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Essays/자유롭고 독립적인 삶

비그포르스의 나라 스웨덴에서 깨달은 앎

박찬운 교수 2015. 9. 28. 20:55
[정동에세이]비그포르스의 나라 스웨덴에서 깨달은 앎
얼마 전 잠시 한국을 다녀오면서 비행기 내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홍기빈의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를 읽었다. 비그포르스는 20세기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로 불리는 사람이다. 나는 이 책에서 비그포르스가 세상에 대해 분노했고, 그로 인해 꾸게 된 꿈을 발견하였다. 인간에 대한 구조적 차별과 평등한 인간적 연대를 가로막는 사회적 위계와 권력의 문제, 그것이 그의 분노의 뿌리였다. 사람과 사람이 평등하게 연대하고 사랑하면서 서로의 인간적 발전을 일구어내는 공동체의 꿈, 그것이 그가 꿈꾼 세상이었다. 감히 말하건대, 비그포르스의 분노와 꿈, 그것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분노이자 꿈이다.
나는 현재 스웨덴의 한 인권연구소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비그포르스의 나라 스웨덴에서 그동안 책으로만 알았던 복지국가의 참모습을 직접 관찰하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한국에 있을 때와는 감이 다르다. 조금은 더 객관적이고, 조금은 더 냉정하다. 

대한민국은 정상국가인가? 한국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 분노가 일어난다. 그 분노의 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내 조국, 대한민국은 어떤 꿈을 꾸며 나아가고 있는가? 

박근혜 정부는 출범 한 달이 가까워서야 가까스로 정부 구성을 마쳤다. 지난 한 달간 청문회에 나온 인사 중 태반이 우리로 하여금 분노와 좌절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전관예우를 받아 천문학적 돈을 번 이, 고관을 지내다가 퇴임한 후 사기업의 로비스트가 된 이, 탈세와 위장전입을 과거의 관행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당당하게 고관대작으로 금의환향할 때 누군들 분노하지 않으랴. 

이런 이들이 정부의 고관대작으로 들어와 성공한 인생이라고 거들먹댈 때 누군들 좌절하지 않으랴. 비그포르스가 분노했던 인간적 연대를 가로막는 차별과 권력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우리가 분노하고 좌절하는 것은 그것 말고도 더 있다. 인간적 연대를 가로막는 한국 사회의 고질병은 따지고 보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학벌과 지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꽁꽁 뭉쳐 공동체의 꿈을 갉아 먹고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에서 성공이란 특정 학교와 특정 지역으로 연결된 그들만의 굿판, 그들만의 살판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인간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만성화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공이란 신기루를 잡기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건다. 입시열풍, 사교육, 일류대학 타령은 한국 사회에서 성공신화를 만들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비그포르스가 꿈 꾼 세상은 정령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인가. 스웨덴이 지난 세기 이루어 온 성과를 보면 인간사에서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스웨덴 사람들이 지구인이 아닌 외계인이라면 몰라도 우리가 그들이 이룩한 세상을 못 이룰 리가 없다. 
그럼,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낼까? 우리 사회는 지금 너무 불안하다. 지난 수십년간 경제는 성장했지만 사람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산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들의 마음은 강퍅해졌다.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살벌한 경쟁이 사회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를 보라, 한진중공업 사태를 보라. 그들 노동자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투쟁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죽는다는 절박한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성공했다는 사람들도 행복이 없긴 매 한 가지다. 전관예우 받고 고관대작에 오른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그 지위를 얻기 위해 얼마나 비루한 삶을 살아 왔는지를 알면 부러울 것이 없다. 최고의 학벌을 쌓고, 부를 쌓았으니 누구나가 부러워할 것 같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의 고혈로 이루어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뭇 사람이 불행할 때 혼자서 행복할 순 없다. 여론의 뭇매를 맞아가면서 공직에 취임하려는 그들도 따지고 보면 이 사회가 낳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가 해내야 하는 가장 큰 과제는 복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가 스웨덴에 와서 매일같이 보고 느끼는 것은 복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이다. 복지가 튼튼하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극심한 경쟁구조에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질 수 있다. 굳이 좋은 학벌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스펙을 쌓기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사회는 그만큼 다양성이 확보될 것이다. 같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과도하게 많을 때 경쟁은 필연적이다. 나는 누구와도 다르기 때문에 내 나름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으면 사회는 여유를 갖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사회가 너무 불안해서는 안 된다. 기본적인 생존을 사회가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복지다. 이 철학을 정치권이 공유해야 하고, 정부는 확고한 복지철학으로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해 나가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버는 돈의 절반을 세금으로 뗀다 해도 동의할 것이다. 나의 미래를 위해,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복지정책에서 필요한 재원은 궁극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미래에 대한 꿈과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지 경제성장이 가져다주는 반사이익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평등하게 연대하면서 사랑하는 세상, 그것은 꿈이 아니다. 인류사에서 이것을 이뤄가는 사회가 분명히 존재할진대 우리도 그 꿈을 꾸자. 그리고 그것을 위해 힘을 합치자. 이것이 내가 지난 한해 북구에서 경험한 알짜 중의 알짜, 그 앎의 정수이다.
(경향/2013.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