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체포 구금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직변호사 제도의 기원에 대하여>
오늘은 본업과 관련하여 한 마디 하자.
사람이 살다보면 경찰서, 검찰청 한 번 안 가고 살긴 어렵다. 선량한 사람은 해당 안 될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경찰서, 검찰청에 가면 처음부터 주눅이 든다. 어제까지 검찰청에서 검사로 근무한 변호사도 검찰청사에 들어갈 때는 일약 갑의 기분에서 을의 기분으로 바뀐다고 한다. 게다가 체포되어 유치장 신세까지 져보라.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래서 수사기관에 혹시나 체포 구금되었을 때 든든한 옹호자가 즉시 달려 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변호사다. 이것은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 든든한 옹호자가 옆에 있어야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억울한 일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형사변호를 해보면 잘 알지만 수사 초기, 그러니까 경찰서 단계에서, 단추가 잘못 꿰지면 웬만해서는 그 억울함을 풀기 어렵다. 처음부터 변호사를 옆에 두고 수사를 받지 못하면 빼도 박지 못할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변호사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돈 많은 사람들은 수사기관에 갈 때, 언제부터인지, 변호사를 대동하지만 일반 민초야 언감생시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는 일반 시민이 변호사를 만나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그러니 그 때 인권변호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변호사 초년 시절 형사변호에 관심이 많았다. 통상 그 시절 형사변호를 많이 하는 변호사는 지금의 변호사들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요즘은 변호사들이 전용 운전기사를 고용하는 예는 아주 드물지만 그 당시는 웬만큼 돈을 버는 변호사는 죄다 운전기사가 있었다. 형사변호를 많이 하는 변호사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돈을 많이 벌었다.
나는 형사변호에 관심은 많았지만 형사사건은 별로 없는 변호사였다. 그러니 사건으로 돈을 벌지는 못하고, 대신 연구만 많이 했다. ㅎㅎㅎ
1991년 초 민변에 가입하면서 나의 형사변호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질적, 양적 도약을 한다. 당시 적지 않게 발생하던 시국사건의 양심범을 직접 변호하면서 형사절차에서의 인권문제를 실감나게 연구할 수 있었다.
1992년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 나는 열심히 일본어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일본을 한 두 번 오갔는데, 어느 날 우연히 일본변호사연합회에서 나오는 월간저널 <자유와 정의>를 보았다.
거기에는 일본변호사들이 한국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회에서 만든 <당번변호사제도>가 특집으로 실려 있었다.
그것은 수사기관에 일반시민이 체포구금되었을 때, 당사자나 가족이 변호사회에 연락을 하면 그날의 당번 변호사가 달려가서 조언을 해 주는 제도였다.(이런 제도의 원류는 영국에서 찾을 수 있는 데, 거기에서는 Duty Solicitor 제도라고 한다. 일본 변호사들이 이 용어를 당번변호사로 번역한 것이다).
나는 책상을 쳤다! 바로 이거다! 나는 즉시 일본의 당번변호사 제도를 소개하는 글을 써 <법률신문>에 기고했다. 그리고 말미에 우리도 하루 빨리 이런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얼마 뒤 내 제안이 정식으로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채택될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민변 출신인 김창국 변호사가 회장으로 출마를 한 것이다. 나는 그 분의 선거참모가 되어 나의 제안을 선거공약으로 넣었다. 1992년 12월의 이야기다.
드디어 1993년 1월 말 서울변호사회의 회장 선거. 여기에서 김창국 회장은 민변의 젊은 변호사들의 지원을 받아 당당히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김창국 변호사의 회장 당선으로 나의 제안은 날개를 달았다. 새로운 집행부에서 나는 인권위원이 되었고 이 제도의 성안은 나의 오롯한 임무가 되었다.
과연 한국에서는 일본의 당번변호사가 어떤 모습으로 도입될 것인가?
당시 이 제도 도입을 위해 서울변호사회는 인권위원회 산하에 소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장은 안상수 변호사, 간사는 바로 나였다.
여담이지만 지금은 창원시 시장이 된 안상수 변호사는 박종철 고문사망 사건으로 알려진 검사 출신 변호사였다. 이 분이 국회의원이 되는 과정에서 인권변호 활동 경력이 각광을 받았는데, 내가 기억하는 한, 이 분의 인권활동과 관련된 가장 큰 업적은 이 소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활동한 것이었다.
우리 소위원회는 40회 이상의 회의--아마도 변호사회 역사상 한 제도를 만들기 위해 이 정도의 회의를 한 것이 얼마나 될까--를 소집하여 제도의 틀을 만들었다.
나는 이 소위원회에서 우리 제도의 명칭을 <당직변호사 제도>로 할 것을 제안했고, 그 제도의 골격안을 만들어 냈다. 제도의 모든 프로세스를 담은 안내서도 손수 만들었다.
드디어 이 제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3년 5월 1일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당직변호사 제도>가 어느새 올해로 만 21년이 지났다.
<당직변호사 제도>는 지금도 서울변호사회의 대표적인 공익인권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있고 지난 20년 동안 서울을 넘어 전국 모든 변호사회로 전파되어 변호사회에서 실시하는 공익인권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발전했다.
아래에 사진 두 장을 올린다. 하나는 당시 만든 운영 매뉴얼이다. 40여쪽에 불과한 안내서지만 나의 땀이 담긴 책자이다. 둘째 사진은 그 안내서의 서문이다. 이 서문을 보니 21년 전 이 제도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나온다.
박재승 인권위원장(이 분은 그 뒤 서울변호사회장을 거쳐 대한변협 회장이 됨), 안상수 소위원장 그리고 위원으로 참여했던 김현(후일 서울변호사회장이 됨), 박성호(현재 한양대 지적재산법 교수), 백승헌(뒤에 민변 회장이 됨), 성민섭(현재 숙명여대 법대 교수) 변호사의 이름이 보인다.
<당직변호사 제도>의 이용과 관련해서는 다음 사이트를 열어 보시라.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https://www.seoulbar.or.kr/EgovPageLink.do…
(2014. 8. 7.)
당직변호사제도 안내서, 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
당직변호사 안내서 서문, 자세히 보면 그 당시 이 제도와 관련된 변호사들의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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