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사상

왜 그는 거리의 인문학자가 되었는가

박찬운 교수 2016. 1. 30. 04:32

왜 그는 거리의 인문학자가 되었는가

-이도흠의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를 읽고-



 

 

이 글은 이도흠에 대한 헌사다

이 글은 단순한 책 리뷰가 아니다. 이 글은 한 지식인, 한 대학교수에 대한 헌사다. 나는 지금 이 글을 호주 멜버른에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쓴다. 며칠 전 유엔 국제난민기구와 멜버른 대학이 공동주최하는 국제 워크샵에 참여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멜버른까지의 여정은 인천공항에서 장장 16시간. 나는 이 긴 시간을 이도흠의 최근작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와 함께 했다. 내가 이 책을 가져 온 것은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알고 싶었던 이도흠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함이었다.

 



멜버른 대학 법대 회의장에서 본 멜버른 다운타운




멜버른 대학 법대 앞에서 필자


멜버른의 새벽은 번잡한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조용하다.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은 수정 같이 맑다. 나는 새벽 일찍 기상하여 창문을 열고 시원한 아침바람을 맞으면서 책장을 넘긴다. 과연 이도흠은 누구인가, 과연 그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왔으며, 우리에게, 특별히 나에게, 무슨 말을 전하는가.

 

거리의 인문학자 이도흠

이도흠. 한양대 국문과 교수. 그는 지난 30년간 국문학의 본향인 향가를 연구하면서 그 깊은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 불교, 그중에서도 원효 공부에 매진했다. 그렇게 해서 원효의 화쟁사상을 집대성했고 수많은 불교관련 논문을 상찬함으로서 이 나라의 우뚝 선 불교연구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고 그는 젊은 시절부터 마르크시즘을 연구한 외에 지칠 줄 모르는 독서력으로 서양현대철학을 두루 섭렵했다.

 

연구자로 살아오면서도 그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상임의장을 역임하며 자본에 의해 죽어가는 대학을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했고, 4대강 사업, 쌍용자동차 노동자 정리해고, 밀양송전탑 등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시위대 맨 앞자리를 지키며, 때론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과 몸싸움을 하기도 했고, 때론 거리에서 무도한 정권에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지금 그는 대안대학의 이사장으로 새로운 교육실험을 하고 있고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로 불교 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거리의 인문학자라 부른다.

 

나는 그를 10년 전 대학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교수가 되고 난 이후 동업자인 법률가나 법학교수보다는 다른 영역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만나길 원했다. 대한민국의 대부분 법률가, 법학교수에게서 볼 수 있는 협소한 세계관과 체제 순응적 보수주의가 싫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넓게 보고 이 시대의 각종 모순을 열린 자세로 보면서 끊임없이 그 개혁을 이야기하는 진보적 지식인을 만나고 싶었다. 이도흠은 그런 인물 중에서도 독보적 존재였다.

 

정민과 이도흠

교수가 되어 같은 캠퍼스 내에 있는 국문과 교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두 명의 교수가 눈에 들어왔다. 정민과 이도흠이다. 이 두 사람이 한 캠퍼스에 있음으로 우리 대학 국문과 학생들은 행복하다. 이 둘은 대학동기생이지만 각자 개성이 분명한 사람들이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정민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는 우리 대학이 내놓은 최고의 인문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다. 한시를 맛깔스럽게 해석하면서 대중에게 다가가더니 언제인가부터는 다산 정약용에 대한 연구로 인기를 끌고 있다. 사람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평생 책 한 권내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그는 매 해 1-2권씩의 책을 독자들에게 안겨주고 있다. 한마디로 경탄할 만한 인물이다.

 

하지만 나는 정민에게 다가가 본 적이 없다. 그의 보수성이 나와 그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10년간 학교에 있으면서 시국과 관련하여 교수들이 대외적인 성명을 발표할 때 정민의 이름을 본 적이 없다. 학교 내의 민주화를 위해서 뜻있는 교수들이 모임을 만들어 움직일 때도 정민이란 이름은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절대로 그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정민은 존경할 만한 학자로 이제껏 흠 없이 살아 온 인물이다.

