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문학

의자놀이

박찬운 교수 2015. 9. 26. 18:14

시대의 증언록,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이야기 <의자놀이>를 읽고


내가 이런 글을 쓸 줄 몰랐다. 나는 오늘 새벽부터 공지영의 2012년 작 <의자놀이>를 읽었다. 머리말을 읽은 다음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방금 전 마지막 장을 넘겼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부담스러웠다, 아니 부끄러웠다.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와 그 가족들이 죽어갈 때, 나는 그들을 위해 한 일이 없다(정확히 말하면 몇 번에 걸쳐 그들을 후원하는 서명에 참여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명색이 대학에서 인권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에게 쌍용자동차 해고사건만큼 충격적 사건이 있을까. 2천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거에 해고되고, 그 후 그들과 그 가족들이 하나 둘 죽어갔다. 현재까지 무려 28명! 그런데도 인권법 교수인 내가 이 사건에 깊이 연루되지 않은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에 미리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가 공지영이 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 역시 이 일에 뛰어든 게 쉽진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경력 25년의 중견 유명작가가 아닌가. 그의 말대로 그 정도가 되면 원고료가 없으면 일기도 쓰지 않을 노회(?)한 작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사실 이 사건의 내용보다, 그게 더 궁금했다. 작가는 쌍용자동차 해고사건의 진실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게 목적이지만—나는 개인적으로 이 사건의 내용을 비교적 잘 알고 있다ㅡ나로서는 그 진실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그 정신, 그로 말미암아 나를 부끄럽게 하는 그 연민의 정을 알고 싶었다.


작가는 책 머리말에서 이 책을 내게 된 경위를 이렇게 짧지만, 매우 비장하게, 피력한다.


“자료를 조사하고 인터뷰를 하고 원고를 써내려가면서 많이 울었다. 후회한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리라. ‘왜 언론인도 아니고 내가?’라는 생각에 억울하다는 마음도 있었다. ...(중략)... (쌍용자동차 해고자 가족인) 그녀와 내가 동시에 눈물을 터뜨렸다. ...(중략)... 그녀의 눈물이 나로 하여금 잠들지 못하게 했고, 이 악물고 책상 앞에서 어떻게든 써내려가게 했다. 그녀가, 그 아이들이 그만 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머리말)


책 구석구석에서 나는 그가 이 사건에 천착하게 된 과정을 발견했다. 그 또한 한편에서 올라오는 부담감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참혹한 역사를 자신이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떻게 직장을 잃는다고 사람들이 삶의 끈을 놓는다는 말인가. 한 사람도 아니고 22명(이 책이 나올 때까지 쌍용자동차 희생자 수)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작가는 이 의문을 풀고자 했다.


“...어떻게 평소에 몸과 마음이 건강했던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을 매고 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베란다의 높이가 이만큼 낮게 보일 수 있을까, 어떻게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부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질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한 본능적이고 철저한 경계, 그것은 삶의 가장, 아주 당연한 조건이 아니던가.”(36)


이 유명작가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하나가 되는 장면은, 나로서는, 그의 고백 이상으로 옮길 방법이 없다. 따뜻한 방안에서 잠을 자고 글을 쓰고... 이 모든 것이 죄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들의 지지자가 되는 것은, 그에겐,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들은 “도와주세요.” 소리도 차마 못하고 거기 차가운 길바닥에 얼굴을 대고 엎어져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을 두고 나 혼자 이 따뜻한 집으로 돌아온 듯 가슴이 쓰려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냥 이것이 피해갈 수 없는 길이며, 피해서도 안 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콧등이 시큰거리게 하면서 눈물이 올라왔다. 오랜 경험을 통해 나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의 길이 그리로 가고자 할 때 내 육체와 영혼을 다해 그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47)


“내가 재벌이라면, 내가 정치인이라면, 내가 고위관료, 내가 법원이라면 이 사람들 눈물을 닦아줄 방법을 알 수 있을 텐데, 아니, 내가 신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고작 글을 써서 이들을 돕겠다는 내가 한심했다. 아니, 실은 이들의 고통 속으로 들어서는 일이 싫고 두려웠다. 그러나 이미 나도 그들의 고통에 감전되고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61)


쌍용자동차파업사태 이후 해고노동자는 오래 동안 덕수궁 대한문 앞을 지키며 해고의 부당함을 세상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어느 비오는 날, 작가는 잠을 자지 못했다. 그들 해고자들이 그 비를 어떻게 견딜까하는 안쓰러움에. 다음 날 그는 현장으로 달려간다.


