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Essays/깊은 생각, 단순한 삶

행복에 대하여-평온한 삶, 그것이 행복이다-

박찬운 교수 2019. 4. 19. 10:09

 

2019년 4월 17일 감기가 걸린 상태에서 대구지방경찰청 강당에서 300명 경찰관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삶의 만족도가 행복과 직결된다면, 행복의 정의 대신 행복의 조건은 말할 수 있겠지요. ‘이러이러한 조건일 때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다’라고요. 

오늘 하루 종일 그 생각을 했습니다. 내겐 그 행복의 조건이 무엇일까? 저녁을 맞이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삶의 평온이 깨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 제가 가장 바라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공기나 물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그것이 없을 때 바로 느끼듯 삶의 평온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평온이란 평상시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어쩜 그 평온 속에 산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평온이 깨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달게 되는 것이지요.

한동안 지속되었던 제 삶의 평온이 요즘 위협받고 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연구실에 나가 책을 보고 글을 썼습니다. 햇볕이 그리울 때는 연구실 밖을 나가 마냥 걸었지요. 저녁엔 뜻 맞는 친구와 와인을 마시며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발품을 팔기도 하는 날도 있었지요. 때때로 영화를 보고 그림을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삶이 지속되니 가끔 지루함도 생겨 일탈의 꿈도 꾸었지요. 그것이 저에겐 평온한 삶이었고, 지금 생각해 보니, 저에겐 행복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2019년은 매우 특별한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삶의 평온이 깨져 행복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느끼는 해입니다. 제 개인적으론 올해 좋은 해입니다. 교수로서 사회적으로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을 많이 합니다. 큰 아이는 결혼을 앞두고 매일같이 들떠 있습니다. 거기까지만 보면 평온하기 그지없는 일상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상황은 180도 다릅니다. 아버지 병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이 60이 못 되어 찾아온 희귀병으로 지난 4-5년 간 병상을 지켜온 형의 병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병원으로 출근하고 저녁에 병원에서 퇴근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거기다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어려움까지 계속 들려옵니다. 그러니 연구실에서 가만히 앉아서 책을 보기 어렵습니다. 집중해서 글을 쓰기 어렵습니다. 

20여 년 전 갑작스럽게 삶의 평온이 깨진 일이 있었습니다. 변호사 생활 10년을 넘길 때였지요. 외국 유학도 다녀왔고, 벌이도 괜찮아 (집안 최초로) 서울 강남에 번듯한 아파트를 장만했고, 아이들도 어딜 나가서 빠지지 않으니, 크게 부러울 게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건강하셨던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은 뒤 6개월 만에 돌아가시고, 동시에 아버지는 의료사고로 입원하시고, 누이는 어머니 돌아가시는 날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몇 달 뒤 젊은 제부가 동생과 아이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떴습니다. 한 해에 벌어진 이 망연자실한 상황에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지요. (이 이야기가 저의 SNS 소설 ‘야곱의 씨름’입니다.)

올해 또 다시 그 해의 악몽을 꾸는 것일까요. 피하고 싶은 잔인데...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담담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오랜만에 감기가 찾아왔습니다. 몸은 천근만근, 기침과 콧물이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그런 와중에도 어젠 대구에 내려가 강연을 했습니다. 300명이 넘는 경찰관들 앞에서 열강을 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삶은 이런 것이야, 이것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야.’ 이런 독백 속에 스르르 잠에 빠졌습니다. 서울역에 도착할 무렵 평온을 깨는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2019.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