 

그는 누가 뭐라 해도 그만의 세계를 만들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글을 쓰고, 열심히 책을 내 대중의 마음속에 인문의 향기를 부어주는 인문학자다. 그만하면 되었지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다만 내가 보기엔 그의 눈엔 세상의 모순은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문제는 그에겐 부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정민보단 이도흠에게 끌리는 이유다.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도흠이 보낸 대학생활, 내가 보낸 대학생활

이도흠, 그는 79학번으로 나의 대학 2년 선배다. 그가 대학을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우리 대학은 암울 그 자체였다. 유신정권의 철권정치가 절정에 달해 세상천지가 온통 암흑의 세계일 때 대통령이 살해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터진다. 그가 대학 1학년 때 맞이한 10. 26이다. 전두환 세력이 12. 12.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면서 또 다시 군부독재의 길을 걷자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나고 그 피비린내가 전국을 진동하던 바로 그 때 그는 대학 2학년을 맞이한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의식 있는 젊은이라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도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담담히 술회한다.

 

광주민주항쟁! 수많은 민중이 그리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데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미국문화원에서 관련 기사를 복사하고 번역하여 몰래 지인들에게 전한 것이 모두였다. 그 후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무엇인가 하려 했지만, 소변을 보러 가는 시간만 제하고는 16시간을 연이어서 한국 사회 분석, 종속이론과 세계 분석, 혁명론, 마르크스 이론 등을 후배들에게 강의하고 밤을 새워 지하신문을 만들 정도로 열정은 있었지만, 늘 주변이었다. 서울의 변두리에서 빈민으로 살았고, 2류 대학을 다녔고, 그곳에서도 중심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용기가 없었고 능력도 부족했다.”(책 머리말 중에서)

 

잠시 나를 돌아보자. 이도흠 보단 2년 늦게 대학을 들어왔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은 1, 2년 전사건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열혈청년들의 의기는 살아 있었고,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며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이도흠은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서만 저항했다고 하지만 나의 삶은 그것과도 무관했다. 나는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내 살 길은 오로지 고시공부밖엔 없다면서 법전과 법서를 끼고 살았다. 이도흠이 우리 현실을 분석하고 저항하기 위해 하루 16시간을 이념서적을 탐독할 때 나는 학교 고시반에서 같은 시간을 법서 읽는 데에 투자했다. 매년 4월이 되고, 5월이 되면 캠퍼스와 서울 시내 거리는 최루탄으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나는 애써 그런 장면을 피했다.

 

덕분에 나는 남들이 말하는 소년 등과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고시에 합격했고 그 이후 크게 어려움 없이 살아 왔다. 변호사가 되었고, 해외유학을 했고, 박사를 받았고, 공직을 거쳐 드디어 대학교수가 되었다. 물론 이 기간 중 나로선 남달리 생각하고, 남다른 활동을 하면서 무언가를 이룬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크게 내세울 것도 없다.

 

나도 피가 뜨거운 사람이고 앎을 실천하길 바라온 사람이다. 그렇지만 젊은 날의 내 초상을 떠올리면 부끄럼이 앞서기에 조금이라도 내 능력을 우리 사회를 위해 사용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이도흠을 만나고부터는 부끄러웠다. 그의 앞에 서기만 하면 나는 한 없이 작은 사람이 되었다. 그의 진보적 생각을 따라가기 힘들었고, 그가 거리에서 몸으로 보여주는 행동엔 심정적으로는 동의했지만, 감히 함께 하질 못했다. 나는 여전히 비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 오늘의 이도흠이 탄생했는지, 적당히 해도 존경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그가, 왜 그리도 험난한 삶을 자초하는 지.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가 지난 한 해 연구년(안식년)을 보냈다. 아마 이 기간 중에 그를 본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거리에 나오는 일도 자제하고 골방에 틀어박혔다. 그러던 그가 1년간의 잠행을 끝내고 내 앞에 나타났다. 얼마 전 일단의 교수들과 변호사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위안부 한일정부 합의를 비판하는 의견서를 발표했는데, 바로 내 옆에 그가 서 있었다. 그날 나는 그와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책 이야기를 들었다. 연구년 기간 중 책 한 권을 냈다고. 그게 바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라는 책이다.




