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문학

‘카라마조프적’인 인간들이 사는 세상

박찬운 교수 2015. 9. 26. 18:00

‘카라마조프적’인 인간들이 사는 세상






쉽지 않은 독서를 끝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학창시절부터 읽기를 원했던 책이었지만 사정상 그 요약본만 읽었던 책이다. 스토리는 대체로 알고 있었지만, 나는 때때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썼다고 하는 이 책에서, 그가 말하고자 한 인간실존과 영원의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 책과 마주했다. 올해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틈만 나면 세계명작 중에서 읽기 힘들다고 하는 책만을 골라 읽고 있다. 2주 전 <레미제라블> 완역본 5권을 끝낸 다음 그 여세를 몰아 이 책을 읽은 것이다. 작년에 절반까지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어 이번만큼은 완독해야겠다는 의지가 불탔다.


이렇게 해서 나는 지난 한 달간 두 개의 대작 총 4천 쪽이 넘는 책을 읽었다. 이해가 안 될 때는 번역본을 달리해서 읽었으니 읽은 쪽 수는 기실 그 이상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는 몸으로 나타났다. 눈이 침침하다. 지난주는 사흘 이상 안구가 아파 고생했다.


이번 학기 나는 개인적으로 꽤 바쁘다. 다른 학기에 비해 한 과목을 더 강의해야 하고, 학교 내 외부 위원회 두 군데에 참여하고 있어-- 한 곳은 내가 위원장이기도 하다—시간적 여유가 없다. 학기 중 쓰기로 한 논문도 작업속도를 내야 할 판이라 마음은 초조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이런 대작을 읽고야 말았다. 뜻이 있으면 길은 있는 법이다.


독서가 끝나니 마음은 홀가분하지만 머리는 복잡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하나 둘 머리에 떠오르며 말을 걸어온다. 며칠 후 시간을 내 이 작품을 천천히 반추하고자 했지만 조급한 마음은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한다. 오늘 아침 전철을 타고 오면서, 학교에 도착하면 만사를 제키고, 이 글부터 써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긴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다. 그럴 시간도, 능력도 없다. 단지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관심 가졌던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1.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그의 삶은 극적이다. 삶 자체가 소설이다. 그는 평범한 서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생 가난했다. 톨스토이처럼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게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20대엔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다가 결국 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급기야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판이었다. 그런데... 그는 극적으로 살아났다. 사형집행 직전에 황제의 은전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 게다가 그는 간질병 환자에 놀음 벽이 있는 사람이었다. 젊은 날의 그의 초상은 이렇게 격정적이었고, 방탕했으며, 황폐했다.


이런 삶이 그의 작품 곳곳에 스며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중에서도 죽기 직전에 쓴 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야말로 그의 삶 전체가 녹아 있는 작품이라는 데에 이론이 없다.


2.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무엇을 그린 것인가
이 소설은 조그만 소도시에 일어난 친부 살인사건이 모티브가 되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에겐 그 사건 자체가 흥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인간존재의 실상과 영원의 문제인 종교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를 원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소설 곳곳에 나타난다.


탐욕스럽고 격정적인 인간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아버지만큼이나 격정적이고 본능적인 인간 큰 아들 드미트리, 지적이고 무신론적 인간 둘째 아들 이반, 순수하고 경건한 신앙인 셋째 아들 알로샤. 이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각기 그린 인간 실존의 전형들이다. 그들 하나하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삶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신과 연결시켰다. 신은 이들에게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과연 신이 축복한 인간은 누구였을까?


사실 우리가 읽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구상한 소설의 1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는 원래 2부에 걸친 장편소설을 쓰기로 하고 이 글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2부를 쓰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 이유인지 그가 서문에서 밝힌 이 소설의 주인공 알로샤가 이 소설에서 주는 메시지는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생각만큼 강력하지 않다. 작가는 2부에서 알로샤를 혁명가로 만들어 그를 통해 어떤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만일 2부가 완성되었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주는 메시지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을지도 모른다.


3. ‘카라마조프적’이란 말에 대해
이 책을 읽다보면 ‘카라마조프적’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내게 이 소설의 키워드 하나를 선정하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 단어를 선택할 것이다. 그만큼 이 단어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다. 그것의 직접적 뜻은 ‘카라마조프가 사람들 같은’이란 의미일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표도르 파블로비치, 드미트리, 이반, 알로샤의 성격을 생각해 보자. 이 네 사람의 성격이 하나로 나타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다. 한 사람에게서 이 네 사람의 성격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탐욕스럽고, 어떤 때는 동물적이고 격정적이며, 어떤 때는 지적이고 냉철하며, 또 어떤 때는 경건한 사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어쩜 ‘카라마조프적’인 인물로 상징화할 수 있는 사람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격정적이었고, 한 때 신을 부정했다. 때론 도박에 정신을 팔았으며, 간질병으로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아버지와 3형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전 생애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성격을 하나씩 나누어가진 존재가 아니었을까?


또 어쩜 ‘카라마조프적’이란 말은 우리 모두에게도 사용될 수 있는 말이다. 우리에겐 그런 카라마조프적 기질이 없는가? 조용히 생각해 보자. 여러분이나 나나 다소간 차이는 있겠지만 ‘카라마조프적’인 사람들이다. 누군가 이 질문을 내게 한다면 나는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도 카라마조프적인 사람이라고.


