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일본여행기

가고시마 여행기 1 시로야마에서 사쿠라지마를 보다

박찬운 교수 2026. 1. 7. 05:27

가고시마 여행기 1


시로야마에서 사쿠라지마를 보다
— 변방에서 시작된 혁명, 그리고 한 시대의 종언



시로야마에서 본 사쿠라지마



나는 지금 일본 가고시마시로야마에 서 있다. 발아래로 가고시마 시내가 낮게 엎드려 있고, 그 너머 가고시마만 한가운데에 화산섬 사쿠라지마가 묵묵히 떠 있다. 살아 있는 화산 앞의 고요함... 사쿠라지마의 정상에선 활화산을 증명하는 연기가 오늘도 분출한다. 토쿄나 오사카에서 기대하는 일본의 속도는 이곳에 없다. 대신 시간이 한 박자 늦게 흐르는 지방도시 특유의 정적이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고요한 남쪽 변방이 일본 근대사의 출발선이었다.

시로야마 전망대에서 본 사쿠라지마. 가고시마 시내가 발 아래에 있다.


메이지 유신 이전, 이곳은 사쓰마번이었다. 일본 열도의 끝이었지만, 바다를 통해 세계로 열려 있던 땅이다. 규슈 북부의 나가사키, 그리고 그 너머 조슈번과 더불어, 사쓰마는 서양 문물이 일본으로 스며드는 주요 통로였다. 사쓰마의 영주 시마즈 가문과 그 아래 젊은 사무라이들은 서양의 대포와 군함, 과학기술에 일찍 눈을 떴다. 일본을 지키려면 일본을 바꿔야 한다는 인식, 일본 안에만 머물러서는 일본을 살릴 수 없다는 불온한 직감이 이 남쪽 변방에서 먼저 싹텄다.

사쿠라지마 정상에서 연기가 분출한다.


조슈의 각성은 더욱 극적이었다. 한때 존왕양이를 외치며 무력으로 서양을 몰아내려 했던 조슈는 1863년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는 외국 선박을 포격했고, 이듬해 영국을 포함한 미국·프랑스·네덜란드 연합함대의 반격을 받아 참패한다. 이 패배는 조슈를 무너뜨리기보다 방향을 바꿔 놓았다. 서양을 배척할 수 없다는 사실, 오히려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결론이 조슈 내부에서 급속히 퍼졌다.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 이 기념비는 메이지 유신 이전 쇄국 상황에서도 유럽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일본 근대화의 역군이 된 19명의 사쓰마인들을 기리고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책상 위에서 설계된 것이 아니라, 패배와 세계의 냉혹함 앞에서 몸으로 얻은 깨달음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각성과 시행착오 끝에, 사쓰마와 조슈는 마침내 손을 잡는다. 열강과의 충돌을 통해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공통의 결론에 도달한 두 번은 1866년, 이른바 삿조 동맹을 맺고 에도 막부를 넘어 일본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기로 결단한다. 변방의 연대가 일본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었다.

런던 UCL에 있는 1863, 1865년 유학생 기념비


이 대목에서 내 기억은 2016년 런던으로 옮겨간다. 런던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시절, 나는 자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도서관을 이용했다. 어느 날 UCL 한국인 교수의 안내를 받아 한 기념비 앞에 멈춰 섰다. 메이지 유신 이전, 조슈와 사스마에서 건너온 젊은 유학생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였다. 그 명단 속에서 나는 조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도 발견했다. 그 순간, 런던이라는 세계의 중심에서 사쓰마와 조슈가 이미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삿조 동맹은 1866년에 공식적으로 체결되지만, 그 정신은 이미 이곳 런던에서, 이 젊은 유학생들의 사유 속에서 먼저 태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토쿄 우에노 공원의 사이고다카모리 동상


기억은 다시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일본을 처음 여행한 것은 1992년 봄이었다. 토쿄에 머물며 우에노 공원을 산책하다가 공원 입구에서 뜻밖의 동상을 만났다. 개를 끌고 있는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그는 우리에게 정한론을 주장한 인물로 기억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동상 앞에 서서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사람은 단순한 군국주의자가 아니라, 일본 근대화를 떠받친 한 축이라는 것을. 언젠가 그의 고향 가고시마에 가 보리라 마음먹은 것이 그때였다. 그것이 오늘, 정확히 34년 만에 이루어졌다.

사쿠라지마의 일출

메이지 유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사쓰마와 조슈 사이에는 점점 다른 균열이 자라나고 있었다. 조슈 출신 인물들이 관료제와 군대, 헌법과 내각을 장악하며 근대 국가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동안, 사쓰마는 사무라이적 명예와 도덕에 뿌리를 둔 정치 문화 속에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다. 조슈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는 유럽의 입헌군주제를 참조해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을 주도했고, 1890년 무렵 일본 최초의 내각을 이끄는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변방의 젊은 유학생이 근대 일본 국가의 설계자로 올라선 순간이었다.


사쿠라지마는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제도적 성공이 곧바로 모두의 화해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메이지 국가가 굳어 가는 과정에서 누적된 박탈감과 긴장은 사쓰마 쪽에 고스란히 쌓였다. 그리고 그 구조적 긴장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 세이난 전쟁이다. 1877년, 사쓰마의 사무라이들은 마지막으로 칼을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사무라이 시대 전체가 근대 국가에 던진 마지막 질문이었다.

일출 전의 사쿠라지마


결과는 냉혹했다. 총과 포병, 병참과 통신으로 무장한 근대식 군대 앞에서 칼은 더 이상 대안이 아니었다. 이 시로야마에서 사쓰마는 패배했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그와 함께 사무라이의 시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내 눈앞의 사쿠라지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쿠라지마와 역사의 현장 시로야마는 알고 있다. 변방은 어떻게 중심을 열었는지, 혁명의 주역은 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는지를.



나는 지금 그 모든 시간이 교차하는 자리에 서 있다. 가고시마 여행기의 첫 장은 이 풍경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조용하지만 치열했던 이 땅에는 아직도 일본 근대의 가장 뜨거운 질문들이 식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 같다.(2026. 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