필자가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다. 맨 왼쪽이 이도흠 교수

 

며칠 동안 이 책을 읽고 있지만 800쪽이 넘는 대작을 단번에 독파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그의 30년간의 연구를 한 눈에 보여주는 , 그야말로 그의 주장을 집대성한 책이다. 하여, 우리는 이 책을 통해 30년간 이도흠이 대한민국의 개혁을 위해 무엇을 고민했고, 무엇을 공부했고, 무슨 글을 썼고, 무슨 말을 해왔는지를 한 번에 알 수 있다. 책 표지의 카피대로 이 책은 거리의 인문학자 이도흠이 우울한 이 시대의 한 복판에서 모든 대립을 하나로 아우르는 원효와 자본주의의 해체를 주장하는 마르크스를 가로지르며 거침없이 포효하는 직언이다.

 

방대한 책을 요령껏 소개한다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이도흠의 일관된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그것만은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다. 그 일관된 생각이란 게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의 제목대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로 이 사회의 모순을 바라보고 개혁하자는 것이다. 원효로 대표되는 불교적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는 게 아니고, 마르크스의 계급혁명적 사고로만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이 두 개를 아울러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교도 변하고, 마르크스도 변하여 새로운 사상체계가 탄생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마르크시즘을 비롯한 서양이론은 실체론과 이분법, 동일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연기론과 퍼지식 논리, 차이의 사유를 하는 불교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그릇에 담길 수 있다. 초역사적이고 관념론에 치우쳤으며 과학성과 합리성을 결여한 불교는 마르크스와 서양이론을 통해 중생이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직시하면서 역사성과 사회성을 결합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틀과 방법론을 빌리면서 유심론에 유물론적인 인식을 끌어안을 수 있다.”(서문)

 

이렇게 두 사상이 만나 21세기 오늘, 자본과 인간, 세계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면 어떤 유용한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것은 마르크시즘을 뛰어 넘는 것이다. 죽어가는 마르크시즘은 새로운 동력을 얻어 세상을 개혁하는 새로운 사상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노동이 해방되고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마르크시즘은 유토피아로서 인류의 빛이었지만 그것은 인간자체의 악마성을 넘지 못했다. 인간 없는 마르크시즘은 그저 단순한 교조로서 지성의 무덤이자 폭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이도흠은 이렇게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나와 세계의 변혁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이 변해야 세계가 바뀌며 새 하늘이 열려야 개인의 거듭남도 유지된다. 진보의 한계와 오류를 성찰하고서 그를 보완할 지혜를 붓다에게서, 이를 화쟁의 원리로 하나로 아우른 동쪽 변방의 철학자 원효에게서 찾는다.”(서문)

 

원효의 화쟁이란 무엇인가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선 저자가 책의 초반에서 방법이라는 표제로 소개하는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도흠의 학문적 성과는 본래 이것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는 17년 전인 1999년 원효의 화쟁사상을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통해 집대성했다. 그러니 저자가 설명하는 화쟁사상의 전모를 보려면 그 책으로 돌아가야 되지만 저자는 이 <대화>에서 그 알짜배기를 소개한다. 이 짧은 글에선 그것마저 전부 다 보여줄 수 없으니 여기에선 내 눈에 들어온 몇 부분만을 보기로 하자.

 

화쟁이란 여러 경전에서 큰 줄기를 찾아서 부분의 대립을 이에 통합하고 불성을 되찾아 다양한 사상과 주장과 논리들, 상대방의 조건과 맥락을 공과 연기의 원리, 한맛의 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부처님의 무한하고 지극히 공변된 뜻을 지향하여 자신의 사고에서 벗어나 타인의 주장과 논리의 타당성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여 모든 쟁론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다.”(47)

 

이렇게 이야기하면 화쟁을 포용의 사고로만 이해할 지도 모른다. 세상의 진리를 완전히 상대화하는 게 화쟁이란 말일까? 그렇지 않다. 화쟁은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물에 물을 타고, 술에 술을 탄 미적지근한 사상이 아니다.