4. 종교에 대해
이 책을 읽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역시 종교다. 카라마조프가의 저 기발한 사람들은 사실 모두가 종교적인 인물이다. 하느님과 한판 씨름을 벌리는 구약의 야곱과 같은 인물들이다.


이 책의 신에 대한 이야기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종교에 관한 고백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영원의 문제, 곧 신의 문제이었다. 그의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두 인물에 의해 소개된다. 한 사람은 알로샤의 스승인 조시마 장로다. 그는 순결하고 경건한 인물로서 예수의 삶에 바짝 다가간 인물이다.


또 다른 인물은 카라마조프가의 둘째 아들 이반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무신론자로 알려진 인물로 그의 종교관은 파격적이다. 이 두 인물 중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은 이반의 신이라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만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조시마 장로의 종교관을 추종했다면 이 소설은 권선징악의 평범한 소설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종교란 그리 단순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씨름해도 승부가 날 수 없는 그런 세계이었으니 말이다.


이반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관은 제1권의 마지막 부분 <대신문관>이란 부분에 집약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반의 종교관을 무신론이라고 한마디로 재단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유신론적 무신론자다. 그것을 함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대신문관> 바로 몇 쪽 전에 나오는 말이다.


“비록 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점을 알아 둬, 그가 창조한 세계를, 신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야.”(민음사본 제1권 494쪽)


이반은 신을 인정한다. 다만 신이 만든 이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신이 만든 세상이란 무엇일까? 모순에 가득 찬 세상이다.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불의가 판을 쳐도 공의는 끝내 오지 않는 세상이다.


<대신문관>은 이반이 만들어낸 서사시다. 15세기 종교재판이 횡행하던 스페인 세비야에, 예수가 나타나 이적을 행하다가 붙잡혀, 감옥에서 추기경인 대신문관의 신문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이 부분 중 내 눈을 가장 자극한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자.


“...마침내 그들은 자유라는 것과 누구에게나 넘쳐날 만큼의 지상의 빵이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네들끼리 그것을 분배할 능력이 없는 족속이니까! 또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점도 확신하게 될 텐데, 왜냐하면 그들은 나약하고 하찮은 반역자들뿐이니까. 너는 그들에게 천상의 빵을 약속했지만, 다시금 반복하건대, 그것이 약하고 영원히 악덕하고 영원히 배은망덕한 인간 종족의 눈에 과연 지상의 빵에 비길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천상의 빵의 이름으로 수천, 수만 명의 인간들이 너의 뒤를 따른다고 해도, 천상의 빵을 위해 지상의 빵을 멸시할 만한 힘이 없는 수백만 명, 수억 명의 인간들은 어떻게 될까? 너에게는 고작해야 수만 명에 불과한 위대하고 강한 자들이 더 소중하고, 나머지 수백만 명, 약하지만 너를 사랑하는, 바다의 모래알 같은 수많은 인간들은 그저 위대하고 강한 사람들을 위한 재료가 되어야 한단 말이냐? 천만에, 우리에게는 약한 자들도 소중해...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선두에 서서 그들의 자유를 대신 견뎌 줌으로써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에 동의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경외심을 가질 것이며 우리를 신으로 간주할 것이니ㅡ그리하여 그들에게 있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결국에 가서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민음사본 1권 533-534쪽)


위의 말만 가지고서는 대신문관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나도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된 부분이다.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번역판본을 바꾸어(열린책들) 읽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야 어렴풋하게 그 의미를 잡을 수 있었다.


우린 예수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대신문관은 그것을 부정한다. 인간은 그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겐 그런 자유보다는 눈에 보이는 지상의 빵(물질?)이 중요하다. 인간은 그것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였고, 하느님의 자유를 가장하는 지상의 권력(교회, 교권 등)을 만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었다. 이런 노예인 인간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나라가 불가능한데 거기에서 어떤 죄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게 바로 인간의 실상이자 한계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반이 설파하는 무신론의 실체다. 하지만 우리는 모른다. 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아마 작가 자신도 모를 것이다. 이런 모습이 <대신문관>에선 이렇게 표현된다.


“노인(대신문관)은 상대방이 씁쓸하고 무서운 말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이든 좀 해주었으면 싶었어. 하지만 그(예수)는 갑자기 말없이 노인에게로 다가와, 아흔 살 먹은 그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는 거야. 바로 이게 대답의 전부야.”(민음사본 제1권 553쪽)


예수는 대신문관의 그 무지막지한 말에 반론을 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대신문관에게 다가와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 결론이다. 이 말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뿐이다.”

...

이렇게 해서 짤막하나마—물론 페북에 올리는 글로서는 매우 긴 글이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해 내 일단의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하다. 잠이 들면 이반이 보일는지,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드미트리가 보일는지, 아니면 해맑은 미소를 짓는 알로샤가 나타날지 모른다.


오래 동안 묵혀 놓은 숙제 하나를 풀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숙제가 기다리는 것 같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다르지 않은 또 다른 카라마조프가 내 속에 있기 때문이리라.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랜 세월 붙잡고 고민해야 할 숙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