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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칸도릿츠의 중심 칸사이대학

박찬운 교수 2017. 10. 18. 23:03

칸칸도릿츠의 중심 칸사이대학

 

칸사이대학 정문


나는 지금 오사카 칸사이대학에 와 있다.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과 칸사이대학 법학부와의 정기교류회에 참석하기 위함이다. 두 대학의 교류회가 매 해 서울과 오사카를 오가며 학술행사를 한지 20년이 되었으니 의미 있는 행사다. 나는 2006년 학교로 옮긴 이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해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니 간사이대학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이미 서너 차례가 넘는다.

200741일엔 이곳 법학부가 신학기를 맞이해 마련한 특별강연 강사로 나를 초대한 것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 때 나는 강연장에 참석한 800명이 넘는 법학과 신입생을 보고 매우 놀랐다(우리나라와는 달라 일본의 주요대학 법학과는 규모가 상당히 크다. 현재 칸사이대학의 법학과 규모는 학부생만 3천명이 넘는다.). 나는 그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시간 이상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가. 오늘 이 이야기에 나오는 것들이다.

 

칸사이대학 법학부

그동안 몇 차례 이곳을 오면서 이 학교를 한국에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다. 이 학교는 한국에선 잘 알려진 대학이 아니지만, 우리 학교와의 특별한 인연을 넘어, 한국 사람들에게 충분히 소개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학이다.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한다. 오늘 바쁜 일정이었지만, 점심시간을 이용해, 학교 이곳저곳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그런 사진과 자료 사진을 활용해 지금부터 칸사이대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칸칸도릿츠의 중심
일본 대학가에서 오래전부터 회자되는 칸칸도릿츠라는 말이 있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칸사이 지방을 대표하는 4개의 사립대학을 부르는 말이다. 칸사이대학(오사카), 콴세이(칸사이)가쿠인대학(코베), 도시샤대학(쿄토), 릿츠메이칸대학(쿄토)이 바로 그 대학들이다.


이들 대학은 대부분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에, 칸사이 지방에 처음으로 사립대학이 만들어질 때, 생긴 대학이다. 자고로 일본은 동경을 중심으로 하는 칸토지방과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칸사이지방이 지난 5백 년간 경쟁하면서 발전해 왔다. 칸칸도릿츠는 메이지 시기, 동경에서 게이오, 와세다, 주오, 호세이 등 사립대학이 만들어지자, 그에 뒤지지 않기 위해 칸사이 선각자들이 만든 대학이며, 이중에서도 칸사이대학은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칸사이대학엔 현재 3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두 개의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있다. 뿐만 아니고 이 대학은 부설 유치원, 부설 초중고등학교까지 가지고 있다. 이름하여 교육기관 일체를 일관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칸사이대학 역사관과 대학창립자들


법률학교로 시작된 칸사이대학
칸사이대학은 일본의 유명대학이 그렇듯이 법률전문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막부시대가 끝나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선각자들은 삽시간에 서구문물을 들여온다. 그 가운데 그들이 서양세계에서 본 가장 중요한 제도가 대학이었다. 대학을 키워 인재를 양성하지 않으면 서양을 따라갈 수 없다는 통찰력이, 토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여러 대학이 세워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대부분의 대학이 법률학교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근대화를 위해서는 대학을 세워야 하고, 거기에서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 서양법을 기초로 한 법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칸사이대학도 그런 분위기에서 오사카 지역의 유지들에 의해 1886년 칸사이법률전문학교로 개교했다. 다만 이 대학이 그 당시 다른 대학과 비교해 좀 다른 것이 있다면, 다른 대학들이 대부분 토쿄에서 서양법을 공부한 비실무가 엘리트 의해 주도된 반면, 이 대학은 처음부터 법률실무가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 이 대학의 창립을 주도한 이들이 주로 오사카 재판소의 판사들이었다. 그 중 1인이 일본 사법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인 고지마 코레카타(児島 惟謙)이다. 그는 후일 오늘 날 우리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대심원장을 지낸 인물인데, 그의 유명세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일본 사법사에서 처음으로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낸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칸사이대학 캠퍼스 내 박물관 앞에 서 있는 고지마 흉상, 흉상 옆의 표지석은 이곳이 칸사이대학 발상지임을 알리고 있다.

 

고지마와 오츠사건
칸사이대학의 박물관 앞엔 한 사람의 흉상이 서있다. 바로 고지마 코레카타다. 칸사이대학을 소개하면서 이 사람과 오츠사건을 사건을 소개하지 않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다. 고지마는 오사카고등재판소장을 거쳐 1891년 대심원장이 되었는데, 바로 그해 사법부를 위기로 몬 소위 오츠사건이 터진다. 당시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스가 일본을 방문하던 중 쿄토 인근의 오츠에서 피격을 당한 사건이다. 황태자 경비에 참여한 한 경찰관이 황태자에게 총격을 가했는데, 다행히 결과는 미수에 그쳤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조야는 발칵 뒤집어졌다. 전국적으로 황태자에게 사과하는 집회가 열리고 편지를 보내는 일까지 생겼다. 일본 검찰은 러시아에 대한 진사의 표시로 당시 피의자를 황족살인미수, 즉 대역죄로 기소했다. 문제는 러시아 황태자가 피격 당한 사건을 일본 황족에게 적용되는 대역죄로 처벌할 수 있느냐였다. 러시아와의 관계악화를 우려한 일본 내각은 대심원에 그 적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만일 대심원이 그 적용을 거부하면 국내 여론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고지마는 이 사건에서 적용된 대역죄가 형사법의 대원리인 죄형법정주의(행위 이전에 만들어진 법률이 없으면 범죄가 성립할 수 없고, 형벌도 가할 수 없다는 형사법의 원리)에 반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대심원판사를 설득하여 그 적용을 거부하고, 단순 살인미수죄만을 인정했다. 일본역사에서 독립된 사법부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이런 법률가였기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일본 사법사의 위인으로 기리며, 칸사이대학은 그와의 관련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우리를 초대한 칸사이대학 법학연구소도 바로 고지마를 기념하는 고지마코레카타관이다.

