세기 이전의 이곳 역사는 잘 알려지 있지 않다. 유럽 역사에서 분명한 기록은 13세기 초 이곳이 덴마크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탈린은 덴마크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탈린에는 덴마크인들이 만든 성벽 등이 남아 있어 그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는 게 어렵지 않다.

덴마크 이후 이곳을 지배한 이들은 북구의 중세사에서 이름을 떨친 튜톤 기사단이다. 기록에 의하면 14세기 중반 덴마크는 탈린과 그 인근 영역을 튜톤 기사단에게 팔았다고 한다. 튜턴 기사단 지배 하에서 탈린은 영화를 누리기 시작한다. 도시의 면모가 바뀌고 발틱 해의 주요 해상 무역의 거점 도시가 된다. 한자 동맹의 주요 도시가 된 것이다. 2백년 이상 이런 영화는 주변국가인 스웨덴의 부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스웨덴은 16세기 초 덴마크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후 북구의 강자로 성장하고 마침내 탈린까지 그 세력을 뻣친다. 이로서 탈린은 한 동안 스웨덴의 지배를 받게 되는 데 이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17세기 후반 러시아가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표트로 대제 이후 러시아는 파죽지세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스웨덴과 전쟁을 하게 되고 마침내 탈린은 러시아로 넘어간다. 러시아의 지배는 근세 전체를 통해 계속된다.

20세기에 들어 와 1차 대전 이후 잠시 에스토니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만 곧 소련군이 주둔함으로써 독립은 무산된다. 2차 대전 중 잠시 독일에게 점령되었으나 대전 이후 소련의 지배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 대 후반 소련의 몰락과 함께 발틱 3국의 독립은 이루어진다. 이 시기 에스토니아인들을 비롯 발틱 3국은 러시에 대해 무력으로 항거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호소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989년 8월에 있은 3개국 678킬로미터의 인간띠 '발트의 길'.

리가의 주민들이 '발트의 길'에 나왔다. 이런 모습으로 빌뉴스에서 탈린까지 이어졌다. (자료사진)


당시 3국의 시민들은 소련에 의한 지배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동시에 도로로 나와 인간띠를 형성했다.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에서 손에 손을 잡은 사람들의 물결은 라트비아의 리가로 그리고 드디어 에스토니아 탈린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교회의 종소리에 맞추어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라이스베스'를, 라트비아 사람들은 '브리비바'를,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비바두스'를 각각 외쳤다. 모두 자유라는 뜻이다.(이 '발트의 길'은 지금까지 매년 기념행사로 이루어지고 있음)

뿐만이 아니다. 발틱 3국의 평화의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이 바로 노래! 노래 축제가 대규모로 만들어지는데, 이것 또한 평화의 저항이었다. 역사는 이를 송레벌루션, 노래 혁명이라고 한다. 이 흔적은 지금까지 발틱국가들의 자랑으로 남아 있다. 탈린의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매년 유럽 최대의 합창대회가 열리는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발틱 3국은 1990년 리투아니아를 시작으로 1991년 모두 소련으로부터 독립한다. 이로써 탈린은 독립국가인 에스토니아의 수도가 되었고 과거의 영광을 찾아 가고 있다.

이런 역사를 이해한다면 탈린에서 보게 되는 덴마크, 스웨덴, 러시아의 흔적은 매우 자연스런 것이다. 탈린의 에스토니아인들은 지난 수 백년 간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 오면서 그들의 풍부한 문화를 만들어 왔다. 이민족의 지배를 조용히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 그들 자신의 순수한 오리지낼리티를 간직하면서 이 아름다운 탈린에 그들의 문화를 완성했다. 역사 속에서 에스토니아인들이 소멸되지 않고 그 명맥을 이어오면서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하는 그 자체에서 한 민족의 숭고함을 느낀다.

에스토니아는 민족적으로 보면 핀란드와 가깝다. 뱃길로 2시간이면 헬싱키에 닿는 것만 보아도 에스토니아는 핀란드와 밀접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언어적으로도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이들 언어는 소위 인도유러피언계가 아니다. 우랄알타이어계라고 한다. 역사가들은 이들이 10세기 이전 아시아에서 출발한 흉노(훈족)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만 이들의 피부나 생김새는 북구인 그대로다. 피부는 희고, 머리카락은 금발이다. 한 가지 약간의 특징이 있다고 하면,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것인데, 체구가 조금 왜소하다고나 할까. 빌뉴스와 리가에서 본 여인들의 풍만함은 탈린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가녀린 북구의 금발 미녀들만 탈린 시내를 활보할 뿐이다.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바라다 보이는 탈린 구시가지, 정면의 돔교회가 알렉산드리아 넵스키 정교회

바다를 향한 구 시가지, 첨탑의 건물이 올라프 성당

시청사, 고딕양식의 이 건물은 1404년에 완공되어 600년 이상 이 광장에 우뚝 서 있다.

시청사 앞 광장, 유럽의 어느 역사 도시를 가도 이렇게 도시 한 가운데에는 광장이 있다. 사람이 모여 자유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쇼핑을 할 수 있는 공간, 바로 이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시청사 광장 한 켠에는 탈린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 하나 있다. 1422년 개설된 이래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약국 내부, 약을 파는 저 분, 어디에서 본 듯한 사람이다. 그렇지, EBS 세계테마여행 탈린편에서도 출연한 사람이다.

뚱뚱한 마가렛 타워

올라프 성당 쪽에서 구시가 중심으로 향하는 길이 일명 긴 다리 거리, 피크 거리다. 탈린이 한자동맹의 일원으로 한참 번영을 구가하던 시절 상인들은 부두에 배를 대고 바로 이 길을 걸어 시내로 들어 왔다.

피크 거리에서 톰페아 언덕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있는 문

알렉산드리아 넵스키 정교회

비루문. 탈린 구시가지를 관광할 때 이 문에서 시작한다. 이 문을 통과하면 15-17세기 건물들이 즐비하다. 거기에서 더 들어가면 고딕양식의 건물이 인상적인 시청광장이 나온다.

톰페아로 올라가는 길

톰페아 언덕 위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 이곳 타워 전망대에서 탈린 구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 온다.

탈린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유럽의 여러 도시가 이렇다. 그들은 과거는 과거대로 아름답고 현대는 현대대로 아름답다.

탈린에서 저녁을 먹은 Leib Resto ja Aed, 이 집은 룬드대학 법대에서 국제인권법 석사과정 중에 있는 탈린 출신 아가씨 로라가 소개해 준 식당이다.

탈린에서 스톡홀름간을 운항하는 페리선 빅토리아, 이 배는 수천 명의 승객을 태우고 두 도시를 왕복하는 정기선이다. 2004년 경 취역한 비교적 최신 여객선이다. 객실 이외에도 뷔페 식당 등 다수의 레스토랑, 바, 카지노, 사우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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