 

화쟁은 서로 대립했을 때 대립물 사이의 조건과 인과, 특히 그 사이에서 작용하고 있는 힘과 고통에 대해 연기적 관계를 깨우치고 일심을 지향하여 파사현정을 한 후에 상대방의 조건과 맥락 속에 들어가서 중도의 자세로 소통을 하여 고통을 없애고 서로를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55)

 

그러니 화쟁을 단순히 싸우지 말고 화합하는 것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그것보다는 치열한 쟁(, 이것은 과 통한다)의 과정을 거쳐 화()를 지향해야 한다. 그러려면 모든 삿된 것을 혁파하고 무엇이 진실인가를 가려야 하고 권력을 대칭으로 만들어 관계자 모두가 철저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토론해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를 부처로 바라보며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조건과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바로 화쟁의 방식이다.

 

이도흠이 30년에 걸쳐 이루어 온 화쟁사상을, 어찌 순식간에 이해하고,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손에 잡힐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단지 이런 말로 그가 말하는 화쟁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도흠은 우리가 마주친 세상을 무조건 화()의 사상으로 이해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마르크시즘을 비롯한 서구의 근대적 사고방식으로 철저히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한다. 그런 다음 그것을 원효의 탈근대적 사고로 재인식하며 그 너머를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이것이 바로 원효와 마르크스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방법이다

 

환경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이런 방법론을 이용해 이도흠은 10장에 걸쳐 우리가 직면한 본질적 문제(환경 위기, 타자에 대한 배제로서의 폭력, 인간성 상실과 노동,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모순 등등)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 중에서 제1장인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를 어떻게 서술하는지를 통해 그가 어떤 대화를 해나갔는지 간단히 보자.

 

이도흠은 환경의 위기를 부른 원인을 인간 없는 자본주의의 욕망에서 찾는다. 그것은 마르크시즘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마르크시즘 또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준열하게 꾸짖는다. 여기에서 그는 화쟁사상으로 마르크시즘의 인간중심주의를 뛰어넘어 인간이 자연과 서로 상생하고 조화를 이루는 생태론적 세계관을 주장한다. 이것은 객관적인 지식을 통해 자연현상을 지배하려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맞서서 자연과 인간, 우주 삼라만상을 그물코로 연결된 하나로 바라보는 유기체적이고 전일적인 세계관을 말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우선 인간중심주의와 이분법, 근대화를 낳은 폭력적 서열 제도에 대해 처절하게 성찰하고 불일불이와 같은 생태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하고, 이 패러다임에 맞게 사회체제, 국가체제, 세계체제를 혁명적으로 개편하여야 한다. 이제 실체론에서 연기론으로, 동일성에서 차이로,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전일적인 세계관으로, 심신이원론에서 몸의 사유로, 가부장주의에서 여성주의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121)

 

이렇게 해서 나는 이도흠과 그의 신작 <대화>에서 그가 말하고자 한 핵심의 일부를 정리해 보았다. 내가 얼마만큼 그의 생각에 다가갔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정도만이라도 그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게 내겐 더 없이 값진 시간이었다. 그것도 한국이란 공간을 떠나 머나만 이국땅에서 그를 만난 게 내겐 큰 추억이 될 것이다.

 

젊은 날부터 이제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온 그다. 세상의 불의를 외면하지 않았고 결연히 일어난 그다. 연구자로서 꾸준히 불의의 세상을 분석했고 그 해결책을 고민한 그다. 앎이 앎으로 끝나지 않았고 행동으로 연결한 그다. 우리 대학에 그가 있음은 대학이 살아 있다는 마지막 자존심이다. 나는 그의 발 뒷굼치에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선배의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크나 큰 복이다.

 

선배여, 강건하시라! 선배여, 결코 포기하지 마시라!


(2016. 1. 30. 호주 시드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