보아소나드(Gusutave Emil Boissonade de Fontarabie, 1825-1910

칸사이대학 창립자 중 한 사람인 이노우에가 사법성법학교에서 보아소나드로부터 자연법 수업을 듣고 그것을 필기한 자료



보아소나드와 칸사이법률전문학교
일본 근대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다. 프랑스 법학자 보아소나드(Gusutave Emil Boissonade de Fontarabie, 1825-1910라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일본이 근대법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1873년 도일 20여 년간(그가 귀국한 것이 1895년이니 정확히 22년을 일본에서 머뭄) 일본에서 머물면서, 프랑스 법을 위시한 서양법을 일본 선각자들에게 가르친 인물이다. 뿐만 아니고 그는 일본이 서양법(프랑스법)에 근거하여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여 공포토록 도왔다.


그의 손을 거친 법률로는 형법과 치죄법(1880), 민법, 상법, 민사 형사소송법(1890) 등이 있다.(이들 법률이 전부 발효된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에선 독일법이 새롭게 뜨고 있어, 그 영향으로 공포된 법률이 발효도 되기 전에 독일법에 근거한 법률로 대체되었다. 대표적인 게 민법이다.) 지금도 일본의 어느 법학자를 만난다고 해도, 보아소나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만큼 이 사람에 대한 일화는 많고 그것을 아는 게 일본에선 법학의 기초다. 나 또한 이 사람을 비교적 잘 알기 때문에, 오늘 학술대회가 끝난 다음 저녁 만찬에서, 그를 주제로 장시간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는 메이지 시대 사법성법학교에서 교수로 일했고, 그 학교가 후일 토쿄대 법학부로 통합되면서부터는, 같은 대학 법학부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렇게 양성된 일본의 초기 법학자나 법실무가들이, 일본 전역으로 흩어져 근대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유수한 청년들에게 법학을 가르쳤다. 칸사이대학도 마찬가지다. 창립자들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보아소나드로부터 직간접 영향을 받았다.

칸사이대학 100주년 기념관엔 법률학교로 출발한 이 대학의 과거를 잘 알 수 있게 하는 전시물이 많다. 그 중 초기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 몇 장이 있는데, 그 하나가 보아소나드 사진이다. 그가 딱 한번 이 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아직껏 이 대학의 관계자들에겐 자랑거리다. 18894월의 일이었다. 일본 근대법의 아버지가 마침내 오사카에 와서, 이제 막 출범한 칸사이대학을 방문했던 것이다.

유태흥 대법원장(1919-2005)



이일규 대법원장(1920-2007)


김선 대한변호사협회장(1920-2004)


칸사이대학과 한국법률가
이 대학을 이야기하면서 한국 법률가와의 인연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유학한 한국의 젊은이 중 상당수가 이 대학 법학부를 노크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법학을 배운 뒤, 해방을 맞이해, 한국으로 돌아가 법률가가 되었다. 그 중에서 특별히 기억이 될 인물이 1980년대 대법원장을 지낸 유태흥과 이일규 그리고 1990년대 후반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낸 김선 변호사다. 이들의 나이가 거의 같은데, 해방 시점에서 25-6세였다.

내겐 이 분들 중에서 김선 협회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분은 박정희 시절 법무차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알려진 바로는 박정희가 김선 차관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강직한 성격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1990년 대 초 이분을 만났다. 나 또한 이분의 강직한 성격에 매료되어, 대한변협 회장이 되는 과정에서, 기획참모 역할을 했고, 당선 후엔 협회장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변협 기획실장을 맡았다.


나와는 무려 40년 이상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이분에게 연설문을 써드리면, 즉석에서 일본어로 번역해,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광경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일본에서 교육받은 것을 생각하면 내가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칸사이대학 캠퍼스 내에 있는 다카마쓰 고분 모형


고고학과 다카마쓰 고분
1973년 오사카에서 멀지 않은 나라의 아쓰카 고분군에서 세계고고학사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불리는 고분 하나가 발굴된다. 우리나라의 교과서에도 나오는 다카마쓰 고분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고분이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고분 속 벽화인 사신도도 그렇고 벽화 속 여인들의 복식이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고분 발굴을 주도한 게 칸사이대학 고고학과이다. 그런 이유로 칸사이대학 캠퍼스 박물관 앞에 가면 다카마스 고분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모형을 볼 수 있다.

이제 말을 맺자. 이 정도면 이 대학이 나름 긍지를 갖고 일본 사회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대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딜 가나,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학교에 대해 긍지를 가질 것을 강조한다. 2007년 이곳에 초청되어 강연을 할 때도 오늘 내가 이야기한 몇 가지를 일본 학생들에게 말했다. 당시 나는 그들의 얼굴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이 글을 현지 호텔에서 밤잠을 줄이며 쓰는 것도 어쩜 내 학교에 대해 긍지를 갖고 살자는 의도일 지도 모른다. 서열화된 한국대학의 현실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최선을 다하는 학문활동을 하다보면, 나도 역사 속에서 무엇인가 발자취를 남길 수 있지 않을까.


(2017년 10월 18일 밤 오사카의 한 호텔에서 이 글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