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인문명화산책

인문명화산책3생명의 가치를 그린 예술가들

박찬운 교수 2015. 9. 27. 05:20

인문명화산책3

[생명의 가치를 그린 예술가들]


요 며칠 사이 뭔가 자꾸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림 한 점을 보면 그냥 예사롭게 넘기질 못한다. 비탄에 빠진 인간을 그린 작품을 볼 때는 마음이 더욱 심란하다. 그 마음이 이 글쓰기를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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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그 생명은 신성하다. 이 믿음이 바로 인권사상의 주춧돌이다. 다른 모든 인권은 여기에서 파생하는 권리다. 그런 이유로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의 존엄성(제1조)과 생명권(제3조)을 최우선 권리로 선언하고 있다(우리 헌법은 제10조에 인간 존엄성을 선언하고 있지만 생명권은 명문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생명권이 인간 존엄성에서 파생하는 기본권이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예술사에서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창조적 예술로 승화한 예는 근대 이후에나 발견된다. 19세기 낭만주의는 인간이 갖는 극단적인 감정, 기쁨과 환희, 사랑과 애증, 고통, 광기와 연관된 인간 행위를 여과 없이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방법으로 인간생명의 고귀함이 이 시기에 몇 몇 화가들에 의해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프란시스 고야의 <1808년 5월 3일>


오늘 내가 첫 번째로 이야기할 그림은 바로 그 19세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한 화가의 그림이다. 좀 섬찟할 지도 모를 작품이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면 프라도 미술관이 있다. 세계 3대 미술관이라고도 불리는 미술관으로 서양미술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대가의 그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등의 대가가 바로 이곳의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바로 프란시스 고야다.


아마 이 화가가 그린 <벗은 마야 부인>과 <옷 입은 마야 부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내 방에도 그 그림이 있다(프린트인데, 전면에는 <벗은 마야>, 후면은 <옷 입은 마야>가 그려져 있다. 내 방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민망해 할 것 같아 평소에는 <옷 입은 마야> 쪽만 보이도록 걸어두고 있다).


마야는 그 시대 일찍이 20세기 현대미술을 예상한 천재적 상상력의 화가였다. 그가 그린 <아들을 잡아먹는 사트르누스>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폭로한 괴기한 그림으로 동시대에 이와 비견될 수 있는 그림을 찾을 수 없다. 사실주의적 그림을 그리면서도 한 세기 후의 추상화를 보는 듯한 창조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런데 나는 프라도에 걸려있는 그의 여러 작품 중 유독 한 작품에 눈이 간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1808년 5월 3일>이라는 그림이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나폴레옹 군대에 항거한다. 그러자 나폴레옹 군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이 그림은 그 만행을 그렸다.


그림을 자세히 보자. 처형하는 자들은 총을 들고 있지만 얼굴을 알 수 없다. 그들의 살인행위는 기계적이다. 반면에 처형당하는 시민들의 얼굴은 보는 이의 모골을 송연케 한다. 공포에 질린 눈망울이 한 눈에 들어온다. 죽는 사람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손든 사람 옆을 보라. 죽음을 기다리는 긴 행렬이 보인다. 저 밤이 가기 전에 저들은 모두 저 살인기계들에 의해 저 세상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 그림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게 하나 있다. 그림을 유심히 보면 뒷 배경으로 큰 건물이 하나 보인다. 교회다. 고야는 야심한 밤에 이뤄지는 참상을 그리면서 왜 이 성당을 굳이 그려 넣었을까? 악행을 범하는 인간들에 대해 하느님이 보고 있다는 경고일까? 아니면 양민이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감에도 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종교에 대한 조롱일까?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또 하나의 그림이 생각난다.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오늘 두 번째로 보는,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죽기 전 단 한 점ㅡ내가 알기엔 그렇다ㅡ 한국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다. 그것도 매우 비극적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연상시킨다. 고야가 피카소의 조국 스페인의 선배작가이니 그의 그림이 피카소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 화풍이 확연히 다를 뿐이다. 피카소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그는 이미 입체파의 대가로 국제적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피카소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951년 1월로 알려졌다. 때는 한국 전쟁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전쟁의 참상은 시시각각 파리에 있는 피카소에게도 알려졌다. 누구는 이 그림이 한국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미국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을 모티브로 그려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림에서 총을 겨누는 사람들이 미군이라는 단서를 찾긴 어렵다. 시기적으로 보면 그 개연성은 있지만 나는 오늘 그 사실여부를 여기에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의 만행을 피카소가 그려 그것을 세상에 고발했다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위에서 본 고야의 그림처럼 총을 겨누는 이들은 철 가면을 썼기 때문에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그들은 고야의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살인기계다. 기계들의 만행은 어쩜 고야가 그리고자 한 것을 훨씬 능가한다.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은 남자가 아닌 연약한 여인들이다. 그녀들은 모두 벌거벗은 상태다. 임산부, 가녀린 소녀,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꼬마 녀석 둘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도 모른 채 천진난만한 장난을 하고 있다. 전쟁은 이렇게 순박한 양민을 죽였다. 그 어떤 고상한 말로도 저 전쟁을 미화할 순 없다.


피카소가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자유주의자로서의 그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90이 넘는 긴 생애를 살면서, 한국 전쟁 이전, 두 번의 세계전쟁과 스페인 내전을 목도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파시즘에 저항했고 그림으로 그것을 표현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오늘 세 번째로 보는 그의 대표작 <게르니카>가 바로 그 진수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지금은 마드리드의 소피아 왕비 미술관에서 볼 수 있지만 피카소 생전엔 스페인에서 볼 수 없었다. 그가 독재자 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에 이 그림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37년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프랑코를 지원하기 위해 바스크 지방의 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을 감행한다. 그로인해 1,500명이나 되는 양민이 죽임을 당했다. <게르니카>는 그것을 그렸다. 그것은 나치즘과 파시즘에 미술로 저항했던 피카소의 반전 선언문이었다.


<게르니카>는 입체적인 그림이기에 무엇을 표현했는지 바로 알기 어렵다. 하지만 흑백의 톤만으로도 무거운 분위기는 쉽게 감지된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림을 자세히 보자. 불이 난 집,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멍한 황소의 머리, 비탄에 빠진 여자들이 엉켜져 있다. 피카소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비규환 속에 있는 인간의 절규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가. 누구나 생명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인간의 탐욕은 가장 소중한 가치인 그 자신의 생명마저 무가치하게 파괴했다. 인간은 절규하면서도 이런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이 밤, 그림 몇 점에서 숭고한 생명사상을 배운다.


(2015. 2. 10.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찬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