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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복, 복 중의 복

박찬운 교수 2018. 12. 30. 17:52

죽는 복, 복 중의 복

 

이제 올 한 해가 저물었습니다. 며칠 지나면 나이 한 살을 또 먹습니다. 제겐 나이 먹는 게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0대에 법률가가 된 저로선 나이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한참 젊은 때에 나이 든 의뢰인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매일 같이 만나는 동료 변호사들 대부분이 적게는 10년, 많게는 30년 이상 연상이었으니, 처신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연륜이 쌓이는 것 같아 흐뭇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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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나이 먹는 게 즐겁지 않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제일 큰 어려움은 주변의 죽음을 너무 자주 본다는 것입니다. 요즘 제일 많이 찾아다니는 곳이 장례식장입니다. 올해도 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20회 이상 장례식장을 다녀왔습니다. 죽음을 알리는 부고 문자 메시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어옵니다.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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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본격적으로 늙음과 병마 그리고 죽음을 목도하며 삽니다. 얼마 전부터는 제 집안에도 병마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구순이 다가온 아버지의 병세가 심상치 않고, 몇 년 전부터 난치병과 싸워온 형은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마지막 거친 숨을 병상에서 토해내고 있습니다. 생노병사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주로(走路)라지만 이 상황을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신들의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가족들의 그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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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선배들이 하는 말을 이제 실감할 수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인생에서 제일 큰 복 중 하나가 죽는 복이라네. 잘 늙고 잘 죽는 게 진짜 복 중의 복인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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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복? 늙어서 병마의 고통을 크게 겪지 않고 조용하고 편하게 죽는 복입니다. 주변에 큰 폐를 끼치지 않고 노년을 즐겁게 사는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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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타계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어느 책 추천사에서 이런 바람 하나를 말했습니다. 바로 노년의 건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평범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야 할 소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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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이가 들어서도 생각하고 기억하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새 소설이나 신문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기를 원한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여기저기 다닐 수 있고 혼자서 옷을 갈아입고 식사도 자기 손으로 하며 화장실에도 혼자 다닐 수 있었으면 한다. 또한 만성 질환으로 고통 받지 않기를 소망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기를 원한다.”(<우아한 노년>, 데이비드 스노돈, 유은실 옮김, 8-9쪽)

 

(2018.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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