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소설

‘개천에서 난 용’에 대하여

박찬운 교수 2017. 2. 20. 14:40

소설 아닌 소설(9)

 

 

개천에서 난 용에 대하여

 

1.

무릇 인생이란 주제로 소설을 쓰는 작가는 직접 경험이 많을수록 좋다. 어떤 때는 한 없이 쓰고 또 어떤 때는 한 없이 달달한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 어떻게 인생을 리얼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천혜의 소설가적 운명을 타고 났다. 내 주변엔 이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매일같이 들으며 살아왔다. 적어도 지난 한 세기 동안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아서 적절히 소설적 기법으로 옮기기만 하면 그대로 인생 소설이 될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은 담담하다. 어떤 비보가 들려도 그러려니 하면서 산다. 내게 죽음이 온다 해도 그럴 것 같다. 많은 아픔을 보아왔으니 더 큰 아픔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 않는다. 내 가슴 속엔 내상을 입으면서 자라나는 진주가 있다. 그 진주가 이제 보석이 되어 세상에 나올 때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틈만 나면 소설 아닌 소설'을 쓰는 이유다. 오늘도 또 하나의 주변 이야기를 한다. 소설적 기법으로 쓴 것이지만 21세기 지금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출세한 누군가를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당신은 개천에서 난 용이야.” 그런 예를 여럿 들 수 있지만 아마 가장 적확한 예 하나를 들라면 이런 게 아닐까? 오늘 박판석 옹이 어려운 나들이를 했다. 그 뒤를 따라가 보자. 그 용을 볼 것이다.

 

2.

박판석 옹. 당년 88. 90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가 천천히 무거운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고갯길을 올라가고 있다. 수원의 어느 변두리 요양병원을 찾아가는 길이다.

 

, 큰아버지 오셨어요? 몸도 불편하실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 어멈아, 어떻게 된 일이니? 위암이라면 요즘은 잘 낫는다는데... 누구는 위 전부를 다 떼어내고도 잘만 살던데...”

이 사람은 너무 늦게 발견되었어요. 이미 다른 장기로 다 전이된 다음 발견되어 손을 쓸 수가 없는 모양이어요. 흑흑...”

, 종석이 이놈 박복하구나. 그래도 내 동생 집에서 이놈만은 다를까했는데... 이놈마저 이렇게 가면 어떻게 되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3.

아마 40년도 더 지났을 것이다. 박판석 옹의 나이 40대 말이었으니... 박 옹이 식솔을 모두 거느리고 서울 어느 판자촌 동네에서 살 때였다. 어느 날 전화통에서 연신 따르릉소리가 울렸다.

 

? 뭐라고요. 왕석이가 사고를 당했다고요. 어디요? 봉천동?”

오늘 박소장이 공사현장에서 발을 헛디뎌 5층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옮겼지만 위태롭습니다.”

 

왕석은 박옹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던 바, 70년대 서울에 올라와 건설공사 현장을 전전하면서 십장 노릇을 하였는데, 이날 사고를 당한 것이다. 40대 초반의 나이였다. 그에겐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종명, 둘째, 종찬, 셋째 종석이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동생 왕석이 죽고 나서 이 집안이 어려워진 것은 불문가지. 제수씨가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아들 셋과 함께 봉천동 달동네에서 근근이 살아왔다. 박 옹은 동생 집을 제대로 돕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이 되었지만, 자신도 어렵게 사는 터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세월이 어느새 40년이 흐른 것이다.

 

 

4.

큰 아버지 오셨어요? 저 종찬입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얘야, 그놈 소식은 있니? 종명이 말이다.”

형요? 없어요. 저희들도 경찰에 신고도 하고 찾을 만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네요. 이젠 포기했습니다. 벌써 5년이 넘었으니까요.”

이 일을 어찌 하냐. 장남이란 놈이 도대체 어딜 가고

그렇게 어렵게 산 지 엄마 죽을 때도 나타나지 않으니...”

 

 

5.

큰 아버지는 건강하십니까? 이제 곧 90이신데...”

나야 살만큼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여한은 없다 만은... 나는 너희들만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큰 아버지,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아직 장가도 가지 못했으니... 저도 종석이 저 놈만은 제대로 사람 구실하면서 살 줄 알았습니다.”

큰 아버지, 그래도 좋은 일 하나는 생겼습니다. 이번 대학입시에서 종석이 아들, 명식이가 서울대에 합격했습니다. 과외 한 번 안하고 제 스스로 공부해서 서울대를 들어갔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명식이?... 걔가 서울대에 합격을...”

 

 

6.

명식아, 큰 아버지, 아니 네겐 큰 할아버지다. 인사드려라.”

이름이 명식이? 네가 바로 왕석이의 손자란 말이지. 네가 서울대에 합격했어? 그게 사실이란 말이지.”

 

박 옹은 어린 손자 명식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입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 나왔다. 자세히 들어보니 이런 말이었다.

 

그래, 명식아 네가 바로 개천에서 난 용이다. 이 집안을 살릴 용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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