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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나이 듦에 대하여

박찬운 교수 2020. 1. 4. 06:01

 

벌써 2년 전 사진이다. 전남경찰청에서 강연하던 장면

 

이제 올해가 72시간도 남지 않았다. 그 시간이 지나가면 또 한 살을 먹는다. 50대의 마지막 해에 들어서는 것이다. 올해는 어느 해보다 특별하다. 아버지와 형의 잇 달은 죽음, 큰 아이의 결혼...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해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경험하는 통과의례치곤 강렬하기 그지없다.

과거엔 나이 먹는 게 좋았다. 떡국 한 사발에 나이 한 살이라는 말에 한 살 더 먹으려고 떡 국 두 사발을 먹었던 시절도 있었다. 나는 나이 삼십 이전에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직업 속성상 사십 중반 때까진 나이 콤플렉스가 있었다(변호사는 나이가 어리면 의뢰인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어렵다). 무슨 자리에 가도, 무슨 직을 맡아도, 가장 나이 어린 사람 축에 속했으니....


나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할 땐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말투를 동년배에 비해 더 점잖게 하려고 노력했고, 헤어스타일도 나이에 비해 5년 10년 늙게 보이려고 했다. 또 누군가 나이를 물어보면, 묻지 않는데도, 실제 나이와 호적 나이가 다르다는 것을 고백하는 버릇이 생겼다. 한국 사회는 그만큼 나이가 중요했고, 분명 나이 값이란 게 있어 보였다.

나이 문제는 50줄에 들어서서 비로소 해결되었다. 어느 순간인진 기억 못하지만 각종 모임에서 내 자리가 달라졌다. 구석자리에서 소위 헤드테이블 가까이로 바뀌더니 아예 헤드테이블 가운데에 배치되는 일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지난 30여 년간 각종 자문 위원회에 참여해 왔는데, 만년 평 위원에서 언젠가부터 부위원장 드디어 작년부터는 위원장 직함까지 받게 되었다. 그 사이 연수원 동기생들은 대법관이나 헌재재판관 혹은 장관자리에 올랐다가 퇴임했다.

나를 둘러싼 인생사가 이제 정점을 찍고 어느새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것 같은 감이다. 내가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것인가. 법률가의 삶이 조로하다고 하더니 나도 그런 것인가?

물론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라는 말에 적극 공감하기도 한다. 나는 지금도 어떤 자문기구에 가도 나이를 내세워 입에 바른 인사나 하고 선문답식 말이나 하는 그런 위인이 아니다. 아마 나를 아는 이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나는 항상 실무자들을 긴장상태로 몰아넣는 사람이다. 가끔 나를 아끼는 이들은 나보고 이제 그런 말을 할 군번이 아니라고 점잖게 조언하지만, 나의 이런 스타일은 좀처럼 고쳐지질 않는다.


그럼에도 내 젊은 시절의 열정과 용기는 이제 시나브로 시들어져가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혈기왕성한 열혈청년의 모습은 과거의 추억으로 간직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자연의 순리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몇 년 전 런던에서 연구년을 보내면서, 그해 마지막 날을 집에서 홀로 보냈다, 센티한 마음을 담담하게 써 이 공간에 올렸다. 다시 읽어보니 오늘 하고 싶은 말 그대로다. 나는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마지막 날의 독백

...

한 해의 마지막은 옛날엔 무척 특별한 날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특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 말 듣는 게 특별할 뿐

이게 나이를 먹어간다는 증거겠지
어쩌겠어 막을 수 있는 게 아닌데

나는 그저 소박한 꿈을 꿔
좀 사랑이란 걸 제대로 하고 싶어
뭐 대단한 것은 아니야

생각해보니 나의 과거는 나밖에 없었어
이젠 내가 가진 그 알량한 것이라도
가족에게,
친구에게,
이웃에게
내놓아야 할 것 같아


나도 이젠 언제든지
영원히 살 곳으로 간다는 마음을 가져야 해
갈 때 미련을 남기지 않고
홀가분하게 가고 싶어


마지막 날인데...
어제와 크게 다르진 않아
제야의 종소리를 꼭 들을 필요도 없어
평상시처럼 나는 조용히 잠을 잘거야

내일도 창문 열면 해는 떠오르겠지

나는 이제 여기까지 온 것이야, 서러워하진 마
그게 인생이니.

(2019.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