“내가 쌍용자동차에 대한 글을 쓰고 자료를 검색해나가던 어느 날, 비가 내렸다. 많이 내렸다. 그들을 알아버린 탓에 밤새 배가 들이치지 않았는지, 잠은 잘 수 있었는지, 빗소리에 나도 뒤척였다. 축축한 거리에서 밤새 또 잠 못 자고 울고 있나 싶자 울음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마음이 아파왔다. ...(중략)...아침이 오자마자 택시를 타고 대한문 앞으로 갔다. ... 보온병에 담아서 간 따뜻한 차를 건넸더니 들어오라고 하셨다. ...(중략)...이제 나는 이 거리의 움막 같은 분향소가 낯설지 않았다. 대학 때도 하지 않던 그 거리 농성을 쉰이 다 되어서 하게 된 것이다. ... 차를 마시며 우리는 웃었다. 아마 내가 그들과 처음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을 거라고 기억한다.”(110-111)


작가가 보는 쌍용자동차 사태는 단순히 한 기업에서 자행한 무자비한 정리해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의 노동문제의 근본을 들여다본다. 죽음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이 땅의 노동자들의 현실을 직시한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확정 발표가 있은 2009년 5월 어느 날 세 사람은 짐을 싸들고 높이 70미터의 공장 굴뚝으로 올라간다. 왜 이들은 사람 살 곳 못 되는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것이었을까? 왜 이토록 삶과 죽음의 벼랑 끝에서 서서 처절한 투쟁을 하여야만 하는 것이었을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투쟁은, 불온한 사람들, 빨갱이들의 과격한 투쟁에 불과할 따름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에겐 그들의 직장이 바로 생명임을 알아야 한다. 해고는 그 생명의 불꽃을 꺼버리는 잔인한 행위이다.


“...가정과 직장, 이 두 들판이 우리의 인생인 것이다. 그리고 가정이 무너지면 가끔 직장생활도 무너지지만, 일터가 무너지면 가정은 거의 대부분 무너진다. 아무런 사회안전망, 즉 재취업과 실업보험, 혹은 무상교육, 무상의료, 주거 등에 대한 약속 없는 정리해고는 삶에서 해고된다는 말과 같다.”(93)


그러니 제2, 제3의 쌍용자동차 사태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이 사회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꿈이 되어야 한다. 작가의 꿈은 이런 것이다.


“나는 꿈꾼다. 최소한 두 가지.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고, 돈이 없어 교육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 나라. 자고, 먹고, 입는 것이 최소한 보장되는 나라..... 그래, 그 돈이 없어서 우리는 그들을 보냈다.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독과 절망으로 세상을 향해 한 글자도 남기고 깊지 않을 만큼의 절망 속에서 말이다.”(148)


공지영이 결국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단순한 사실기록, 그것이 아니다. 이 사회 모든 구성원에게 이것 하나를 호소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노동철학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제는 철학을 생각해야 할 시점이 다시 온 것 같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삶이 무엇 때문에 지속된다고 생각하는지, 인간의 노동이 무엇인지, 인간은 무엇으로 고난을 이겨내는지 그런 철학 말이다.”(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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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서도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그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나 역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학교에 있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결심을 하진 못했지만 나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그 무엇인가를 할 것은 분명하다. 우선 가을 학기가 되면 내가 맡을 인권과목에서 이 책을 내주고 모든 학생들에게 독후감을 하나 써오라고 할 것이다. 학생들은 이 책을 읽고 무엇을 생각할까.


이제 글을 맺으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나는 공지영이란 작가를 아직껏 만난 적이 없다. 유명작가란 것 외에는 아는 게 없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런 뛰어난 공감능력의 소유자를 이 시대의 작가로 만난 것에 대해 감사할 뿐이다.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부디 지치지 말고 당신의 삶이 다할 때까지 그 아름다운 분노를 이어가시라는 것이다. 붓은 검보다 강한 것이니, 당신은 정치인보다, 법률가보다 더 강력한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런 글을 쓰는 한 당신 옆엔 언제나 열렬히 지지하는 독자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작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상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