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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그리고 의식의 르네상스에 대하여

박찬운 교수 2015. 9. 27. 04:43

소통 그리고 의식의 르네상스에 대하여

 

르네상스 시기 독일 화가 뒤러는 자의식이 강한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이 그림을 통해 르네상스가 개인을 발견한 시대라는 것을 실감나게 느낀다.

 

1. 
이 사회의 소통부재의 철학적 기초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이 아침 나의 페친들에게 감히 드리는 도전적 질문이다.

 

누군가가 나를 외국인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물어보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한국 사람은 아직도 중세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권위라는 신이 명령하는 세계에서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한 인간이라는 사실, 자기 자신이 한 개인으로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어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당신도,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 사람에겐 그런 의식이 부족합니다."

 

가정에서 대화가 부족한 것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는 무조건 주는 사람이고, 자식은 받는 사람이다. 주는 사람은 말하고, 받는 사람은 들을 뿐이다.

 

학교에서 대화가 부족한 것은 선생과 학생이 서로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은 무조건 가르치는 사람이고, 학생은 배우는 사람이다. 가르치는 사람 앞에서 배우는 사람이 감히 머리를 치켜세울 수가 없다.

 

직장에서 대화가 부족한 것은 상사와 하급자가 서로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급자는 명하고, 하급자는 따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 명하는 사람 앞에서 어찌 따르는 자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가정도, 학교도, 직장도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려면 ‘나’와 ‘상대’ 모두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주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인식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첫째, 우리를 억누르는 권위와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온갖 비민주성, 비인간성에 대해 저항할 것이다.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사회에 꽉 차있을 때 독재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권의 실현은 우리의 이런 의식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타자에 의한 예기치 않은 선물일 뿐이다. 그 선물은 오래가지 않는다. 온전히 인권을 누리려면, 나에 의해 스스로 그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이런 의식을 갖게 되면 ‘나’ 아닌 ‘상대’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자유스런 개인이라면 남도 그런 존재다. 그런 존재와 함께 산다면 당연히 타협하고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는 또 다른 '나'다.

여기에서 대화가 나타난다. 나는 일방적으로 명하는 것에 따르는 존재가 아니고, 남도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이런 존재들이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사회는 토론하고 또 토론해서 무언가 조화로운 결론을 얻어낼 수밖에 없다.

 

2. 
서양에선 개인의 발견 곧 자아의 발견은 르네상스기에 나타났다. 그 이전은 신의 시대요, 그 이후는 인간의 시대다. 서양이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동양을 앞선 이유도 따지고 보면 그런 철학적 기초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에서 인간의 합리주의, 근대 과학이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르네상스는 한 개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한 인간의 의식세계도 중세가 있는가 하면 르네상스가 있다.

 

'어떤 이는 죽을 때까지 중세 속에서 살고, 어떤 이는 일찌감치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당신은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3.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의식의 르네상스를 맞이할 것인가이다. 이것을 맞이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언제까지나 종살이를 면치 못한다. 인간이 만든 온갖 권위에 복종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세상을 당당히 살지 못한다.

 

한 인간이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물질이다. 이 물질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한 인간은 노예가 될 수도, 주인이 될 수도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이들은 이 문제를 자신에 대한 엄격한 수양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황금을 보길 돌로 알면서 엄격한 자기수양을 감행했다. 그렇게 하여 적지 않게 성공한 개인을 만들어냈다.

 

조선성리학의 금자탑을 쌓은 우리의 선조 몇몇은 그런 찬사를 받을만하다. 그 중에서도 이와 기와의 관계에서 이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은 더욱 그랬다. 그들은 이와 기의 싸움에서 결코 이를 기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인의예지라는 인간의 도덕심은 기와는 관계없이 이를 키움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얼마나 성공했는지,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그래서 우리나라의 도덕적 기반으로 정착하는데 성공했는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엔 성공적이지 못했다. 우리의 선조는 물질에 대한 도덕철학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는 20세기 서구 자본주의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졌다. 식민지와 전쟁은 그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 충격에서 우리의 정신세계는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정신적 아노미 그 한 가운데서 오늘을 살고 있다.

 

서양의 초월주의. 미국의 19세기 철학자들은 물질에서 인간의 정신을 해방시킬 것을 강조했다. 우리가 잘 아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 사람은 거의 무소유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인간이 가장 적은 물질로도 최고의 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월든 호수에서 2년간 조그만 통나무집에서 살면서 그것을 실험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험에 불과하다. 소로가 그런 생활을 평생 한 것도 아니다. 그의 실험을 폄하할 필요는 없지만 그런 삶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평범한 사람은 적당히 먹고, 적당히 놀면서, 쾌적한 집에서 살길 원한다. 그래야만 행복하다. 우리 모두는 초인이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니 물질이 적당히 받쳐주지 않으면 자유로운 개인은 탄생할 수 없다는 생각은 자연스런 결론이다. 최소한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면서 동시에 정신의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4.
여기서 나는 우리 사회경제체제가 곧 우리의 정신세계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의 정신은 상부구조요, 물질은 하부구조다.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특별히 마르크스의 인식론을 천착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이것은 인류가 이제껏 깨달은 가장 중요한 인식론이라는 사실, 그 점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인식론에 있어 물질중심주의에 빠진 결정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정신과 물질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고, 이 관계가 사회의 정신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이론을 제기하지 않을 정도로 신봉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소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은 물질적 토대의 취약함이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스스로 자유스러운 개인이 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유일한 원인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은 물질에서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누군가로부터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에서 살다보니 말을 안 한다. 남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우리 사회는 의존사회다. 자식은 부모로부터,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가난한 친구는 부자 친구로부터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그 속에서 진정한 대화는 없다. 대화는 독립적 주체들 간에서 하는 것이다. 내게, 네게, 자유가 없고서는 진정한 대화는 없다.

 

말을 마치자. 소통이 부족한 우리 사회를 말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내 말은 물질적 토대를 제대로 갖추는 데에서 소통의 진짜 해결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복지국가를 염원하는 이유이다.(2014. 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