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사상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사회>를 읽고

박찬운 교수 2015. 9. 27. 17:48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사회>를 읽고


주말을 이용해 책 한 권을 읽었다. 제러미 리프킨의 최근작 <한계비용 제로사회>.


나는 얼마 전 리프킨의 초기작 <엔트로피>를 소개하면서 그 책은 내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썼다. 한 권의 책이 한 지식인에게 그렇게 영향을 끼치긴 어려울 텐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다.

리프킨은 그간 <엔트로피>를 비롯해서 한국에서 10권의 책을 번역·출판했다. <육식의 종말>.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수소혁명>, <바이오테크시대>, <유로피언드림>, <공감의 시대>, <제3차 산업혁명>, <한계비용 제로사회>가 바로 그 북 리스트다.


엔트로피가 이들 책 중 서장에 해당하는 책이라면 <한계비용 제로사회>는 종장에 해당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리프킨은 이제 더 이상 책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가 할 이야기는 다 했다. 만일 더 한다면 그것은 보족일 뿐이다. 그런데... 그가 서장인 <엔트로피>에서 내다 본 세계와 종장인 <한계비용 제로사회>에서 내다 본 세계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다. 그게 오늘 내가 여기에 글을 쓰는 이유다.


<엔트로피>에서 리프킨이 그린 세계는 어둡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는 곧 고갈되며 그것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엔트로피적으로 볼 때 그가 <육식의 종말>에서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인간이 육식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가? 그러니 우리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육식을 줄이는 것이다.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하는 것이고, 기술문명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여야 한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그가 본 세상은 어두웠다.


그런데 <한계비용 제로사회>에서 리프킨이 내다보는 세상은 밝다. 에너지 문제는 재생가능에너지로 해결되고, 그 에너지를 생산하는 한계비용은 제로에 가까워진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재생가능에너지의 기술력이 예상보다 놀라울 정도로 높아져 화석에너지를 대체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사물) 인터넷의 발달로 이들 에너지가 최적으로 관리되어 엔트로피를 극한으로 다운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이미 경험하고 있지만—공짜로 재화(상품과 서비스)를 갖고 즐기는 시대에 돌입한다. 인터넷에서 공짜로 음악을 즐기고, 공짜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다. 인터넷에 올려 진 오픈 소스로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환경에서, 어디서나, 3D 프린터를 사용하여 물건을 생산할 수도 있다.


인류사회는 바야흐로 돈을 주지 않고도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협력적 공유사회(collaborative commons)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종언을 고하지만 그 결말은 아름답다. 혁명에 의해 공산주의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사람들의 공감력에 의해 협력적 공유사회가 된다니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유토피아가 아닌가!


그런데... 나는 이 책을 닫으면서 뭔가 큰 고민에 빠졌다. 지난 십년 간 리프킨을 통해 배운 것과는 뭔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글을 통해 배운 것은, 인간의 기술력의 한계를 알고 엔트로피적 삶(엔트로피를 낮추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세계의 미래가 어둡다고 하는 그의 예견을 믿었기에,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는, 나라도 검소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유토피아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기술력은 엔트로피를 최적화 상태로 조절함으로써 에너지 문제를 결국 해결하고, 인간은 지금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의문이다. 이건 너무 상상이 심한 것이 아닐까? 그답지 않게 너무 교만한 것은 아닐까? 한계비용 제로사회가 올 것인가도 의문이지만 혹시 온다고 해도 그게 어찌 풍요의 유토피아가 될 것인가. 노동의 종말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면서 일하는 1%의 사람들이 주는 떡만 먹고 사는 것은 아닐까? 컴퓨터와 사물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조절되면서 에너지의 효율은 극대화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끔찍한 통제사회를 전제하는 이야기는 아닐까?


리프킨의 종말론적 엔트로피적 사고가—이것 때문에 사실 내가 그의 추종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이 책의 출현으로 사실상 폐기된 것은 아닐까? (사실 그런 조짐은 <공감의 시대>, < 3차 산업혁명>에서 충분히 감지되었다.) 리프킨이 내 앞에 있다면 묻고 싶다. “과연 그런가요?”

그렇다고 말한다면, 이 책은, 나로서는, 참으로 문제적이다.

(2014.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