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교육

부질없는 탄식 -법학교육의 현장에서-

박찬운 교수 2018. 10. 2. 05:47

부질없는 탄식
-법학교육의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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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교수들과 점심을 먹고 차를 한 잔 했다. 거기에서 나온 이야기가 요즘 로스쿨 학생들의 공부 방법론. 다들 말하는 것이 요즘 학생들이 교과서를 제대로 안 보고 요약서를 중심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초실력을 갖추기 어렵다는 것. 선생으로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모르겠다(사실 나는 기본법 교수가 아니기 때문에 이 심각성을 그들 만큼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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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3년의 기간은 방대한 법학을 배우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법학은 어떤 학문보다 그 범위가 넓다. 헌법 민법 형법 등의 기본법만 보아도 하나의 법 분야가 다른 인문사회과학의 한 전공분야와 맞먹는다. 그런데 그들 교과서를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다. 헌법 교과서 1500쪽 내외, 민법 2000쪽 내외, 형법 1500쪽 내외...기타 다른 법률 상법, 행정법, 민소법, 형소법도 모두 1500쪽 내외의 교과서가 기본이다. 거기다가 선택과목도 이에 지지 않고 모두 1000쪽이 넘는 교과서를 갖고 있다. 이러니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할 수 있는가, 물리적으로 방법이 없다. 요약서를 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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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새로운 스타일의 교과서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하고 질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다. 교과서 시장이 예전과 달라 만들어도 팔리지 않는다. 로스쿨을 도입하는 바람에 시장은 작아져서 출판사가 교과서 만드는 것을 기피한다. 더욱 교과서를 만들어도 제대로 된 업적으로 인정도 안 해 준다. 그러니 어느 교수가 정성스럽게 교과서를 만들려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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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우리가 법학을 처음 대할 때만 해도 공부를 그렇게 하지 않았다.(이 말은 그 시절을 미화하려는 게 아니다) 아무리 수험법학이 횡행하고 있어도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교과서를 철저히 이해하라는 것이었다. 회고하면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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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헌법을 공부하면서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김철수 교수와 권영성 교수의 교과서를 동시에 보았고, 거기에다 당시 떠오르는 신성 허영 교수의 이론서(헌법과 헌법이론 전 3권)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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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의 경우 모든 법률학도가 바이블처럼 본 곽윤직 교수의 시리즈 4권(당시 4권을 전부 합하면 2500쪽 정도 되었음)을 10번 가까이 읽었고, 거기에 보충서로 김용한 교수의 전 4권 시리즈도 여러 차례 읽었다. 친족법의 경우 김주수 교수의 책을 기본서로 읽으면서 김용한 교수의 교과서를 보충서로 읽었다. 상법은 정희철 교수의 교과서(2권)를 기본서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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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법은 행위론 별로 교과서와 논문을 읽었다. 목적적 행위론을 설파한 황산덕 교수, 객관주의에 천착한 정영석 교수의 교과서를 읽었고, 논문으론 사회적 행위론의 심재우, 목적적 행위론의 김종원 교수의 글을 찾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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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법에선 김도창 교수의 교과서를 기본서로 읽고, 박윤흔, 김남진 교수 등의 책을 보충적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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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소법에선 이시윤 판사의 교과서(800쪽)를 10회 이상 읽었고, 형소법에선 이론서론 은사인 차용석 교수님의 책과 서울대 강구진 교수의 형소법 책을 읽었으며, 수험서론 백형구 변호사의 책을 수없이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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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법학 공부가 좋았다고 말할 순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시절 그런 공부를 해 놓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법학도로서 한 마디를 할 수 있는 실력이 형성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무릇 법학도 (그것도) 법률전문가가 되기 위해선 어느 상황에서라도 저들 교과서를 안광이 종이를 뚫는다는 자세로 읽고 또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절대로 일정 수준의 법률가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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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올리면 또 로스쿨 실패했다고 댓글 다는 분들 많을텐데... 그것보다는 가급적이면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해 주시라. 지금 그런 말은 큰 도움이 안 된다. 사실 페친 중엔 기라성 같은 법학자가 수없이 많은 데 이런 글이 그분들에겐 어떤 공감을 줄지도 모르겠다. 부질없는 탄식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