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인문명화산책

인문명화산책2김상환 판사, 한 장의 그림 그리고 코소보 역사

박찬운 교수 2015. 9. 27. 05:24

인문명화산책2

[김상환 판사, 한 장의 그림 그리고 코소보 역사]


김상환, 서울고등법원 형사6부 부장판사. 이 사람을 오래 동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늘 그가 원세훈을 법정구속했다. 사필귀정의 판결이지만 쉽게 나올 수 있는 판결이 아니다.


원세훈에 대해서 1심을 맡았던 이범균 판사는 국정원법에 의한 정치 관여는 인정했지만 공직선거법상의 선거개입은 인정하지 않았다. 국사범임이 분명했지만 원세훈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범균 판사의 이 판결에 대해 수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나도 그 대열에 섰다.


선거철에 국정원이 인터넷 상에서 댓글을 달면서 정치에 관여했는데 그것을 선거개입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이 무슨 해괴한 판결이란 말인가. 누구는 이 판결이 다가올 법원 인사와 관계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아닌 것도 아니라 그는 시중의 비난과는 관계없이 지난 번 인사철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했다.


지금 세월이 수상하다. 사법부의 법관들도 거꾸로 가는 세월 앞에서 번번이 정의와 양심을 지키지 못한다. 시대를 왜곡하는 판결들이 급격히 늘었다. 이런 판결에 시민들은 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다면서 절망한다.


그런 가운데 김상환 판사의 판결이 나왔다. 너무나 당연한 판결이다. 하지만 김 판사의 고뇌를 가볍게 볼 수 없다. 시대를 역주행한 1심 판결을 눈 딱 감고 그냥 패스시킬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라도 단호히 ‘노’를 외칠 것인가.


선거법 유죄는 정권의 정통성을 건드리는 것이니 보통 부담스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형량도 그렇다. 실형을 선고할 것인가, 계속 집행유예를 유지할 것인가. 실형을 선고하고 자신의 손으로 법정구속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만은 그냥 눈감워 줄 것인가... 그런 고민 속에서 결단을 내린 판결이다. 선거법 유죄, 실형선고, 법정구속...


이 시대에 이런 법관을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희망을 발견한다. 이런 기억은 길수록 좋다. 그를 잊지 말자. 그와 같은 법관이 우리의 사법부를 굳건히 지킬 수 있도록 응원하자.


이젠 딴 말을 하자. 인간의 기억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떨 때는 좀 망각해주는 것이 역사를 살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기억의 내용이 개인을 넘어선 전체의 문제이고, 그 내용이 비탄에서 비롯된 복수를 다짐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기억은 비극의 역사를 재현하는 원인이 된다.


코소보 분쟁을 알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과거 유고연방의 한 자치지구였던 코소보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일어났다. 코소보의 독립을 요구하는 알바니아계와 이에 반대하는 세르비아계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여기에 세르비아계를 지원하는 세르비아 정부군이 개입함으로써 확전되었고, 결국 유엔과 나토까지 개입함으로써 국제적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 사태로 3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다. 지금 전투는 끝났지만 그곳은 여전히 민족 간 갈등이 심하다. 언제든지 그 갈등은 또 다른 폭발로 이어질지 모른다.


나는 코소보 사태가 일어난 바로 그해에 네덜란드 헤이그에 소재하는 ICTY(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Former Yugoslavia,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반년 가까이 인턴으로 근무했다. 미국에서 국제인권법을 공부한 다음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그곳 재판소에서 머물면서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 책임자 재판에 필요한 자료연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대해선 신문에 나오는 정도의 정보밖에는 몰랐다. 그곳 재판소에 있는 동안 비로소 왜 그 지역이 오래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비극의 현장이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코소보 내전도 그 기원을 찾다보면 보스니아 내전과 같이 종교와 민족의 갈등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6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 왕국의 중심이었다. 세르비아는 정교회를 국교로 채택한 왕국으로 14세기에 최고의 시대를 맞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 왕국은 오스만 터키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한다. 오스만 터키는 13세기 이슬람 왕국을 만든 이래 급속히 힘을 키워 지금의 터키 영토 대부분을 접수하고 빠르게 서진한다. 세르비아 왕국이 오스만 터키의 공격을 받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389년 세르비아 왕국의 라자르 왕자가 이끄는 3만 대군과 무라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터키군이 코소보 벌판에서 일합을 겨룬다. 결과는? 세르비아 연합군의 대패였다. 라자르는 적군에 잡혀 참수되었고 대군은 박살났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코소보는 오스만 터키의 손아귀로 들어갔고 그 후 500년간 이슬람 지배를 받게 된다. 오스만 터키는 이곳을 이슬람화하기 위해 이슬람 알바니아인들을 대거 이주시켰고, 그 덕에 지금도 80% 이상의 인구가 이슬람 계다.


2차 세계 대전 후 코소보는 유고연방의 일원이 되었고, 독재자 티토의 강력한 영도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죽자 유교연방은 하나 둘 독립하기 시작한다. 코소보는 독립을 희망하는 알바니아계와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세르비아계가 충돌한다.


자, 이제 역사적 그림 하나를 보자. 아마 쉽게 보지 못한 그림일 것이다. 이 작품은 1919년 세르비아의 사실주의 화가 우로스 프레디치가 그린 <코소보의 처녀>란 그림이다. 이 그림의 모티브는 위에서 이야기한 1389년의 코소보 전투다. 이 비극적 전투는 세르비아인들이 6백 년 동안 전승된 민족서사시에 각인되었다.


서사시의 내용은 이렇다. 6백 년 전 코소보에 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에겐 결혼을 약속한 연인 밀란 토플리카라는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그 연인과 결혼을 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만다. 오스만 터키의 침공으로 연인은 형제와 함께 전장 터로 나간 것이다. 그녀도 뒤를 따라 달려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피가 강을 이루어 흘렀다. 그녀는 그곳에서 부상자에게 물과 빵을 주었다. 그리고 연인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그녀는 전사 파블레 오를로비치를 만난다. 그림은 그녀가 죽어가는 그에게 물을 주는 장면이다. 서사시에서... 오블로비치는 그녀에게 연인과 그의 형제들은 모두 죽었다고 알려주면서 그들이 죽은 곳을 가르친다.


이 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번역하면 이렇다.)

“오 불쌍한 이여, 악마가 그대의 운명이구려!
불쌍한 당신이 그 푸른 소나무를 잡는다면 그것마저 시들어 버릴 것이니!“


세르비아인들은 바로 이 노래를 부르면서 6백 년을 살아왔다. 복수의 칼을 갈면서 말이다. 1989년 6월 15일 코소보 벌판에는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였다. 후에 세르비아 대통령이 되는 밀로세비치를 포함한 세르비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코소보 전투 6백 주년을 기념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었다. 저주와 복수를 위한 기념식이었다. 그리고 나서 10년 후 코소보에는 유혈사태가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코소보 사태다.


그림 속의 코소보 연인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후손의 후손, 그 후손의 후손들이 그 비극을 기억해주는 것, 그래서 반드시 복수해 주는 것, 바로 그것이었을까?


역사의 기억이 이럴 때는 원망스러울 뿐이다.(2015.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